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원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엄지원
재킷과 팬츠 모두 로드앤테일러(Lord and Tailor), 블랙 톱 언더아머(Under Armour), 이어링 트렌카디즘(TRENCADISM).

“흥미로운 여자의 이야기가
좋은 선례로 남는다면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엄지원
재킷과 팬츠, 이어링 모두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독전
# 나에게 배우란 삶을 이해하는 일

영화 <독전>의 짤막한 대사를 선택했다. ‘너는 행복했던 적 있냐’를 원작의 느낌과 달리 친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묻는 것처럼 말하고 싶었다. 그냥 가까운 사람에게 넌 어떤지 묻는 정도로.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행복했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게끔 하고자 했다.

<산후조리원>의 ‘오현진’은 지난해 인상 깊었던 여성 캐릭터 중 한 명이다. 배우로 살면서 요즘 가장 큰 화두는 장르적으로 재미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거다.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사실 산후조리원은 아이를 낳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녀오는 곳 아닌가? 이제야 드라마의 주된 배경이 되었다는 게 의아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드라마에는 아주 많은 여자들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각각 다르고 살아 있어 좋았다. 등장인물 모두 주변에 있을 법하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이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각자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산후조리원> 속 인물들은 드라마틱하기보다는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인물이면서 저마다 입체적이고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여자들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뤄지는 건 좋은 일이다.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의 ‘지선’도 엄지원이 연기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영화라는 산업의 주요 메이커가 남성이다 보니 소소한 삶의 이야기보다 남성 위주의 서사가 많았다. 하지만 여성의 이야기도 충분히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남성 중심의 영화가 많다는 것이 불만이 아니라 여성 중심의 영화가 많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내가 배우로 사는 동안 좀 더 나아지면 좋겠다. 그리고 흥미로운 여자의 이야기가 좋은 선례로 남는다면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서사의 중심이 여자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다는 걸 체감하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20대 후반이 되면 젊었을 때와 다른 챕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대가 되었더니 30대 여자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있었다. 그리고 40대가 되니 여전히 그런 작품이 존재한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는 시간 속에 나도 존재하는 것 같다. 내 재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창구들이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랄까. 열심히 해도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 세상도 있었지만 이제는 열심히 하면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배우는 결국 연출자의 디렉션과 작가의 글에 맞춰 연기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이 자신이 추구하는 캐릭터 상과 차이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하나? 자아와 캐릭터가 충돌하는 경우는 분명 있다. 어릴 때는 그 점이 굉장히 힘들었다. 연기하는 인물에게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적도 있고, 연기하는 인물에 깊이 빠져들었는데 그가 처한 상황이 너무 싫을 때도 있었다. 때론 그 인물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나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하면 그 행동이 싫었다. 그런 식으로 나와 캐릭터가 충돌할 때는 힘들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유연해졌고, 그렇게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작품은 잘 선택하지 않는 편이다.

엄지원을 떠올리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들이 떠오른다. 때론 작품에서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어서 힘들 때도 있다. 반응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액션을 하는 사람이길 원하는데 기대만큼 그려지지 않을 때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노력한다. 작품 안에서 최대한 반응하는 인물을 만들어가고 싶다.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있다. 사실 이렇게 오래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금은 계속 나이가 들어서 윤여정 선생님처럼 오랫동안 연기하고 싶다. 처음 배우가 되었을 때는 몇 년 해보고 말 줄 알았다. 어떤 배우가 되어 성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도 없었다. 편하게 시작했지만 좀 더 잘하고 싶고, 그러다가 또 좀 더 잘하고 싶고. 그렇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이어지고 그게 재미있고, 그렇게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지치는 순간이 있지 않나? 지치는 순간이 오는 타이밍이 매번 다르다. 어떤 작품을 시작할 때면 설레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육체적으로 힘들 때도 있고, 인간 엄지원과 배우 엄지원을 조율하는 게 힘들 때도 있다. 작품을 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감당해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치는 순간이 올 때가 매번 다르지만 모든 순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작품이 흥행하지 않더라도 다음 작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힘든 시간이 있더라도 좋은 시간이 찾아올 거라는 것. 모든 순간이 배우로 살아가는 과정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편하게 일하려고 한다.

작품을 통해 만난 여자 중 오늘 문득 안부가 궁금한 사람을 말해줄 수 있나? 영화 <똥개>의 ‘정애’. 정애만큼 감정적인 인물은 거의 연기해보지 못한 것 같다. 그 나이였기에 할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그 시절 철없고 왈가닥 같은 내 안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앞으로 만나고 싶은 여자가 있다면 누구인가? <와이 우먼 킬>에서 루시 리우가 연기한 ‘시몬’. 드라마 내용 자체는 한마디로 막장이다. 남편은 동성애자이며 이웃집 친구 아들과 연애하는 시몬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때론 굉장히 성숙하고 현명하게 행동한다. 시몬의 그런 점을 균형 잡히게 연기한 루시 리우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우리나라 배우가 이런 연기를 한다면 어떨지 상상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많이 했고 <방법>처럼 새로운 장르도 연기했지만 요즘은 코믹한 작품에 눈길이 간다. <산후조리원>도 그중 하나였고. <박수건달>이나 <불량 남녀>처럼 밝은 작품을 다시 만나고 싶다. 더불어 루시 리우처럼 백발이 되어도 매력적인 모습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레 점점 나이든 여성을 만나 연기할 것이다. 하얀 머리여도 매력적인 모습으로 계속 연기하는 배우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고민시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고민시

 

“등장하는 인물들을
성별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남성이어도 약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용기가 부족할 수 있다.

여성도 마찬가지로
용기가 부족한 사람도 있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고민시
수트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셔츠 레하(Leha).

#남산의 부장들
#나에게 배우란 운명

이전의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기획 기사를 본 적이 있나? 김다미 배우가 참여한 젠더프리 기획을 봤다. 그때 본 영상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다른 해에 했던 젠더프리 기획도 찾아봤다. 나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올해 이를 제안받고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실재하는 사건이고 남자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남산의 부장들> 속 대사를 선택했다. 이 당시 사건을 다룬 영화를 좋아한다. <남산의 부장들> 뿐만 아니라 <그때 그사람들>을 엄청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각하, 대국적으로 생각하십시오’라는 대사는 당시 역사 속 인물이 실제 한 말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한석규 선배와 이병헌 선배가 너무 멋있게 연기했지만 이 대사를 여자 배우가 하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했다. 대사가 지닌 날카로움도 좋아서 도전하고 싶었다. 대사도 색이 강해서 여러 버전으로 준비했고, 어느 단어에 강세를 주어 대통령에게 그동안 쌓인 실망감과 그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부분을 잘 드러나게 하려고 했다. 이 문장이 지닌 특유의 뉘앙스도 임팩트 있게 표현하고 싶었는데 막상 카메라 앞에 서니 무척 어려웠다.(웃음) 또 ‘각하’라는 단어가 내 또래에게는 굉장히 생소하지 않나. 일부러 남자 배우가 할 법한 역할을 선택했다.

보다 다양한 역할에 대한 갈증이 있었나? 최근에는 하고 싶은 역할을 많이 만날 수 있지만 이전에는 내 이미지와 내가 연기하고 싶은 인물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 점이 늘 안타까웠다. 나는 강하고 검사나 판사처럼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인물을 만나고 싶었다. 그나마 요즘에는 조금씩 여자 배우들의 영역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더 킹>의 김소진 선배님이 연기한 역할도 예전 같으면 남자 배우에게 주어졌을 법한 역할인 것 같다. <독전>의 진서연 선배님 연기도 참 좋았다. 처음 연기를 시작하고 내 외모가 주는 느낌 때문에 한계에 부딪혔고 내 나이가 지닌 한계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많은 선배 배우들이 작품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존재하는 것을 보고 나 역시 그런 역할을 해내고 싶은 바람을 가졌다.

배우는 사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오히려 선택받아야 하는 순간이 더 많다. 제4회 SNS 3분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평행소설>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 출연까지 맡은 건 선택받는 데서 오는 한계를 깨고 싶었기 때문인가? 나는 연기하고 싶고 작품을 통해 나를 드러내고 싶었지만 당시 본 오디션에서 모두 떨어졌다. 그때쯤 에세이를 비롯해 글 쓰는 걸 엄청 좋아했다. 마침 나를 떠올리며 쓴 글이 있어서 막연히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 컸다. 당시 짧은 기간 동안 웹 드라마를 촬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난 동료들 5명이서 함께 만들었다. 배우까지 총 7명.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새로운 작품을 제작할 수 있어 기뻤다. 마치 새로운 세상에 한 발짝 들어간 것만 같았다.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인물이 완성될까? 영화 <캐롤>에 나오는 여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가 참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퀴어 장르를 잘 보지 못했다. 왠지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케이트 블란쳇이 <캐롤>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 작품이 궁금해져 찾아봤다. 동성 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가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니.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그 영화로 사라졌다. 언젠가 배우로서 계속 성장하고 40대, 50대가 되어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닿지 않는 이슈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 그리고 원작이 있는 작품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작된 작품, 사람들의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스위트홈>의 ‘은유’도 바라왔던 인물과 많이 닮아 있는가? 예전에는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가 좀 더 한정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2018년 이후 보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이 등장해왔다.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능동적으로 해내고 편견과 맞서 싸우며 나아가고 남성과도 동등하게 대립하는 인물들. <스위트홈> 공개 이후 여러 인터뷰를 하면서 받은 질문 중 하나가 ‘남성 캐릭터가 유독 답답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는데, <스위트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성별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남성이어도 약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용기가 부족할 수 있다. 여성도 마찬가지로 용기가 부족한 사람도 있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내가 연기한 은유는 세상을 가장 편견 없이 바라본 인물이자 상대가 누구든 ‘팩트 폭력’을 날릴 수 있는 여고생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성인이 아닌 미성년자의 편견 없는 시선이 흥미로웠다.

서사 하나 없이 누군가의 엄마나 딸로서 작품에 존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역할이 불필요하거나 나쁘다고 할 수도 없으며 배우로서 그런 인물을 만나 연기하게 될 수도 있다. 작품을 위해 때론 필요하다.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면 물론 아쉬운 부분은 있을 것이다. 내 이미지만 소모되고 마는 역할. 하지만 그 안에서 최대한 연출자와 소통하며 좀 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대사가 많이 없더라도 그 인물의 색을 가능한 한 많이 드러내고자 애써야겠지. 모든 기회는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경험이 한 꺼풀 한 꺼풀 내게 입혀져 다른 새로운 것을 창조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런 엄마 역할을 하게 된다면 내 안에 잘 담아뒀다가 언젠가 다른 작품에서 좀 더 다른 엄마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신록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김신록
리본 넥타이 셔츠와 블랙 벨벳 베스트 모두 잉크(EENK), 골드 이어링 앵브록스(Engbrox), 골드 이어 커프 헤이(Hay).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내 삶이나 이해, 욕망 등
어떤 것이어도 좋으니 나와 깊게 연루되어
실제 당사자가 되어 연기하는 힘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김신록
화이트 재킷, 와이드 팬츠 모두 렉토(Recto), 스니커즈 코스(COS),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올드보이
#나에게 배우란 직업

대사만 보면 남자가 말하는 게 분명한 문장을 선택했다. 그동안의 젠더프리 영상을 아주 재미있게 봤다. 아는 배우들이 나오는 걸 보고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지인들에게 어떤 영화를 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어 <올드보이>를 선택하게 됐다. 대사 자체는 사실 남자여야 이야기가 성립된다. 여자인 내가 이 대사를 연기할 때 혼란이나 의문이 생길 거라고 짐작했다. 대사에 ‘임신시켰다’는 말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남자 배우가 연기한 역할의 대사 중 여자 배우가 할 수 있는 대사를 넘어 지금 말하는 인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궁금하게 하고 퀴어적인 상상으로도 발전할 수 있겠다 싶어 선택했다.

연극 <비평가>에서도 남자를 연기했다. 초연에서는 남자라고 가정하고 연기했고 재연 때는 내 본래 성이라고 생각했다. 성별과 상관없이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성별을 넘어 연기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크게 없었다. <마리끌레르>의 젠더프리 기획이 올해로 벌써 4년째 아닌가. 이 기획도 4년 전과 의미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 성별이 전복된 역할을 맡았을 때 새로운 문을 열어 젖힌 것 같은 흥분감이 있었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미투 운동 이후 연극계에 일어난 변화를 체감하는지 궁금하다. 미투 운동 이전과 이후가 굉장히 다르다. 우선 여성 작업자들이 매우 많아졌다. 여성 작업자들이 여성을 중심에 놓고 작업하고 극작가들도 여성 중심의 서사를 쓰기 위해 노력한다. 작품의 선정부터 구현, 해석까지 변화가 뚜렷하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여성의 성 역할을 해석해내는 과정에서도 젠더 감수성을 잃지 않으려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예전에는 강간 장면이나 폭력 장면도 무대에 몰랐지만, 지금은 그 장면이 꼭 필요한지 질문하게 된다.

과거 그런 장면이 무대에 올랐을 때 변화시켜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나? 이 장면을 빼야겠다고 분명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불편감을 느끼는 정도였다. 그때는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 뿐 의식화되지 않은 채 한쪽에 머물러 있었던 거다. 미투 운동으로 마치 개안하듯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였네’ 하고 알아차리게 된 것 같다. 위축되고 불편했던 것의 원인과 결과를 한꺼번에 깨닫게 된 거다.

처음 젠더프리 기획을 시작했을 때는 한국 영화가 유독 남성 캐릭터 중심이라는 데 대한 아쉬움이 컸다. 보다 많은 여성 배우가 작품에 등장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하지만 이제는 보다 많은 여자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우리는 역사에 드러난 남자들의 이야기에만 익숙하지, 그 시대를 함께 씩씩하게 살아간 여자들의 이야기는 잘 모르지 않나. 이미 존재하는 사이사이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 좋은 관점이다. 이 얘기 꼭 넣어주기 바란다. 우린 대화하는 거니까 꼭 내 말만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나.

드라마 <괴물>에서는 강력계 형사를 연기한다. 매체에서 그리는 전문직 여성들에게는 유사한 이미지가 있다. 적당히 도도하고 지적이며 약간 섹시하고 분노할 줄 알지만 절대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남자들은 검사를 연기하더라도 개차반 검사, 더러운 검사, 성격 나쁜 검사처럼 다양한데 여자는 비중 있는 인물이어도 다양하지 않다. 그런데 나 역시 촬영 현장에서 옷차림새와 얼굴을 단장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우리가 보다 자유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이 특정 이미지를 더 선호한다고 여겼지만 나 역시 그 흐름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길을 헤매는 중이다. 집에서는 연기를 좀 더 와일드하게 해보지만 촬영 현장에 가면 차분하게 하는 게 답인가 싶을 때도 있다. 카메라의 문법을 지키며 인물을 거칠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조율이 필요한데 내가 인물을 해석하는 방식이 잘못된 건지 아직은 판단이 잘 안 된다. 나는 그럴듯하게 하는 게 너무 싫다. 진짜로 연기하고 싶다. 카메라 문법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재미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매체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사실은 아예 관심이 없었다. 20대 때 잠깐 해봤지만 별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에는 연기를 전혀 모르는 상태였던 것 같다. 연기에 대해 탐구하고 훈련하기를 좋아해서 연기 자체에 탐닉하던 시간이었다. 연기에 대해 공부와 훈련을 많이 하고 그걸 적용할 수 있는 무대 연기에 관심이 많았다. 무대에서 실험하고 성취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드라마 <방법>의 무당 역할을 제안받았다. 나는 기회가 생기면 이 일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한번 해본다. 무대에서 연기한 방법을 TV 연기에 녹여내며 실험해보는 재미도 있고 현장이 주는 재미도 있다. 그래서 더 알아가고 싶다. 동시에 연극에 대한 생각도 다시 정비해야 할 것 같다. 아직 잘 모르겠다.

오늘의 주제는 ‘모르겠다’이다.(웃음) ‘unknown’이라는 제목으로 워크숍을 기획한 적이 있다. 어느 분야든 오래 일하다 보면 모르는 곳으로 향하기가 쉽지 않다. 몰라야 계속 흥미롭고 더 나아갈 수 있는 데도 말이다. 그렇게 다시 모르는 세계로 간다는 점이 좋았다. 사실 요새는 연극도 잘 모르겠다(웃음). 그래서 괴롭지만 한편으로는 좋다.

앞으로 작품을 통해 어떤 인물을 만나고 싶은가? 요철이 많은 인물. 역할이 다변화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이 가져야 하는 깨끗함, 깔끔함, 예쁨, 적당한 도도함. 그런 것 말고 낙차가 크고 굴곡이 많게끔 설계된 인물을 만나고 싶다.

김신록이 만들어내는 인물은 이것만큼은 남기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뭔가? 연극은 아무리 작은 인물이어도 그 인물의 정당함과 당위성이 잘 드러나도록 설계한다. 반면에 드라마는 큰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인물을 연기할 때 당사자로서 힘을 갖지 못하다 보니 캐릭터를 풀어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 어떻게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내가 하는 말에 당사자로 개입해서 연기해야 인물에게 당위성이 부여된다. 앞으로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내 삶이나 이해, 욕망 등 어떤 것이어도 좋으니 나와 깊게 연루되어 실제 당사자가 되어 연기하는 힘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박주현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박주현
오버사이즈 실크 셔츠 샵 아모멘토(Shop Amomento).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작품에 존재하는 이유를 잘 짚어내고
그 장면에서 내 몫을 잘해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가고 싶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박주현
레이스 원피스, 플레어 팬츠 모두 문초이(Moon Choi), 커다란 골드 싱글 이어링 브릴피스(Brillpiece), 초록색 원석을 세팅한 링 페르테(Xte).

#내부자들
#나에게 배우란 평생의 숙제

영화 <내부자들> 속 ‘안상구’의 대사를 연기했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기획을 찾아봤다. 남자 선배 배우들이 했던 멋있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터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내부자들>은 재미있게 본 영화이기도 하고 안상구라는 캐릭터가 워낙 독보적이어서 더 재미있어 보였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 있나? 아주 많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왕의 남자>의 ‘공길’.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히어로도 도전해보고 싶다.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물은 걸 크러시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아이언맨>만 보더라도 위트 있고 관계 친화적이며 유연하다. 그렇게 잘 놀 줄 아는 영웅물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여자가 연기하는 영웅은 어느 정도 틀이 있다. 남자만큼 힘을 가졌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강해 보이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인 것 같다. 해보고 싶은 연기가 아주 많다. 영화 <마더>의 아들 ‘도준’ 같은 역할도 궁금하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도준처럼 나이답지 않게 어수룩한 여자 캐릭터가 잘 없지 않나. 도준 같은 딸도 연기해보고 싶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인간수업>의 ‘규리’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이기도 하다. 화끈한 인물이다. 비슷한 장르의 다른 작품은 보통 남자 캐릭터가 극을 이끌고 가는 반면 규리는 ‘지수’(김동희)를 끌고 가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이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색을 있는 그대로 칠하고, 리드하는 여자를 원한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중국 드라마 <겨우, 서른>을 재미있게 봤다. 세 여자가 주인공인데 이 드라마를 추천해준 사람이 남자다. 일과 결혼, 육아와 연애 등의 이야기가 세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여자들의 이야기도 이렇게 충분히 재미있게 그릴 수 있다. 언젠가 섬세한 심리를 다루는 작품에도 참여하고 싶다.

3월 3일 방영을 앞둔 드라마 <마우스>에서는 어떤 인물을 연기하나? ‘오봉이’라는 인물을 연기한다. 봉이 역시 끌려다니는 성격이 아니다. 초반에는 고등학생으로 나와 학생이라는 신분에 따르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활약하게 된다. 약자로 살아오며 여러 부당한 일을 겪지만 맞서 싸우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깨고 싶어 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려는 인물이다.

인물을 해석하는 데 감독과 의견 차이가 있을 때는 어떻게 조율하는가? 감독과 작가는 모든 인물의 전체적인 조화와 흐름을 곡선 그래프로 보는 역할을 한다. 나는 그 곡선에서 봉이의 부분을 디테일하게 잡는 역할인 셈이다. 그 곡선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나의 디테일한 선을 위해 대화를 많이 한다. 납득되지 않을 때는 내가 납득할 때까지 감독님과 대화를 나눈다. 지금까지 만난 감독님 모두 여러 시선을 수용하는 데 열려 있는 분들이었다. 그렇다고 내 캐릭터에 지나치게 심취해 있어도 안 된다. 촬영 현장은 언제라도 어떤 변수든 생길 수 있는 곳이고, 내가 맡은 캐릭터만 보다 보면 곡선을 벗어나버릴 수도 있다. 감독님이 큰 그림을 보다 놓치는 디테일한 지점이 있으면 그걸 챙기는 건 배우의 몫이다.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잘해낸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조율해가는 과정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점은 무엇인가? 나는 유연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더라도 합의점을 잘 찾아낸다.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서적인 부분에는 욕심을 많이 내는 편이다. 내가 감정을 쌓아가며 다른 인물들과 유대감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내 감정이 대본과 미세하게 다르게 반응할 때가 있다. 가령 둘이서 행복하게 밥을 먹는 장면이지만 눈물이 날 수도 있고, 슬픈 얘기를 하다 웃을 수도 있다. 이런 감정의 흐름에 이견이 생기면 대본에 적힌 대로 한 번 연기하고, 내가 생각하는 흐름대로 한 번 더 해본다.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나올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감독님이 대부분 수긍한다.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작품에 존재하는 이유를 잘 짚어내고 그 장면에서 내 몫을 잘해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가고 싶다.

연기를 공부할 때 가졌던 이상과 실제 현장에서 느낀 현실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나? 어려운 일이다. 촬영에 들어가면 잠도 제대로 못 자지만 행복하고 감사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면 오히려 금방 이 일에 질렸을지도 모르지만, 연기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계속 일어난다. 질릴 새가 없다. 그리고 연기와 더불어 내 마음도 계속 성장한다. 현장에서 연기를 배워가는 건 철학 공부 같기도 하고 사람 공부 같기도 하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이상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런 나 자신을 경계하기도 한다.

한 작품을 마칠 때마다 배우는 부분이 달랐을 것 같다. 늘 다른 걸 배웠다. 첫 작품인 <인간수업> 때는 촬영의 메커니즘에 입문한 느낌이었다. <좀비탐정>은 에너지를 굉장히 많이 쓰는 인물을 연기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에너지를 마음껏 쏟아냈다. 그런데 그렇게 막 썼더니 컨디션이 떨어질 때도 있고 체력이 달려 피부가 심하게 트러블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때 에너지를 배분해서 촬영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마우스>는 아직 3분의 1 정도밖에 촬영하지 않았지만 매우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봉이’는 할머니와 둘이 사는 아이인데 이상하게 할머니만 애틋하고 절절하다. 봉이와 할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나와 내 할머니의 마음으로 연결된다. 지금껏 작품 속 캐릭터에 현실의 내가 동화된 적이 없는데 이번 드라마를 찍는 동안에는 동화되었다.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앞으로 어떤 인물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기보다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을 하고 싶다. 나는 시나리오를 볼 때마다 작가님이 다루는 소재나 메시지를 보면 놀랍다. 내가 미처 해보지 못한 사고를 글로 구현한 대본을 읽는 일이 즐겁다. 작가님의 글이나 감독님의 의도를 잘 전달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김향기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김향기
시폰 넥 드레스 와이씨에이치(YCH).

 

“4년째 참여하다 보니
같이 크는 느낌도 든다.

4년 전보다 드라마나 영화 속
여성의 이야기가 많아졌고,
나도 그런 작품을 했고.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좋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김향기
재킷과 스커트 모두 미우미우(MiuMiu).

#먼 훗날 우리
#나에게 배우란 호흡

벌써 4년째 젠더프리 기획에 함께한다. 세상에! 열아홉 살에 <베테랑> 대사를 한 게 처음이었다. 이제는 긴장하지 않을 법도 한데 오늘도 연기할 때 떨렸다. 4년째 참여하다 보니 같이 크는 느낌도 든다. 4년 전보다 드라마나 영화 속 여성의 이야기가 많아졌고, 나도 그런 작품을 했고.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좋다.

오늘은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 보고 싶어서 찾아본 영화다. 영화 자체도 좋은데 그 장면의 대사가 참 좋았기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고 직접 연기해 보고 싶었다. 영화에서는 연인 관계에서의 감정이 담겨 있지만 대사 자체로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대사가 슬프지만 자신이 슬프다기보다는 이 말을 하는 게 슬픈 것 같다. 내 감정은 슬픈 것과는 다른 감정이다. 오히려 이 말을 하는 나의 감정은 튼튼해지는 느낌이다. 대사를 할 때 눈물이 났지만 딱히 흐르는 눈물을 닦고 싶지 않은 감정. 성장한 사람이 위로하면서 동시에 위로받는 느낌도 좋았다.

김향기에게 성장은 무엇인가?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배우 김향기의 성장은 새로운 역할을 연기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에 의미가 있다. 배우 김향기의 성장은 그렇게 다양한 연기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맞이할 때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보다 도전하는 마음으로 현재에 충실한 것이다.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성장하지 않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장이다.

요즘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싶은가? 특별한 건 없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게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때론 나에 대한 것들을 적어보기도 한다. 문득 감정이 묶여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나.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찜찜하고 답답하고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어디론가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 그런 감정들을 애써 잊으려 하지 않고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생각해야 한다. 감정이란 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본질 그대로 지켜보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솔직한 나 자신을 지켜보려고 한다.

영화 <아이>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보호종료아동과 싱글맘, 그리고 아이가 주인공이다. 셋의 관계성이 점점 자라나고 그 안에서의 감정들을 보여준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야기와 감정 묘사가 섬세하다고 느꼈다. 촬영기간은 짧았지만 현장에 있는 내내 행복했다. 무엇보다 감독님이 배우들을 늘 존중해주었고 싱글맘 ‘영채’를 연기한 (류)현경 선배와 함께해 더 좋았다. 그리고 내가 연기한 ‘아영’이 나와 많이 닮아서 더 흥미로웠다. 아영이를 둘러싼 환경은 나와 많이 다르지만 한 명의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보면 나와 닮은 점이 많다. 이런 느낌의 캐릭터를 경험한 것은 처음이다.

보호종료아동이라는 캐릭터의 배경은 어떻게 풀어 갔는가? 상황만으로 인물을 바라보면 갇히게 된다. <증인>에서도 이런 고민으로 힘들었고.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 아영이를 연기할 때도 ‘보호종료아동’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두고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더라. 그러다 내린 결론이 보호종료아동은 아영이를 이루는 여러 특성 중 하나이고 아영이라는 사람으로서 연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영이가 지닌 상처는 아무리 자신이 노력해도 메울 수 없는 공백이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영화에서 표현될 수 있도록 했다. 아마도 아영이는 안정된 선택을 하며 자신의 삶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강박이 있었을 것이고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마음을 나누는 데 서툴었을 것이다. 내 연기에 아영이의 이런 고민이 잘 담기기를 바랐다.

영화 <증인>에 이어 선하고 약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여서 끌렸던 건 아니다. 작품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새로운 연기가 해보고 싶을 때도 있고, 영화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와 닿았을 때도 있으며, 장르적으로 감독님이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할 때도 있다. 그런데 작품이 다루는 주제나 이야기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것이 많았고 감사하게도 그런 이야기를 자극적이지 않게 사람 사는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도 난 사람 사는 이야기가 좋은 것 같다.

누군가를 보살피고 지키는 역할은 처음인 것 같다. 그렇다. 아영이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고자 한다. 영화를 보면 아영이가 아기 ‘혁’과 놀아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들이지만 그럴 때마다 아영이가 아주 행복해 보인다. 이 친구에게 혁이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대상이자 행복을 주고 싶은 대상이다. 그래서 지키려는 거다.

영화는 결국 사회적 약자들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약자들의 연대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는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에게 관심을 쏟기 어렵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한 편, 두 편 이어진다면 조금씩 전달되는 힘이 생길 것이다. 얼마 전에 영화 홍보를 위해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보호종료아동이라는 한 청취자가 이런 영화가 개봉해 참 좋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정말 감사했다. 내가 직접적으로 뭔가를 한 건 아니지만 영화의 존재 자체가 힘이 되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통해 새롭게 발견한 세상이 있다면? 누구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보통 아영이나 영채 같은 인물을 현실에서 보면 안쓰럽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잣대를 거두면 그들만의 세상과 가치관이 분명히 있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나와 다른 환경의 사람들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규영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박규영
잉크(Eenk),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다양한 인물 속에서
나와 통하는 지점을 발견할 때 재미있다.

성별을 떠나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난 인물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품에 늘 끌린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박규영
카디건과 톱 모두 펜디(Fendi).

#달콤한 인생
#나에게 배우란 성장통

영화 <달콤한 인생>의 독백 부분을 연기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계속 꾸는 일이 많지 않나. 우리 인생 자체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건조하게 내레이션처럼 읊는 대사여서 선택했다. 절대 가질 수 없는 행복한 꿈을 꾸었고 이룰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슬프기도 하고.

이전에 젠더프리 기획을 접한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선후배, 동료 배우들의 독백 영상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내용을 잘 몰랐는데, 모두 영화나 연극 속 남자 배우의 대사를 연기한 것을 알고 더 재미있게 느껴 졌다. 특히 지난해에 이주영 배우와 이설 배우가 연기한 영상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올해 젠더프리를 제안받아 더 좋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스위트홈>은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 다른 인터뷰에서 원작 속 ‘지수’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지수는 의존적이지 않은 인물이다. 나 역시 그런 점에서 지수와 닮았고. 도와줘, 나 못 하겠어, 너무 힘들어. 이런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다 해결할 수 있으니 내가 하겠다고 말하는 쪽이다. 모두 해결한 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거나. 지수 역시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해 돌파구를 찾아간다. 전투력도 있고. 날 때부터 강한 인물이 아니라 어떤 아픔들을 견딘 후에 단단한 껍데기가 생긴 인물이어서 연기해보고 싶었다. 나와 지수의 닮은 점들을 많이 찾으려고 했다. 내가 캐릭터 안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캐릭터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항상 어렵고 헷갈리지만 최대한 극중 인물이 내게 스미게끔 하기 위해 나와 인물 간의 비슷한 점을 짚어내려 한다.

지수는 그동안 연기해보고 싶었던 인물과 얼마나 닮았나? 닮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특정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다양한 인물 속에서 나와 통하는 지점을 발견할 때 재미있다. 성별을 떠나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난 인물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품에 늘 끌린다. 아주 다양한 캐릭터를 많이 연기하고 싶다.

연기를 왜 하는지 고민해본 적 있나? 하고 싶은 마음과 주변의 환경, 우연한 타이밍이 맞물려 연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 내가 연기하는 모습이 화면에 나오고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니까 부끄럽지 않고 싶다. 그래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이 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선배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나의 최선이 너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도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은 연기를 하며 ‘말도 안 되게’ 많은 고민을 가진 선배들을 보며 늘 반성한다. 나는 타고난 게 없으니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노력할수록 갈증도 더 커진다. 그리고 이 일이 무엇보다 재미있다. 글로 쓰인 인물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은 <악마판사>를 촬영 중이다. ‘윤수현’이라는 광역수사대 형사 역할이다. 아주 강하게 살아남은 에이스 형사를 연기한다.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캐릭터지만 지수와는 다르다. 지금까지 해온 인물과 또 다른 인물을 만났다.

요즘 유독 눈길이 가는 배우나 극 중 인물이 있다면? 배우 주동우. 주동우가 눈물을 흘리면 정말 미칠 것 같다. 화면 장악력이 놀랍다. 캐릭터로는 <블루 재스민>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재스민’. 부자였지만 모든 걸 잃고 한순간 나락으로 빠진 인물로 가진 게 없는 현재에도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에 가진 습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괴리감이 드러날 때 코믹하기도 하고 동시에 슬프다.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앞서 ‘배우는 ㅇㅇ이다’라고 정의하는 코멘터리 촬영을 했다. 성장통이라고 답한 이유가 무엇인가? 늘 성장통을 겪고 있다. 인간은 항상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멈추고 싶지 않다. 늘 성장통이 있기를 바란다. 스스로 만족하는 순간 다 끝나버릴 것 같다. 내가 도대체 뭔데 스스로에게 만족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계속 아프고 고민하며 성장하고 싶다. 타고난 재능이 없기에 계속 아파야 한다.

배우의 세계에 이제 막 들어온 20대 배우로서 요즘 드는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뭘 해야 나를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지금까지 늘 충실히 살아온 건 분명하지만 새로운 것을 위한 노력은 충분히 하지 않았다. 항상 하던 대로 열심히만 했던 것 같다.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 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나라는 배우를 사람들이 원하도록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나만이 가진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데 그게 무엇인지 아직 찾지 못했다.

배우는 나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안받는 역할도 달라질 테고. 아직은 걱정보다 기대가 크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전도연 선배님이 연기한 역할은 20대 배우들은 잘해낼 수 없을 것이다. 서른 이후에 다양한 역할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든다. 보낸 세월만큼 생각도 많이 하고 경험도 풍부해지면 나 자신을 쓸 수 있는 구석들이 많아질 테니까.

 

 

#백은혜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백은혜
톱과 언밸런스 이어링 모두 코스(COS).

 

“연극 <태일>은 이야기가 확실하고
이를 기반으로 캐릭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에 먼저 접근하는 방식으로 연기했다.

상황이나 캐릭터의 성격을
성별보다 우선했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백은혜
재킷 킨더살몬(Kindersalmon), 가죽 셔츠 르비에르(Lvir), 블랙 슬랙스 프론트로우(Front Row), 실버 이어링과 브레이슬릿 코스(COS), 화이트 스니커즈 컨버스(Converse).

#고도를 기다리며
#나에게 배우란 천천히 먹는 밥

<고도를 기다리며>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고도를 기다리는 거야’라는 문장을 하고 싶었다. 지금의 시대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모두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을 선택하려고 했다.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지금, 언젠가 ‘그 날’이 올 거라는 의미를 담으려고 했다. ‘고도’는 질문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도 하고.

태일과 태일 외 사람들로 구성되는 2인극 <태일>의 공연을 앞두고 있다. 연극 <태일>은 목소리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남자 배우가 태일을 연기하고 여자 배우가 태일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성별에 관계없이 연기한다.

우리는 성별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에 익숙하다. 은연 중에 여자와 남자가 지닌 뻔한 특징을 따라 하게 되지는 않나? 캐릭터에 성별에 따라 접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연극 <태일>은 이야기가 확실하고 이를 기반으로 캐릭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에 먼저 접근하는 방식으로 연기했다. 상황이나 캐릭터의 성격을 성별보다 우선했다. <태일>은 개인적으로 소중한 작품이다. 올해 2
년 만에 다시 하게 되었는데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지금 내가 있는 지점을 돌아보게 됐다. <태일>을 연기하지 않았던 2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이 작품을 처음 공연할 때는 작곡가가 직접 음향을 맡고 연출가가 조명을 맡고 배우들이 매일 극장을 쓸고 닦았다. 일손이 부족하면 다른 배우들이 도와주기도 했다. 객석도 매우 좁아 관객이 앉아 있으면 서로 어깨가 닿았다. 그 시간을 지나 이제는 제작사도 생기고 함께하는 배우도 많아졌다. 새삼스레 처음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며느라기>의 큰며느리도 연기했다. 세대를 막론하고 많은 며느리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우리 입장에서 ‘사이다’이긴 했지만 감독님은 사실 누가 정답이고 오답인지를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속 시원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이게 옳다고 생각할 수만도 없다. 말하는 뉘앙스로는 큰며느리의 모든 말을 앙칼지게 표현한 건 맞지만 실제로 가족에게 날을 세우고 말하기는 힘들다. 적정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주변 결혼한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드라마 잘 봤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짠했다.

어떤 인물을 만나면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의 작업을 볼 때.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케이트 블란쳇을 좋아해서 <블루 재스민> 같은 영화를 해보고 싶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게 <토르: 라그나로크> 같은 작품도 해보고 싶다. 샐리 호킨스도 무척 좋아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과 <내 사랑>에서는 그의 연기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특히 <내 사랑>을 본 당시는 매체 연기로 막 넘어왔을 때라 자유로운 연기에 더 목말라 있었다. 표정 연기로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카메라 프레임을 벗어나는 것처럼 촬영이 아닌 연기 자체만 생각하고 싶었다. 늘 많은 작품 속 여러 역할에 나를 대입해보곤 한다. <며느라기>에서도 ‘사린’을 내가 했으면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마음이 편안해져 가능한 일이다. 예전에는 조급한 마음이 컸고 어떤 작품과 역할을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언젠가 그런 작품을 만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연극에서는 비중이 큰 역할을 많이 맡았으니 배우로서 의견을 제시하기도 수월하지만 매체 경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디렉션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현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을 만큼 비중이 큰 역할이 아니니 아쉬움도 있을 테고. 그런 마음이 왜 없겠는가. 당연히 있다. 공연할 때는 감사하게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매체 연기를 시작하고 그럴 수 없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때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럽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나 혼자 끙끙 앓아야 했던 아픔에 가깝다. ‘나이가 들면 역할이 바뀌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하며 쿨하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경험하니까 현실은 달랐다. 그때 내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단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예를 들어 요즘 제안받는 역할은 대부분 아이가 있는 엄마다. 그런 제안이 계속 들어올 때는 나도 다른 연기를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아이 엄마 역할만 들어오지 싶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나씩 해나가고 싶다. 그러다 또 다른 기회가 온다면 그때 다른 걸 해보는 거지. 과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점점 줄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극에서는 분장을 하니까 실제 내 나이는 캐스팅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태일>에 이은 두 번째 목소리 프로젝트인 <섬>에서는 두 시대를 사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한 명은 소록도의 간호사 ‘마리안느’, 또 한 인물은 2019년을 살아가는 발달 장애 아이를 둔 엄마였다. 이 중 마리안느는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분장으로 점점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하지만 매체에서는 어느 한 이미지로 각인되면 사람들은 배우의 실제 모습을 그 이미지와 동일시한다. 그게 무서워서 내가 어딘가 걸려버린 것 같은 때도 있다. 거기서 어서 빨리 빠져나와야 다른 것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그 모든 건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이제는 매체 연기에 적응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시간이 지났고, 생각도 조금씩 변했으며 동시에 기회가 왔다. 누군가 사람들이 원하는 거 그리고 내가 잘하는 걸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가 올 거라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되어가고 있다. 주어진 상황에서 다양한 걸 해보자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선택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없어졌나? 요즘은 <조선구마사>에서 악마에 잠식되어 움직이는 인물을 연기한다. 이제는 선택이 두렵지 않다. 막연히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저 겸손하게 연기하고 싶다는 것과는 다른 마음가짐이다. 재미있게 잘해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즐기면서.

 

 

#최수영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최수영
셔츠 로샤스(Rochas), 브레이슬릿 골든듀(Golden Dew) 링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현실에서도 성별을 떠나 이 사람이 잘해서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며
차별과 역차별 없이 실력으로만
정당하게 평가받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GENDER FREE 여성 배우 최수영
베스트와 팬츠 모두 렉토(Recto), 브레이슬릿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스물
#나에게 배우란 자유

이전의 젠더프리 기획을 본 적 있는가? 지난해에 보고 진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해 제안받아 신기했다. 공연계에서는 젠더프리 캐스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 않나.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이뤄졌던 연극 <오펀스>도 인상 깊게 봤다. 극중 등장인물이 모두 남성이지만 여자 배우들도 함께 캐스팅되었다. 남자로 표현된 인물을 여자가 연기한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공연계에서는 이미 다양한 시도가 실현되고 있고, 이렇게 매거진을 통해 짤막한 영상을 만드는 것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영화 <스물>의 대사를 연기했다. 더불어 고민했던 영화가 <아수라>의 장례식 장면이었다. <아수라>는 여자 배우들에게 기회가 많지 않은 누아르 장르다. 악인들이 등장해 누가 과연 진짜 악인인지, 무엇이 진짜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영화를 끌고 가는데, 그중 문상 온 박성배가 육개장에 대해 말하는 장면은 아주 흔한 말 같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을 보여주는 장면이어서 해보고 싶었다. 곱씹을수록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비열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그렇게 비열하고 섬뜩한 악의 끝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내가 연기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반면에 <스물>은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고 가벼워서 재미있을 것 같았다.

지난 한 해 유독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았다. 그중 <런온>의 ‘단아’는 재벌 남자 캐릭터에게 주어진 클리셰가 전복된 느낌마저 들었다. 단아를 연기하며 참 좋았고 짜릿했다. 무엇보다 열심
히 일하는 인물이어서 더 마음이 갔다. 하지만 이 시대의 여성상이라는 틀에 맞춰 한정적인 인물만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여성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가치관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런 주인공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시대가 원하는 여성상에 맞춰 서사를 무너뜨리는 건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제약에서 자유롭게 다양한 인물이 많이 창작되면 좋겠다. 아직 성장하지 못했고 아픔을 가진 캐릭터가 어떤 일을 계기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장이 덜 된 인물이 많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약한 여자의 성장담도 보고 싶다.

최근에 흥미롭게 본 여자는 누구인가? <퀸스 갬빗>. 그 시대에 체스는 남자들만의 게임이었지만 ‘베스 하먼’은 남자들을 상대로 승리해나간다. 하지만 그에게는 삶의 구멍들이 있다. 중독이 그의 정신을 붙잡고,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는 중요한 서사도 있고, 슬럼프를 겪으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시간도 보낸다. 나는 <퀸스 갬빗>이라는 드라마가 여성이 체스 게임에서 남성을 제치고 우승했다는 통쾌감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드라마가 아니라 한 천재가 천재성을 가진 대신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천재는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될 수도 있는 거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뭘까? 욕심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때로는 서로 줄다리기도 하고 권력 싸움을 하며 목표를 향해가는 이야기에 끌린다. 현실에서도 성별을 떠나 이 사람이 잘해서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며 차별과 역차별 없이 실력으로만 정당하게 평가받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