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증인> <야구소녀> <걸캅스>

배우 염혜란

BIFF 염혜란

출연한 영화 중 2편이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야구소녀>와 <비밀의 정원>이 초청됐다. <야구소녀>는 제목 그대로 야구를 하고 싶은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은데 야구를 하려고 애쓰는 주인공의 엄마가 내가 맡은 인물이다. 처음에는 전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체를 두고 봤을 때는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엄마는 딸의 길을 응원한다. <비밀의 정원>에서 맡은 인물은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다. 오래전 주인공을 성폭행한 범인이 잡히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작품 모두 영화 속 달라진 여성 캐릭터를 담아내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여성 캐릭터와 많이 다르다. 그렇다. <야구소녀>의 엄마는 결국 딸을 응원하는데, 그 엄마처럼 여성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해봐. 앞으로 더 힘들겠지만 힘을 내.’ 이런 응원. <비밀의 정원>은 이보다 첨예한 문제를 다룬다. 남편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결혼했는데, 그 일이 뒤늦게 밝혀지며 삶을 뒤흔들어놓는다. 내가 연기한 인물은 그 주인공의 상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위로한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아니라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올해 개봉한 <증인>에서 맡은 인물도 여성 배우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극에 반전을 주도하는 인물이며 피해자도 아니다. 작품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역할이 참 좋았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생기는 작품이었다. 온전히 착하기만 할 수 있는 영화인데, 내가 연기한 캐릭터가 예상 밖의 갈등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오랜 시간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다. 연극배우로 사는 건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연기할 수 있도록 힘을 얻은 원동력은 뭘까? 멀리 내다보지 못한 마음, 좁은 식견?(웃음). 나는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왔다. 이 일을 계속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당장의 작품을 열심히, 그리고 잘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내다봤더라면 못 했겠지. 당장 이 순간에 충실한 대책 없는 긍정.

왜 연극이었나? 처음 동아리에서 연기를 접하고 처음으로 내가 귀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 전에는 잘하는 게 별로 없었는데, 연극을 시작하고 주변에서 잘한다 해주니까 좋았다. 그런데 연극계에는 잘하는 사람이 참 많더라. 깨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웃음) 지금껏 확신에 차서 뭔가를 선택해본 적이 없다.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배우의 길이 아닌 출판사에 들어갔다. 책을 아주 좋아하거나 출판사에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어딘가에 취업해야 했다. 출판사에서 인턴 기간이 끝나고 상사가 그만뒀는데 회사에서 나더러 출판 아카데미에 다니며 일을 제대로 맡아보라는 거다. 그때는 정말이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됐다. 우선 출판사에 다닐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그 와중에 운명이었는지 동아리 후배들이 연극 연출을 맡아달라 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거다. 그렇게 궁지에 몰려 선택했다.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연기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연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첫 무대는 너무 떨려서 심장박동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긴장을 뚫고 희열이 느껴지더라. 내 안에 연기를 좋아하는 씨앗이 있었는데 내가 내 욕구를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배우의 삶이 시작된 곳이니 무대 경험이 여전히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없어지지 않는 근육 같은 느낌이다. 연기하는 데 내 기초체력이 된 무대 경험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전에는 영화와 드라마가 연극에 비해 예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와 영화를 경험해보니 그렇지 않더라.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가 처음 출연한 드라마인데,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 배우들까지 각자의 얘기가 모두 16부작인 것 같았다. 출연 분량과 상관없이 서사가 단단했다. 연기는 결국 근본적으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할 때마다 너무 힘들고, 이 긴장감으로 살다가는 수명이 단축될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럼에도 계속 연기를 하는 걸 보면 미친 것 같다.(웃음)

지금도 연기는 답을 내기 힘든 숙제 같은가? 얼마 전에 나문희 선생님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는데, 지난해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소감을 물었더니 연기에 자신감이 좀 생긴 것 같다고 답하셨다. 세상에. 과연 얼마큼 더 해야 자신감이 붙는 걸까? 그런데 위안이 되기도 했다. 선생님에 비해 경력이 턱없이 짧은 내가 떨리는 건 당연한 거라고. 글을 쓰는 사람이 제1 창작자라면 배우는 제2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작품을 보면 배우가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엉성한 구조 속에서도 그 구조를 단단하게 받치는 배우. 계속 정진하다 보면 제2 창작자로서 가지는 한계를 부수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과거의 염혜란이 가진 생각이 있다면 뭘까? 우선 달라진 점은 내가 과거에 비해 너무 쉽게 연기하는 것 같다는 거다. 그래서 늘 반성하고. 그때는 열정만으로 연기하는 대학생 같았다면 지금은 좀 더 유연해졌다. 그런데 진심에 대해 고민하는 건 여전하다. 얼마 전에 드라마를 준비하기 위해 레퍼런스 삼아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찾아 봤는데, 도대체 진짜를 어떻게 이겨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애써봐야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라고 느껴지는 그런 연기를 말이다.

지금껏 진심이 전해졌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차력사와 아코디언>이라는 연극이다. 연극에서 ‘써니’라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순진하고 순수한 캐릭터다. 남들이 보기엔 바보 같을 만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길>의 ‘젤소미나’와 닮았다. 그 작품을 하며 진심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했다. 써니의 진심에 대해.

작품 수만으로 따지면 필모그래피에서 영화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많은 작품의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그럴 때면 조바심이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냥 무사히 찍고 와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연극만 하던 사람이라 영상의 메커니즘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연기한 장면을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영화에 이렇게 많이 출연했는데 왜 나를 못 알아보지,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이 연극을 보러 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극장에 가는 사람 반만 왔으면, 대학로에 오는 사람의 10분의 1만 연극을 보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연극은 내게 태생 같은 존재다. 하지만 당분간 아이가 혼자 있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매체 연기만 하게 될 것 같다. 연극은 아이가 나를 찾을 시간쯤 되면 공연하러 나가야 하니까.

많은 인물을 연기해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보고 싶은 장르와 캐릭터가 있다면 무엇인가? 운 좋게 드라마와 영화에서 과분할 만큼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다. 앞으로 만나고 싶은 역은 단단한 성정을 가진 인물이다. 어떤 고민이든 들어줄 것 같은 따듯한 사람. 자존감을 찾아가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 난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어느 강력한 인물이나 극적인 사건으로 인한 드라마틱한 변화가 아니라 작은 변화를 겪으며 자신을 찾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나 역시 작고 소소한 것을 좋아하고.

배우로서 지향하는 모습이 있다면? 작품마다 되고 싶은 배우가 달라진다. 본질적으로는 진짜를 해내는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을 잘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배우의 얼굴에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눈 감지 않고 살고자 한다. 보통의 삶을 소홀히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가 혹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려고 한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그런 시선으로 살아야 잘 사는 삶 아닐까?

BIFF 염혜란
가죽 소재의 셔츠형 아우터, 캐주얼한 팬츠 모두 자라(ZARA), 안에 입은 니트 터틀넥 코스(COS), 이어링과 구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