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와 니트 베스트 모두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야욕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마저 모질게 외면하는 남자가 있다. 마음 터놓을 친구 하나 두지 못한 채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도려낸다. 그토록 집요하게 달려들다 파멸의 길에 들어선 남자는 결국 끝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잊힌다. 드라마 <귓속말>의 ‘강정일’은 극이 전개되는 내내 상대가 가장 아파할 순간을 위해 숨을 가다듬으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른다. 그러곤 기다렸단 듯이 악랄한 기세로 내달리다 또다시 넘어지고 일어선다. 이렇게 지독한 강정일의 삶을 연기한 건 올해로 10년차 배우인 권율이다. 긴장감을 극으로 끌어올리며 종영한 이 드라마가 끝난 후 권율은 한 달 만에 영화 <박열>로 돌아왔다. <박열>에서는 두 주인공인 박열과 후미코가 가진 신념과 그들이 밝히고자 하는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 끈질기게 달려드는 기자 ‘이석’을 맡았다.

돌이켜보면 권율은 지난 10년간 자신만의 페이스로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그려왔다.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영화 <피에타>를 거쳐 독립영화 <잉투기>에서 처음 주연을 맡아 극을 이끌었고, 이후 역대 최다 관객수를 기록한 <명량>에 출연해 자신의 자리를 다졌다. 지난해에는 한예리와 함께 영화 <최악의 하루>에 출연했으며, 드라마 <싸우자 귀신아>의 주인공을 연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마다 새롭게 만난 작품들은 연기에 대한 신념을 다질 수 있게 해 권율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잠시 쉬어 가는 길목에 들어선 권율은 지금, 그간 걸어온 시간 동안 쌓인 자신의 진심을 바라보고 있다.

 

코트 닐 바렛(Neil Barrett), 반소매 셔츠 노앙(Nohant),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톱과 팬츠 모두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샌들 타임 옴므(Time Homme).

니트 스웨터와 셔츠,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샌들 자라(Zara).

얼마 전 드라마 <귓속말>과 영화 <박열>을 연달아 끝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오랜만에 푹 쉬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다른 때보다 심적으로 무겁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그간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독을 쌓아두고 있었는지, 스케줄을 다 끝났을 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며칠 동안 집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내내 긴장하고 있다가 긴장이 탁 풀리면 몸살에 걸릴듯한 느낌이 들 지 않나. 딱 그랬다.

특히 <귓속말>의 향이 컸을 듯싶다. 스토리 내내 끊임없이 긴장감이 흐르는 드라마였으니까. 연기한 캐릭터도 심상치 않은 악역이었다. ‘강정일’은 그간 내가 연기해온 역할 중 가장 비정하고 예민한 캐릭터다. 밑도 끝도 없이 나쁜 일만 저지르는 악당이라면 좀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 캐릭터는 굉장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침착하게 비열한 행동을 하니까 모든 신이 힘들었다. 게다가 드라마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욕망을 지독하게 물고 늘어진다. 캐릭터가 끈질긴 만큼 연기하는 나도 그런 심리를 독하게 끌고 나가야 했다.

배우가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은 다각도에서 이뤄지겠지만, 그 인물에게 어느 정도 인간적인 공감을 느끼는 과정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강정일이라는 남자에게서는 어떤 감정이 느껴지던가? 강정일이 자신의 야망만 바라보고 달리는 것처럼 나도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목적에만 충실하려 했고,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런 집착이라는 감정이 공통분모로 작용했을 듯싶다. 또 강정일은 항상 온 힘을 다하면서도 상대를 경계하느라 숨을 참고 웅크릴 줄 아는 인물이다. 그래서 연기할 때도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가다듬기를 반복했다.

드라마에 이어 요즘은 화 <박열>도 반응이 좋다. 며칠 전 관객 수 2백만을 돌파했다고 들었다. 굉장히 뜻깊은 영화라 기분이 더 좋다. 내가 연기한 ‘이석’이라는 캐릭터는 박열과 후미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 애쓰는 조선의 기자다. 주인공인 박열과 후미코처럼 이석 또한 실존했던 인물이고, 극 중에서는 관객들에게 박열이 가진 신념에 대한 메시지를 더 명확하게 정리해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실제 벌어진 사건이 배경인 영화이니,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더 많은 공부가 필요했겠다. 관객에게 메시지가 잘못 전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부담도 있었을 것 같고. 시대 배경을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를 여러 번 정독했다. 나도 사실 ‘박열’이라는 인물을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됐고, 또 그 시대의 수많은 위인 중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들이 더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살펴보니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 많더라. 내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그런 삶을 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가 잘되고 있어 좋기도 하고, <박열>은 여러모로 좋은 공부가 되어준 특별한 작품이다.

올해로 10년 차 배우가 됐다.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니 해마다 적어도 3,4작품씩은 꼬박 찍어왔더라. 음, 일을 쉬면 낙오될까 봐…(웃음) 필모그래피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 같다. 얼마큼 성공한 영화에 참여했고, 또 어떤 유명한 감독님과 함께했는지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 작품을 만들 때 스스로 얼마나 진심을 다해 임했는지 먼저 생각하는 편이다. 내 필모그래피에는 <명량>처럼 역대 최고 관객 수를 찍은 작품도 있고 <잉투기>나 <피에타>처럼 현장에서의 매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특별한 영화도 있다. 작품의 성패를 따지기 전에 작품에 대한 마음을 우선하는 게 필모그래피를 아름답게 그려가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진심에 대한 확신이 10년간 쌓아온 신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양한 작품과 캐릭터를 거쳐오면서 그런 신념이 더 견고해진 것 아닐까? 사실 시행착오도 많았다. ‘나는 열정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나를 선택해주지 않는 걸까?’ 하면서 괴로워하기도 했고. 10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테스트해온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배우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것 같고,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렇다면 크게 한 방 터지는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한 기대는 없나? 글쎄, 그건 내가 계획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분명 대박을 예감했는데 조용히 잊히는 작품도 있고, 또 의외의 성과를 거두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렇지만 운에 맡긴 채 될 대로 되라며 앉아 있으면 안 된다. 계속 열심히 달려야지. 수백억이 들어간 영화든 스태프 몇 명 없는 작은 독립영화든 배우는 똑같은 질량의 열정을 가지고 연기해야 한다. 아무리 색다른 캐릭터로 분하거나 화려한 연출과 편집을 거쳐도 결국 작품 안에서는 그 배우가 실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묻어나니까.

진심을 다해 작품에 빠져들려고 노력하는 만큼 일이 끝나고 자신을 다시 다잡는 일 또한 중요할 것 같다. 캐릭터에서 워낙 빨리 벗어나는 편이라 딱히 특별한 걸 하진 않는다. 작품이 없을 때도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게 배우의 일이다. 체력도 그렇지만 마음 상태도 항상 정돈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건 너무 피곤하다. 사람이 좀 늘어지고 흐트러질 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젠 나라는 사람이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늘 준비된 상태여야 마음이 편하다. 아직 일과 일상을 잘 분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다 좋고 재미있다.

준비된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에너지가 꽉 찬 상태일 수도 있고, 반대로 다른 캐릭터가 온전히 들어올 수 있도록 완전히 비워낸 상태일 수도 있고.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요즘은 의욕이 아주 충만한 상태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SNS 채널에서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쉴 때는 좀 그런 일도 하면서 지낼 수 있지 않나. 난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고 특별한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연기 말고 다른 경로로 나를 보여주는 게 약간 낯설게 느껴진다. 어떤 부분을 드러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특별한 게 없다니.

평소에 뭐 하고 지내길래? 집돌이다. 바빠서 미뤄둔 영화랑 드라마 몰아서 보기도 하고, 그러다 운동도 하고. 스포츠 경기 보는 것도 좋아한다. NBA랑 K리그를 챙겨봤다.

최근에는 어떤 화를 몰아서 봤나? <엘르> <겟 아웃> <옥자>. <박열>도 물론 봤지. 요즘 재미있다는 건 다 봤다.

일상이 단조롭다고 하는 걸 보니 일탈 같은 건 해본 적 없겠다. 지금 와서 일탈하기에는 내 나이가 조금…(웃음) 괜히 쓸데없는 짓 했다가는 나중에 이불킥만 하게 될 것 같은데?(웃음)

30대가 뭐 어때서. 적정선만 지킨다면 어떤 일탈이든 해볼 만하지 않나? 내 나이대는 가장 열심히 일에 몰두해야 하는 때 같다. 나뿐 아니라 또래 친구들을 보면 다 그렇게 지낸다. 직업과 상황은 달라도 사는 속도나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대개 비슷하다. 가정을 꾸린 친구도 있고, 한창 승진 욕심을 불태우는 친구도 있는데 모두 자신들이 속한 세계에 매진해 산다. 밤 10시가 넘도록 야근하고 또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면서 똑같은 매일을 지내는 내 친구처럼 나도 그렇게 산다. 그리고 그게 좋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조금 특이할 뿐이지 크게 보면 사는 건 또 별다른 것 없다. 앞으로도 일탈을 꾀하기보다는 주어진 삶에 더 집중하면서 지내려 한다. 다만 지금까지 쫓기듯 살아왔으니 이제는 좀 여유롭게 나 자신을 돌아보며 살고 싶다.

 

코트와 셔츠 모두 디올(Dior), 쇼츠 시스템 옴므(System Homme), 슈즈 펜디(Fe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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