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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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고든이 있다. 다른 동네에서 전학 온 외톨이 아이는 어느 날 자신에게 먼저 다가온 친구에게 마음을 열고 의지한다. 그렇게 열아홉 살이 되어 친구들과 만든 밴드에서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가사를 쓰지만 고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서 밴드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는다. 결국 그는 불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연극 <나쁜 자석>은 자신과 같은 자석에 다가가기 위해 자석의 성질을 스스로 버리고 마는 나쁜 자석의 이야기다. <피고인>에서 악역의 오른팔인 ‘석이’를 연기하며 크지 않은 역할로 의외의 존재감을 보여준 배우 오승훈이 나쁜 자석, ‘고든’을 연기한다. 오랫동안 믿어 의심치 않던 농구 선수라는 길을 접고, 선수 시절의 승부욕과 오기로 배우의 길에 접어든 그는 이제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중이다.

드라마 <피고인>은 막 끝났지만, 연극 <나쁜 자석>은 계속하고 있다. 점점 활동 반경이 넓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스물한 살에 연기를 시작했으니 20대 중반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준비한 시간이 꽤 길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 것 같다. 다양한 작품의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오늘처럼 인터뷰도 하며 활발히 움직이는 지금의 나 자신이 반갑고 숨 쉬는 것 같다. 지금껏 내가 해온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되기도 한다.

원래 농구 선수였다. 오랜 시간 하던 일을 접고 완전히 새로운 일을 준비 하며 보낸 시간은 혼돈의 시기였을 수도 있겠다.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보다 좀 더 탄탄하게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구를 그만두긴 했지만 운동하면서 생긴 오기와 승부욕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10년 넘게 농구 선수를 꿈꾸며 살아왔는데 부상으로 관둬야 했다. 농구 선수로 탄탄한 길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밑바닥을 경험하게 됐다. 10년 이상 꿈꿔온 일에서 실패를 겪으며 느낀 패배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연기를 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배우고 준비한 것 같다.

또다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두렵다. 아마도 실패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라는 게, 말하자면 노이 로제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쁜 자석>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바쁘게 지내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도 된다. 여전히 오디션을 열심히 보러 다녀야 하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 계속 연기를 해야 하니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뿌듯하고 행복하다.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은 연극의 매력으로 관객과 호흡하는 점을 많이 꼽는데 어떤가? 그런 점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연극은 상대 배우와 함께 만들 어가는 느낌이 더 강하다. 드라마는 여러 차례에 걸쳐 끊어서 촬영하지만 연극은 두 시간 넘도록 한 번에 이끌어가야 한다. <나쁜 자석>에는 내가 연기 한 ‘고든’의 독백 장면이 나오는데 대사 분량이 A4 용지로 다섯 장에 달한다. 나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웠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극은 항상 도전하는 기분이 든다.

 

재킷과 팬츠 모두 코스(Cos), 스니커즈 컨버스(Con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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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공연과 드라마 촬영이 겹치는 기간이 있었으니 신인 배우로서 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많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쁜 자석>의 ‘고든’을 완벽하게 준비해놓으려 했다. 툭 치면 바로 고든이 나올 수 있도록. <피고인>의 ‘석이’는 현장에서 많이 배우며 만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욕심만큼 잘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나쁜 자석>만 하고 있는 지금은 더 집중력을 가지고 조금씩 다른 연기를 해보기도 하고 그런다. 그런데 <피고인>과 함께 할 때에는 정해진 틀에서만 연기하려 했던 것 같다.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내가 준비한 걸 마음껏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더블 캐스팅이나 트리플 캐스팅인 경우가 많다. 배우의 색깔에 따라 캐릭터가 달라지는데 오승훈의 고든인 ‘훈고든’은 어떤 색을 지녔나? 소심한 고든을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독하다고 해서 늘 주눅 들어 있는 건 아니니까. 아홉 살의 외톨이 고든에게 친구들이 놀자고 했을 때 결국 자기 의지대로 간 것이 아닌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혹은 사랑스러움을 담아내고 싶었다. 캐릭터에 확신이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확신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이 대단히 잘나지도 않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명확하게 답할 수 없다. 지금은 연기를 하면서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함께 연기하는 배우와 감독, 작가, 선배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답을 찾는 중이다.

농구 선수를 관두긴 했지만 농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농구를 예능으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겠다. 전혀. 십 몇 년에 걸친 농구 인생이 헛 되지 않도록, 그 기억을 좋게 간직하라고 선물로 받은 기분이다.

원치 않는 이유로 미래의 방향이 바뀌었으니, 인생에서 사고를 당한 느낌이었을 것 같다. 부상 때문에 농구를 관두고는 온 세상의 분노가 다 내 것인 것만 같았다. 유망주였을 때에는 모두가 나를 환영했는데, 부상을 당하니 인사조차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락한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머니 덕 분에 힘을 냈다. 어머니가 고깃집을 운영하는데 영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지셨다. 고깃집이 육체적으로 무척 힘든 일이거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욕심이 생기는 장르나 캐릭터가 있나? 연극 <렛미인>부터 <나쁜 자석>, 드라마 <피고인>과 올해 개봉할 영화 <괴물들>까지 색깔이 강 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기회가 된다면 좀 더 나다운 역할을 하고 싶다. 청춘 드라마 같은. 실제의 나는 밝고 장난도 많이 치고, 또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도 지금껏 많지 않은 작품에서 어둡고 무거운 역할에 캐스팅 된 건 운동을 관두면서 쌓인 고독함과 외로움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때 겪은 그런 감정들이 지금은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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