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화이트 셔츠 코스(cos), 블랙 니트 스웨터 탑텐(TopTen). 화병 이딸라(Iittala).

촬영을 마치고 배우 이지훈과 마주 앉으니 밤 12시였다. 단 몇 시간 동안 목격한 그는 타고나길 살뜰한 남자다. 늦은 시간에 촬영하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고, 스태프들의 다음 날 출근 시간까지 물어본 뒤 ‘많이 웃겨드리겠다’고 말하며 자기가 먼저 웃었다. 일상에서 살뜰하게 타인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배우 이지훈은 극 중 캐릭터의 결 하나하나를 사려 깊게 읽어나간다.

그런 이유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의 ‘허치현’은 그가 연기했기 때문에 ‘악인이자 악인이 아닌’ 인물로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머니를 향한 애증과 새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 이복동생에게 느끼는 열등감을 온순한 얼굴 뒤에 숨긴 채 들끓는 감정 변화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역할에 대한 해석도, 쌓아온 필모그래피도 차분하다는 말에 그는 “천천히 올라 갈게요. 저는 급하게 갈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보이지 않는 지름길을 찾으려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방향감각을 잃지 않은 채 같은 속도로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것. 지금 배우 이지훈이 가장 잘하고 있는 일이다.

이지훈

레드 스웨터 랙앤본 바이 비이커(Rag & Bone by Beaker), 그레이 터틀넥 일레븐티(Eleventy).

함께 일한 사람들이 왜 한결같이 칭찬하는지 알겠어요. 촬영 현장에서 사람들과 편해지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현장에서 불편함을 느끼거나 주눅들면 말리는 타입이에요. 연기가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아무리 대선배님이라 해도 무조건 먼저 가서 비벼요.(웃음) 선‘ 배님 저 좀 잘 봐주세요. 연기 잘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는 거예요. 어딜 가도 비타민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보이지 않으면 오‘ 늘은 걔 안 오니?’ 하며 찾게 되는 사람. 현장에서 환영받아야 내가 그만큼 편히 연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기운을 나눠주는 유형의 사람 같아요. 작품은 공동 작업인데 내가 그 사람 기 빨아서 뭐하겠어요. 모두의 기가 잘 섞이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내 기운만 세면 물론 나는 잘 보이겠지만 그 신은 망하는 거니까요.

‘순둥순둥해’ 보이지만 <푸른 바다의 전설>을 촬영하면서 12kg을 감량했어요. 독한 면이 있네요? 연기 욕심이 커요. 부잣집 아들로 무탈하게 살아온 인물이라 초반에는 살을 많이 찌웠어요. 극이 진행되면서 큰 감정 변화를 겪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시점부터는 급격히 살을 뺐죠.

극이 진행될수록 인물을 입체감 있게 만들어나갔어요. 악역인데 어딘가 짠하기도 했어요. 대학생 때 히키코모리와 관련한 심리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시 교수님이 히키코모리라고 해서 하루 종일 우울하거나 움츠려 있는 것이 아니다. 밖에 나오지 않을 뿐이지 집 안에서는 웃으며 즐겁게 지내는 사람도 있다고 하셨죠. 사람의 결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이야기일 거예요. 허치현도 그렇게 해석하려고 했죠. 아픔과 열등감이 있다고 해서 좋아하는 여성 앞에서까지 늘 주눅 들어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녀 앞에서는 수줍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두고는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봤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 속까지 지레짐작하지 않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작품 안에서든, 밖에서든.

차분하고 꾸준하게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어요.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 ‘소처럼 일하겠다’는 다짐을 잘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밑천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소처럼 일하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쉬면 연기가 정체될 것 같아서 어떤 역할이든 불러주시면 가리지 않고 다 했어요.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반에는 혼자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 수업>이나 <연기론> 등 ‘연기의 정석’ 같은 책을 보며 공부했어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은데 물어 볼 데도 없으니 막히기도 많이 막혔죠. 현장에서 감독님들에게 혼도 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연기를 배웠어요. 속상하니까 자책도 많이 했고요. 그래도 요즘은 조금씩 제 연기가 정돈되고 있다는 느낌이 와요.

자책하면서도 왜 연기를 놓지 못했어요? 그러지 않아도 1년 정도 쉰 적이 있어요. ‘계속 이렇게 연기를 해도 되나?’를 시작으로 ‘내가 재능이 있기는 한가?’,  ‘온전히 노력만으로 연기를 터득해야 하는 사람은 아닌가?’ 등 스스로에게 비관적인 질문을 많이 한 시기죠. 한 3개월을 그렇게 지내니까 고민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연기가 하고 싶어 미치겠더라고요. 부족함을 느끼더라도 현장에서 느끼고 싶고 혼나더라도 현장에서 혼나고 싶어졌어요. 그 순간부터 욕심이 생기고 마음이 요동쳤죠. ‘나 지금 왜 집에 있지? 빨리 감독님 만나고 촬영장 가야 하는데’ 했어요.

 

짧지만 강렬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나니 각오가 단단해지던가요? 저 이제 죽을 때까지 연기 할 거예요. 할 줄 아는 다른 것도 없어요. 축구로 시험을 봐서 대학에 입학했고 축구 선수가 꿈이었는데 축구를 못 하게 됐거든요. 축구 다음으로 이만큼 하고 싶은 일이 연기밖에 없어요.

승부욕이나 근성 같은 운동선수의 기질이 배우라는 직업에도 영향을 주나요? 군대에서 동기나 간부들이 ‘네가 무슨 배우냐, TV에 나오겠다고?’ 하면 ‘에이, 저 꼭 할 겁니다’ 웃으며 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디 두고 봐, 무조건 할 거야’ 했어요. ‘잘생긴 건 아니지만 못생기지도 않았다. 얼굴이 나처럼 도화지 같아야 어떤 역할을 해도 잘 흡수하지, 나는 뭔가 될 거 같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더 미친놈이라고 했고요.(웃음)

혼자 앓은 시간이 길었던 만큼 하고 싶은 일도 많죠? 요즘 이전 영화들을 다시 보는 중인데 최근 본 영화가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에요. 신체적 지체가 있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역할을 조심스럽게, 잘해보고 싶어요. 지금까지 실생활에서 약자를 대변하며 살지 못했기 때문에 작품에서 만큼은 메시지가 있는 역할을 맡고 싶고요. 돈도 많이 벌어서 무료 급식소도 운영하고 싶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관심이 많네요. 20대에는 나 하나 챙기기 바빴고, 이제 조금씩 사랑도 받고 있으니 책임 있는 행동을 하고 싶어요. 가끔 ‘지금보다 잘되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하고 생각해보는데 설사 톱스타가 된다고 해도 매일 집에 숨어 나만의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성격상 그런 인생은 못 살아요. 숨어 지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정우 선배님을 무척 좋아하는데, 낮에 강아지랑 잠원 한강공원을 산책하다가 익숙한 분을 본 거예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처음에는 잘못 봤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하정우 선배님이었어요. 티셔츠 차림에 가방 하나 메고 여의도까지 혼자 걸어가시더라고요. 의식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 모습에서 산책을 즐길 줄 아는 분이라는 걸 느꼈죠. 대낮에,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하정우가 한강을 걸었다니까요. 그 모습을 보고 연기하는 사람은 세상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다시금 생각했어요. 저 역시 그렇게 믿어왔기 때문에 선배님한테 더 반했던 것 같고요.

세상 구경하러 또 어디에 자주 가요? 잠실 롯데월드몰이요. 매달 2일이 나 3일에 정산이 되는데 자라(Zara)의 신상이 나왔다는 메시지를 받으면 친구들이랑 옷 사러 가요. 큰돈 들이지 않고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거죠. 가서 사람 구경하고, 알아보고 알은체해주시면 같이 사진도 찍어요. 친구들이랑 풋살 하러도 자주 가고요.

연기 모범생인 줄만 알았는데, 일상도 재미있게 즐기는 것 같아서 좋아보여요. 외로워서 그래요. 친구들과 어울리며 세상을 보는 게 나에게 맞는 삶의 모습이고, 인간 이지훈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혼자 사는 건 너무 외롭잖아요.

 

이지훈

데님 재킷 생 로랑(Saint Laurent), 블랙 팬츠 리바이스(Le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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