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리 영화 미나리 모니카 정이삭 감독

재킷과 셔츠, 링, 부츠 모두 사카이(Sacai).

한예리 영화 미나리 모니카 정이삭 감독

화이트 메시 저지 톱, 실크 드레스, 리넨 트라우저, 화이트 네트 소재 펌프스 모두 펜디(Fendi).

한예리 영화 미나리 모니카 정이삭 감독

니트 스트라이프 톱 미우미우(Miu Miu).

한예리 영화 미나리 모니카 정이삭 감독

옐로 슬리브리스 볼륨 드레스, 옐로 팬츠 모두 비뮈에트(BMUET(TE)), 옐로 네트 소재 펌프스 지안비토 로시(Gianvito Rossi).

 

영화 <미나리>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의 한 시골 마을로 이주한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다. 아빠 ‘제이콥’은 제대로 이뤄내 가족에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고, 엄마 ‘모니카’는 많은 것을 감내하며 가족을 지켜간다. 광활한 들판을 커다란 농장으로 일궈가겠다는 남편의 꿈은 생각만큼 쉽게 이뤄지지 않고 극적인 반전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삶처럼 크고 작은 불운한 일들과 난관이 시시때때로 등장하고, 때론 서로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싸우지만 그럼에도 다시 온기를 나누고 삶을 살아낸다. 딸의 부름에 그 먼 한국에서 미국까지 찾아온 모니카의 엄마가 숲속 개천 옆에 뿌린 미나리 씨앗이 싹을 틔우고 넝쿨을 이루는 것처럼, 이 가족은 끝까지 서로를 놓지 않고 뿌리를 내린다. 비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더 깊숙이 내리게 하는 것처럼.

<미나리>를 보고 엄청 울었습니다. 자극적인 사건도 없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없지만 자꾸 눈물이 나는 영화예요. 영화를 보고 운 관객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떤 남자분은 엎드려서 펑펑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영화를 보고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팬데믹 시대에 침체되어 있는 곳이 많잖아요. 이런 때에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아준 관객이 고맙고,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오롯이 영화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내어준 데 대해 감사해요. 부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점이 관객에게 위로가 될까요? <미나리>는 뭔가를 거창하게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커다란 사건 중심의 영화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줘요. 힘든 날들을 보내지만 아주 잠시 동안 반짝이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지나가죠. 우리 모두의 인생도 그런 모습인 것 같아요.

한글의 어감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영화 속 인물들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간다 혹은 살아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의지가 있다는 거죠. 미국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미나리’가 강한 생명력과 의지를 지닌 것처럼 이 가족들도 강인하게 앞을 향해가요.

세상에 이렇게 상이 많았나 싶을 만큼 수많은 수상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요. 배우로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한 작품일 것 같아요. 미국에서 촬영한 미국 영화이기도 하고요. 외형적으로 여러 낯선 상황이 있지만 사실 별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굉장히 바쁜 일정으로 촬영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야 말로 정신이 없었어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대본을 딱 여는데 그제야 갑자기 걱정이 밀려왔죠. 도대체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가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러면서요. 하지만 도와주는 분들이 아주 많았어요. 감독님, 윤여정 선생님, 스티븐 연까지 모두 같이 영화를 만들어갔어요. 스티브 연과 유아인 씨가 함께 한 영상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영화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깊이 공감했어요. 내가 뭘 더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어갔어요. <미나리>는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한국의 장편 독립영화 현장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고요. (윤여정) 선생님과 한집에서 지내며 촬영장에 있던 모두가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모니카로 지낸 시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함께 진한 시간을 보낸 덕분인지 그 끈끈한 유대감이 영화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미국배우조합상에서 앙상블상을 수상하고 우리끼리 ‘우리가 받을 만한 상’이라고 말했어요. 같이 산 우리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어요.(웃음)

 

한예리 영화 미나리 모니카 정이삭 감독

코튼 포플린 오버사이즈 프린트 드레스, 캐시미어 혼방 베스트 모두 가니(Ganni).

한예리 영화 미나리 모니카 정이삭 감독

그레이 펀칭 니트 터틀넥, 화이트 톱 모두 프라다(Prada).

한예리 영화 미나리 모니카 정이삭 감독

재킷, 셔츠, 탱크톱, 쇼츠, 사이하이 롱부츠, 링 모두 사카이(Sacai).

 

시나리오로 모니카를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번역본으로 읽었기 때문에 문어체에 가까운 문장들이었고, 감정적인 면이 많이 생략되어 있었어요. 감독님을 뵙고 나서는 작품을 꼭 하고 싶어졌어요. 모니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대신 자신이 보낸 어린 시절과 그때의 추억, 그리고 부모님의 삶에 대해 들려주셨거든요. 감독님의 어린 시절 중에는 저와 정서적으로 맞닿은 부분도 있었고요. 엄마라는 존재는 사랑으로 모든 걸 품고 간다는 생각이 저와 비슷했어요.

정이삭 감독님은 모니카에 대해 이 영화의 심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모니카가 가진 가장 큰 힘이 사랑이기 때문 아닐까요? 모니카는 가족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뿌리이자 힘이죠. 그가 있기에 결국 가족이 흩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가장 큰 희생을 하는 사람도 결국 모니카죠. 한국에서 가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어머니잖아요. 감독님도 그런 의미로 심장이라고 얘기하신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인물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모든 배우가 감독님과 생각이 같았어요.

살아온 환경이 완전히 다른데도 같은 정서를 가졌다는 점이 좋은 팀워크로 이어졌나 봐요. 정이삭 감독님의 영어 대본을 (홍)여울이 번역을 맡았어요. 그 과정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감독님과 여울이, 프로듀서이자 한국계 독일인 (이)인아 언니가 겪은 이민자의 삶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어요. 그들이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느끼며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죠. 이민 1세대 인 그들의 부모님 세대는 생존의 위협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테고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상태로 자라는 아이들은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한국인 부모 아래에서 미국인으로 자랐지만, 현지 아이들과 섞여 있을 때는 차별받는 경우도 있었을 테고요. 그렇다고 한국인처럼 부모님과 한국어로 소통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어느새 영어가 더 편해지고. 정체성의 혼란도 있을 것이고 가족과 소통하기도 힘들어지죠. 많이 외로웠을 텐데 스티븐과 인아 언니, 여울이가 이렇게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잘 자라준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그들의 부모님에게도요. 혼란스러운 성장 과정을 보내면서도 훌륭한 인성을 갖춘 그들이 멋지다고 생각해요. 번역하면서 단순히 언어가 바뀐 게 아니라 검수 과정도 거쳤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두의 합의하에 대사가 정해졌어요. 텍스트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뉘앙스를 모두 공유했어요. 그 덕분에 다른 배우의 대사이더라도 모든 배우가 어떤 감정을 담은 대사인지 깊이 알게 되었죠. 촬영 스케줄을 빠르게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테이크를 많이 나눌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았어요. 서로 흔들리지 않고 연기할 수 있었죠.

오늘 문득 현장을 떠올렸을 때 기억나는 한 순간이 있나요? 함께 저녁 먹는 모습. 늘 다 같이 저녁을 먹었어요. 그 시간들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언젠가 그때처럼 다 함께 식사하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어요.

말하자면 밥정이 쌓였나 봐요. 밥심도 강하지만 밥정도 정말 강해요.(웃음)

모니카는 한예리 배우가 처음으로 엄마를 연기한 작품이기도 해요. 그로 인한 부담감은 없었나요? 전혀요. 오히려 잘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늘었다는 점에서 좋았어요. 자연스럽게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기분이에요. 제가 엄마를 연기하는 모습이 불편해 보이거나 나이와 안 맞아 보이지 않고 자연스레 제 옷의 하나처럼 여겨지니까요.

팬데믹 시대만 아니었다면 아마 해외에서도 한창 홍보 스케줄을 소개했을 텐데요. 여러 해외 시상식 현장에서 직접 누리지 못해 아쉬울 것 같기도 해요. 들뜨지 않아서 오히려 좋아요. 어쩌면 들뜨는 걸 걱정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렇게 되면 내려오는 데도 시간이 걸리니까.(웃음) 그 시간을 잠시 즐겨보는 것도 좋았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아요. 살면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지만 또 언젠가 다시 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 좀 더 즐겨봐도 되고요. 다만 미나리 팀을 만날 수 없는 건 아쉽죠.

들뜨지 않아 좋다는 말은 평가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영화를 찍는 과정을 좋아해요. 그 과정이 아주 중요하고요. 물론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결과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요. 과정 안에서 충분히 즐기며 정말 열심히 노력해요. 즐기기 위해 노력하죠. 찍는 과정이 너무 좋고 재미있어요.

3월 26일에 개막하는 2021 통영국제음악제에도 무용수로 참여하죠. 필모그래피를 부지런히 채우는 와중에 무용수로서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어요. 무용은 저에게 좋은 시너지가 되어줘요. 연기할 때는 그 캐릭터로 저를 채우는 기분이 들어요.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성을 완성해가죠. 반면에 무용할 때는 훨씬 가볍고 단순해져요. 연기하며 채운 것을 다 비우고 부수고 치워버리는 느낌이죠.

필모그래피를 채우며 잃고 싶지 않은 가치관이 있나요?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있게 하자. 한 번도 연기라는 작업이 싫었던 적이 없어요. 그래서인지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좋아할 수 있기를 바라요. 다른 이유 때문에 이 일이 싫어지지 않았으면 하고요. 연기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다른 것의 영향을 받아 시들해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연기는 너무나 좋아하는 일인데, 다른 이유로 이 일이 싫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뭘 해야 할지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것 하나를 하기 위해 싫어하는 것 몇 개를 버틸 수 있을지.

오늘날의 한예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일까요? 같이 작업한 사람들, 만나온 친구들. 좋은 관계에서 받는 에너지가 굉장히 커요.

차기작이 드라마로 정해졌어요. 올봄을 바삐 지내겠어요. 영화 산업이 어려움을 겪는 요즘, <미나리>가 좋은 스타트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출발을 한 덕에 올해는 나쁘지 않았어, 지난해에 비하면 참 괜찮았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