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티>의 반응이 뜨거웠다. 작품을 시작하기 전과 끝난 지금, ‘강태욱’이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은 한결같은가? 아니면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나? 대본을 처음 읽을 때부터 지금까지 강태욱에 대한 내 생각은 한결같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늘 인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경험치가 달라지니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지지 않을까? 지금 강태욱을 만났기에 이만큼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강태욱은 불완전한 인물이다. 겉보기에는 3대째 부장판사를 지내온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자신이 가진 힘을 무섭게 이용할 줄도 알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불완전하다. 그런데도 이 인물이 매력적인건 그가 가진 순수한 사랑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강태욱이 저지른 일로 사랑하는 아내가 힘든 상황에 처한 거나 다름없다는 점이나 강태욱이라는 인물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민이 컸을 것 같다. 장면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연기로 설득하고 싶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저지른 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민을 했을 테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혜란이 힘든 일을 겪는 모습을 보며 자책도 많이 했을 것이고 충분히 슬프고 힘들었겠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태욱의 감정을 담으려 했다.
그렇게 깊이 빠져 있던 태욱은 잘 떠나보냈나? 물론. 나는 작품이 끝나면 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잘 빠져나오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물론이고 가족까지 힘들어진다. 인물에게서 빠져나오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취미가 큰 도움이 되긴 하는데,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 그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그때 같은 부서 팀장이 근무시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퇴근하면 온전히 쉬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새벽에 운동하고 다시 일하러 나오는 패턴을 유지했다. 집에 일을 끌고 가는 법이 없었다.
배우 입에서 ‘팀장’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새롭다.(웃음) 그때는 회사에서 대리가 되고 팀장이 되고 언젠가 마스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회생활의 경험이 배우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겠지. 물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연기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정, 해온 생각들이 연기에 묻어난다. 연기라는 게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니 다른 경험을 했다는 건 큰 자산이다.
취미가 지난 작품을 잘 떠나보내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연기하지 않는 시간에는 다양한 취미가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겠다. 호기심이 많다. 궁금한 게 있으면 꼭 해봐야 한다. 플라모델 조립이며 암벽등반, 도예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기지만 그 모든 것이 행복을 위한 장치다. 취미 덕분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 않는다. 늘 무언가를 하며 바쁘게 지내면 부정적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기분이 좋지 않을 일도 별로 없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생각을 잊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하거나 즐거운 일을 하며 잊는 거지. 사람마다 해결하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나는 오랜 시간 그렇게 다양한 취미로 나를 단련해온 것 같다. 자연스럽게 체득했달까.
여전히 해보지 못해 아쉬운 것이 있나? 아쉬운 건 없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계속 생길 것이다. 해보고 싶은 일에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늘 목표치를 정하는데 그 지점에 도달하면 다른 목표가 생기기도 하고 또 다른 일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래도 늘 이루며 살아왔다. 어릴 때는 농구를 하고 싶어 늦은 밤까지 했고, 요즘은 틈나는 대로 골프를 친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기술을 갈고닦는 장인을 좋아하는데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이 들수록 무언가에 도전하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새롭고 서툰 일에 도전하기를 주저하기도 하고. 서툰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가령 낯선 동네에 갔다고 치자. 그럼 불안하고 조심스럽고 뭔가 갑자기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면 점점 익숙해지고 새로운 동네에서 보내는 일상이 즐거워진다.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할지라도 반복하면 편해지는 거다. 도전도 마찬가지다. 해보고 싶은 일에 몰두해서 일정 궤도에 올려놓으면 더 잘 즐기게 된다. 더 자유롭게.
<미스티> 직후 예능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의외다. 4명이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지역으로 여행을 가는 내용이다. 새로운 도전이고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 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 배우로서 가진 이미지가 좋은데 기대를 깨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대장금> 다음 작품이 코미디물인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였다. <대장금>의 ‘민정호’라는 인물은 아주 멋진 사람이었다. 촬영하면서 ‘나도 이런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인물 덕분에 인기도 많이 얻었고 사랑도 많이 받았다. 그와 관련한 활동을 좀 더 많이 했다면 물질적으로 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웃음)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실제로 민정호 같은 사람으로 오해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팬미팅 때 이런 말도 했다. 민정호를 존경하고 좋아하며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고, 많이 반성하고 배웠노라고. 하지만 실제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내가 연기한 인물을 사랑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작품에 대한 반응의 온도와 상관없이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기라는 게 금세 변하지 않나. 이제 강태욱에 대한 사랑이 정해인에게 가지 않았나.(웃음) 여담인데, 정해인이라는 배우를 이전부터 좋아했다. 앞으로 더 좋은 배우가 될 것 같다. 난 늘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다. 한때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생각이라고 답했을 정도로.
상대방이 당황했겠다. 생각이라니. 그러더라.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어떻게 하면 빨리 잘될까, 어떻게 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까, 뭐 이런 고민. 플라모델을 한창 조립할 때는 심지어 오공 본드가 나을까, 순간접착제가 나을까, 뭐 이런 것까지. 젊을 때는 생각 끝에 몇 달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다. 분쟁 관련 뉴스를 보고 사람들은 왜 싸우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시작으로 결국 말에서 비롯되는 오해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싸우지 않으려면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는 그것만큼 세상 편한 게 없더라. 말을 하지 않으면 신기하게도 직감이 발달한다. 그 뒤로 판단이나 결정을 빨리 하게 된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오늘의 지진희는 행복한가? 행복해지기 위해 늘 뭔가를 한다. 그런데 문득 내가 늘 뭔가에 몰두하다 보면 주변 사람에게 소홀한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행복한데 내 가족이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가족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한다. 서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의 상황과 마음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면 늘 더 좋은 결말을 만나게 된다. 언젠가 아내와 이런 주제로 서른 시간 가까이 대화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날 아내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오늘도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하자.’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한다. 그런 좋은 기운이 담긴 말이 결국은 내게 되돌아오더라. 말로, 눈빛으로. 오늘의 나는 잘 살고 있다.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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