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원피스 파스칼(Paskal).

티셔츠 위크엔드 막스마라(Weekend MaxMara), 데님 재킷 산드로(Sandro).
플라워 패턴 원피스 마르니(Marni), 샌들 레이첼 콕스(Rachel Cox), 양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에게 영상과 화보 촬영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아요. 사진 촬영을 하면 낯선 기분이 들어요. 평소 인물 사진뿐 아니라 어떤 사진이든 사진 보는 것 자체를 좋아해요. 화보는 큰 얼개가 정해져 있고 제가 따라가는 형태라 그런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어요. 큰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뭔가 열려 있어 현장에서 뭐가 만들어질지 몰라서 재미있죠.

사진 보는 것 말고 또 뭘 좋아하나요? 정적인 것. 보고 듣고 읽는 것이요. 요즘은 극장에 많이 가려고 해요. 얼마 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준비한 대만 영화 기획전에 가고 싶었지만 결국 열리지 못했어요. 기획전을 기다리며 어떤 영화가 있는지 살펴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없게 된 후 영화 DVD를 샀어요. 어제 본 영화는 <남색대문>인데 아, 정말 엄청 좋은 영화예요. 옛날 대만 영화를 보니 여행을 가고 싶더군요. 영화 속 캐릭터도 무척 매력적이에요. 전 그런 인물들에 마음이 많이 가요. 혼란스러운 시기를 애쓰면서 지나며 자기 안에 너무 다양한 것들이 있어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 르는 인물이요. <아침의 피아노>라는 책도 읽었어요. 친한 동료가 <화양 연화>의 ‘지수’에게 주고 싶다며 선물해줬는데,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투병하며 남긴 글을 모은 책이에요. 마음의 일기인 셈이죠. 제가 지금 뭔가 손에서 놓아야 할 시기를 보내다 보니 이 책에 더 마음이 가요.

놓아야 할 순간이란 건 지금이 지수를 보내는 시간이기 때문인가요? 지금 여전히 지수를 떠나보내는 중이에요. 늘 연기한 인물을 떠나보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느냐고 묻는다면 아직 출연한 작품이 많지 않아 확신을 가지고 답하기는 어려워요. 지금 당장은 지수를 잘 보내기 위해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지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건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들과 동료, 선배 배우들이에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죠. 그런데 이런 저 자신이 조금 웃겨요.(웃음) 주책맞은가 싶기도 하고. 왜 이렇게 유난스러운가 싶거든요. 스스로 ‘이제 좀 그만해라’ 이런 생각도 해요. 제가 유달리 연기한 인물을 좋아하나 봐요.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기하는 것 같아요.

지수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자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인물이에요. 과거의 시간을 연기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 있었을 듯해요. 처음엔 첫사랑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어요. 스무살이 되어 사랑에 빠졌고, 그 상대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은 사람이었죠. 그로 인해 쏟아지는 생각과 감정의 홍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지수의 변화가 멋졌어요. 지수를 연기하며 늘 사랑하는 마음을 잘 가지고 있으려고 했어요. 그 시대의 사랑도 좋았죠. 지금은 할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삐삐가 울리기를 기다리고 집 앞에서 눈이 쌓일 때까지 기다리고 연락이 끊기면 속절없이 혼자가 되고. 연기를 통해 이런 상황을 겪어보고 싶었거든요. 이런 순간을 하나하나 기대하며 준비했어요.

1990년대는 그리 오래전이 아니지만 감성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시대인 것 같아요. 저는 90년대 문화를 좋아해요. 드라마에도 이런 요소가 많이 등장해요. <화양연화>를 만나기 전에도 언젠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연기하고 싶었어요. 제가 나오는 예고편에 빛과 소금의 노래가 깔리는 게 무척 신기했어요. 마치 특권처럼 느껴졌죠. 드라마에서 그 시대의 음악과 함께 살아갈 수 있어 좋았어요.

오늘 문득 떠오르는 그 시대의 한 장면이 있나요? 비 오는 날 극장 앞에 서 있는 장면.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는 장면도 이번 드라마를 하며 처음 연기해봤어요. 연기해보고 싶었던 장면이라 더 기억에 많이 남아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키스하는 신이나 책이 쏟아지는 걸 막아주는 장면처럼 클래식하고 클리셰가 되어주는 장면들도 떠올라요. 새로운 것을 해보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 들었고, 해보고 싶었던 연기이기도 했어요.

지수를 비롯한 인물 중에 전소니와 가장 닮은 구석이 많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저는 어떤 인물에 마음을 뺏기는 이유가 항상 저와 다른 점 때문이에요. 제게 없는 점을 작품 속 인물에게서 발견하고 연기하는 동안 그런 척하는 게 재미있어요. 닮은 점이 꽤 있더라도 다른 점을 많이 보게 돼요. 그 점이 연기하는 즐거움이기도 하고. 내게 없는 점을 감정과 행동으로 표현하면 내가 잘 연기해내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어요. 그 때문인지 작품이 끝나면 공허해요. 내 것인 줄 알고 지낸 것들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은 처음 예상한 대로인가요? 의외의 지점을 발견할 것 같기도 해요. 이제야 이 일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조금씩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바뀌고 있어요. 전에는 그저 즐거움과 행복감으로 연기했는데, 지금은 마냥 그렇지만은 않아요. 과거에는 연기만 생각했지 이 직업이 어떤 건지 잘 몰랐어요.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고, 그 시간이 조금 두렵기도 해요. 이 일을 보다 건강하게 해나가는 방식을 알아가고 싶어요. 아직 그 답을 잘 모르지만, 생각과 마음이 많이 다치지 않고 잘해내려고요. 어쩌면 저라는 사람이 단단하지 못해서 지레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죠. 적당히 단단하고 적당히 유연하게 계속 배우로 잘 서 있길 바라요. 어려운 일이겠지만.

오늘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를 봤어요. 이 작품에서 연기한 ‘효연’은 지수와 완전히 다른 인물이자 청춘의 시간을 무모하게 보내는 인물이더군요. 그 작품을 할 때 처음으로 어떤 공포를 느꼈어요. 작품 속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데,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인물을 이해하면 안 되겠다 싶었죠. 영화는 분명 허구지만 이를 통해 살인 등의 범죄를 낯설지 않게 받아 들이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현실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에 작품을 위해 현실감 없이 쉽게 다가가선 안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죠.

배우는 특정 인물을 연기하는 일이지만 그 인물이 되는 순간 속하는 세상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지겠어요. 맞아요. <밤의 문이 열린다>를 할 때는 특히나 공감하려고 하다 보니 부정적이고 힘겨운 방식으로 이 도시를 바라보게 됐어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기회가 작품을 하며 얻는 일종의 보너스 같기도 해요.

전소니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가 독립영화예요. 배우로서도 소중하지만 관객으로서는 더 소중해요. 영화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더 다양한 영화가 존재하기를 바라요. 작은 영화들은 보고 싶으면 애써 찾아가야 하잖아요. 볼거리 많고 규모가 큰 영화도 좋지만 제한이 많은 환경에서 꼬물꼬물 만든 영화를 보는 재미는 또 달라요. 제게 매우 소중한 존재죠.

차기작이 정해졌어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죠. 중국에서 개봉했을 때 뜨거운 인기를 얻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평이 매우 좋았어요. 요즘 가장 큰 관심사가 <소울메이트>예요. 원작 개봉 당시에도 너무너무 좋았어요. 굉장히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작품이자 어떻게 보면 마이너 감성의 영화지만 그 화법은 충분히 대중적이에요. 다수의 얕은 공감보다 소수의 깊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영화랄까? 서사는 감정적으로 깊게 남는 한편 연출은 매우 유려해요.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는 점도 좋아요. 무엇보다 두 배우가 연기를 아주 잘해요. 한 장면 한 장면 지나갈 때마다 당장 돌려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엄청 울고 가슴을 부여잡고 집에 돌아왔어요. 혼란스러운 나이에 둘이 주고받는 섬세한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거든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예요. 아마 배우로서도 쉽지 않은 작품이 되겠죠. 그만큼 욕심도 나요. 원작을 사랑하는 만큼 잘해내고 싶어요. 그래서 한국의 좋은 여성 영화로 남기를 바라요. 아, 그래도 너무 앞서 나가 욕심부리지 않으려고요. 욕심에 잡아먹히면 안 되니까.

수많은 고민과 질문, 대답이 오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태풍의 눈에 들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