최근 1~2년 사이 배우 김아중의 세계가 새로운 ‘막’에 진입한 것 같았다. 그녀는 본인이 지닌 차분하고 명료한 결을 분명히 할 때 빛이 났다. <펀치>의 검사 ‘신하경’이, <원티드>의 톱스타 ‘정혜인’이 그랬다. 능란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지닌 전문직 종사자 고유의 무드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면서도 조재현, 박신양, 김래원 등 저돌적으로 연기하는 남자 배우들의 에너지에 밀리는 법이 없었다. 깊고 정확한 톤의 눈빛과 목소리로 극의 무게를 더했다.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신하경과 정혜인처럼 자신의 목표와 신념으로 움직이는 주체적인 여성들이 존재하는데, 왜 유독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만큼은 이런 멋있는 여성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까. 남성 과잉의 배우 세계에서 김아중의 최근 행보가 유독 반갑다.
촬영 당일, 김아중은 올해 그녀가 유난히 많이 입었을 H라인 스커트나 잘 재단된 재킷이 아니라 감 좋은 캐시미어 니트 스웨터와 넉넉한 실크 팬츠를 입고 맨발로 소파와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그녀에 대한 하루치의 감상을 적자면 ‘억지스러움이 없다’다. 낙천적으로 보이려고 애쓰거나 소탈한 척하지 않고, 너무 예민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았다. 그녀 특유의 담담한 에너지가 촬영장에 편안한 적막과 기분 좋은 긴장을 불어넣었다.
촬영이 끝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오늘 화보 무드가 실제 그녀의 성품과 닮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소심하다가도 일할 때는 대범해지기도 한다. 기획사 식구들은 배우치고는 꽤 현실적인 편이라 하고 스타일리스트 한혜연 이사님은 사차원이라 한다. 사실 나도 배우 김아중보다 한 개인으로서의 김아중을 잘 모른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왔다. 계속 알아가는 중이다.” 그녀의 말이 맞다. 매일이 새롭고, 상황은 변하는데 스스로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이며, 행여 잘 알고 있다고 확언하는 이의 말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저 매 순간 힘을 다 써야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는 그녀의 말이 오래 남았다.
오늘 편안한 컨셉트로 촬영을 한 건 작품 밖의 배우 김아중의 일상이 잘 상상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예능 프로 등 작품 외에 노출되는 일이 적기도 했고. 사생활을 애써 감춰온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성격도 못 된다. 성격이 털털하면 좋은데 스스로 내가 털털한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 털털한 척은 못 하는 거다.(웃음) 예능 프로를 좋아하고, 기회가 되면 응하고 싶지만 굳이 거기에서 ‘나는 이렇게나 많이 먹어’, ‘이렇게 망가질 수도 있고’, 이‘ 만큼 웃길 수도 있다’고 연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난해 출연한 드라마 <펀치>와 <원티드>가 호평을 받았다. 개봉을 앞둔 영화 <더 킹>까지 세 작품 모두 사회·정치적 이슈와 권력관계를 주제로 한다. 현실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 반드시 작품에 사회의식이 담겨 있어야 하고, 강한 에너지가 흘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 자체에 집중이 되는 작품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내 취향이 이랬구나’ 싶다. 이야기가 현실적인지 따지기보다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를 더 따져 묻는 편이다. ‘에이, 저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 말도 안 돼’라고 느껴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오‘ , 그럴듯하다. 일어날 수도 있겠다’ 하고 다가오는 작품이 있는데 후자 쪽에 끌린다.
센 남자 배우들 틈에서 몸 사리지 않고 때로는 이들보다 더 힘 있게 이야기를 밀어붙이기도 했다. 실제 성격이 연기에 얼마큼 반영되는 것 같나?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은 밀어붙이는 편이다. 다만 작품 안에서 이런 종류의 밀어붙임은 배우로서 여유가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혹시라도 내가 느슨해지거나 몸을 사리고 있지는 않나 되돌아본다. 매 순간 힘을 다 써야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극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경우도 많았다. 흔히 장르물에서 여성 배우는 쉽게 소비되기 마련인데 혼자 꽃처럼 피어 있지 않아서 더 좋았다. 때로는 꽃 같은 역할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웃음) 본연의 여성성만으로도 하나의 캐릭터를 지탱하는 배우들이 있다. 보통 굉장히 예뻐야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 한데 나는 그렇게까지···.(웃음) 목적성이 뚜렷한 캐릭터를 해야 하는 외모가 아닌가. 신인 때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다. 물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해냈을 때 나만의 길을 잘 걷고 있다는 뿌듯함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깊은 성량과 음색, 정확한 발음이 캐릭터에 힘을 크게 보탠다. 장르물을 할 때는 작품 들어가기 전에 훈련을 하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대사로 전달해야 하는 사건이 많고, 동시에 감정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시청자의 호흡까지 당겨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중요하다. 발음은 악센트를 앞쪽에 실어서 하는 편이다. 악센트를 뒤로 밀었을 때보다 확실하게 앞으로 내줄 때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된다.
이번 영화 <더 킹>에 출연한 계기가 한재림 감독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대가 컸을 텐데, 직접 경험하니 어떤가? 한재림 감독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에 역할의 크기에 상관없이 출연하고 싶었다. 나중에 함께한 배우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 ‘나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영화는 끝내줄 것 같다’고. 영화가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신뢰를 한순간도 잃지 않은 현장이었다. 나와 전혀 다른 해석으로 현장에서 연기를 주문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당시에는 잠시 당황하기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신기한 경험이었다. 확실히 한재림 감독만의 시선이 있다. 그간 특유의 아이러니들이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졌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 현장이었다.
이 작품 역시 정치권력이 이야기의 큰 틀이다. 연달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하고 있다는 우려는 없었나? <더 킹>은 전혀 다른 느낌의 작품이다. 대본을 읽을 당시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접할 법한 블랙코미디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정치와 이권 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그간 무겁게 다뤄왔다면 <더 킹>은 꽤 가볍게 풀었다. 영화에는 정권이 교체됨에 따라 경찰과 검찰 내의 서열이 바뀌고, 그 세력들이 이권 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과장된 상황들이 벌어진다. 굿판도 벌이는가 하면···. 촬영 당시에는 정말 웃겼는데···
선견지명이 있었던 걸까? 맞다. 지독한 현실주의 작품이 돼버렸다.
한 인터뷰에서 ‘좋은 작품에 대한 갈증도 심하고 자책도 한다’고 말했다. 당시의 생각과 지금 얼마나 달라졌나? 여전히 그렇다. 작품마다 나 자신의 한계를 꼭 본다. 이‘ 게 부족하구나, 이게 나의 최선이구나’ 하며 아쉬워한다. 고치고 바꿔나갈 것들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모두가 호평해도 아쉽고 한계를 느끼는 건가? 작품을 끝내고 적어도 1년은 지나야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거 같다. 그래서 주변 조언에 귀 기울이는 편인데, 이번 드라마 <원티드>를 끝내고 받았던 피드백 중 하나가 ‘연애를 너무 오래 안 한 티가 난다. 작품이 세서 그런 건지 여성성이 없어지려고 한다. 김아중의 다음 작품은 연애다’다. 수트 입혀 놓고 머리만 짧게 자르면 영락없는 남자 캐릭터라고 말이다.(웃음) 연애를 해야 내재된 여성성이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난다는 말인 거 같은데···.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연애를 오래 쉬었다니. 사람을 좀 만나야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텐데···.
하긴 인스타그램에 너무 촬영 현장 사진만 올리더라. 아, 인스타그램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스케줄을 함께 다니는 막내 스타일리스트 친구가 좀 알려줘서 그 정도 하는 거다. 그 친구에게 어떤 사진을 올릴까 하고 물어보면 ‘그냥, 하지 마셔’ 한다. 꽃은 왜 올리는 거냐며 다 지우라고 한다. 이런 걸 좀 잘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근데 이게 배운다고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