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프 네크라인 블라우스 루이 비통(Louis Vuitton).

프린트 톱과 쇼츠, 블랙 메리제인 슈즈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볼드한 네크리스 페페쥬(Pepe Zoo).

스카프 네크라인 블라우스와 베스트 트렌치코트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영화 <죄 많은 소녀> 개봉 때였죠? 그날로부터 전여빈 배우가 자신의 길을 멀리, 드넓게 걸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뵌 때가 3년 전이었죠?

맞아요. 2018년 여름이었으니까. 이상하게 그날이 엊그제처럼 느껴져요. 짧고 캄캄한 터널을 쓱 지난 것처럼, 찰나처럼.

찰나 같이 밀도 높은 시간 속에서 좋은 작품을 충실히 해왔어요. 영화 <죄 많은 소녀>의 ‘영희’ 이후로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은정’, 영화 <낙원의 밤>의 ‘재연’, 최근 드라마 <빈센조>의 ‘차영’까지. 지난 3년 동안 매번 다른 선택을 하고, 다양한 인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되고 느낀 것이 있나요? 요즘 연기하며 깊이 느끼는 건 감정이나 마음의 구획이 선명히 나뉘어 있는 인물은 없다는 점이에요. 욕구와 결핍, 사랑과 외로움 같은 본질적인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어떤 지점이 더 도드라지고 발화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그림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 같아요.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 <글리치>의 지효’ 역시 어떤 면에서 영희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캐릭터마다 각자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함부로 침범하거나 차용하지 않으려고 경계해요. 배우로서 인물 각각의 인생을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어떻게 하면 다른 방식으로 인물의 상태를 표현하고, 달리 살아볼 수 있을까 고민하고요.

한 인물에 대해 고민하고 몰두하는 시간이 긴 만큼 헤어지는 시간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다른 배우들도 그러겠지만 그 인물로서 옷을 입고, 말과 행동을 하고, 인물 주변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시간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물에 녹아들게 돼요. 그러다 작품이 끝나면 이별해야 하니까 마음이 많이 아파요. 내게서 떨어뜨려놔야 하니까. 그래서 촬영을 마치면 내가 만났던 인물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돼요. 어떤 사람인지, 그럼 나 전여빈은 어떤 사람인지. 동시에 인물이 나에게 준 영향과 가르쳐준 것들을 곱씹으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요. 거리를 둬보려고요. 그러지 않으면 자꾸 남아서 괴로우니까.

흔히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곧 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잖아요. 한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탐구하는 배우의 직업적 속성이 여빈 씨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나요?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줘요. 내가 처음 만나는, 나와 가장 가까워져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극 중 인물에 대해 누구보다 이해하고 잘 알아야만 연기할 수 있는 거잖아요. 설사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어도 이해해보려 노력해야 하고요. 그렇게 한 사람을 탐구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배우는 것이 많아요. 나아가 내가 맡은 역할 외에 그를 둘러싼 관계까지 헤아려야 하니까요. 자기만 보는 게 아니라 상대 인물에게도 시선을 옮겨서 그에게 왜 이런 대사를 했는지 생각해보게 되고요. 한 인물에만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계와 상황, 전사까지 생각하다 보면 이해가 한층 더 깊어져요. 이 과정에서 하나의 큰 세계를 품게 되는 것 같고요. 그런 좋은 영향 속에서 저는 연기하면서 사랑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영양분이 더 많이 생겼어요. 마음이 말랑말랑해졌어요. 배우로 살아가는 삶이 제 안의 사랑을 자꾸 키워요.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스물한 살 때도 이 일이 사랑을 키워줄 거라 예상했어요? 아니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저 숨 쉴 곳이 필요해 연기가 하고 싶었어요. 동시에 이 세상에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도피의 방법으로 혹은 더 잘 살아볼 방법으로 연기하고 싶어 한 것 같아요. 내 현실은 불안정하지만 단단하게 잘 짜인 이야기 속에서 마음껏 살고 싶었어요.

건강한 방법이죠. 맞아요. 생각해보니 새삼 너무 감사하네요. 그때 참 많이 불안했거든요. 자신이 쓸모 있는지 없는지는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굳이 따질 필요도 없지만 20대의 전여빈은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봐 굉장히 두려워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안쓰럽기도 해요. 왜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까지 불안한 마음을 가졌을까? 그냥 존재하면 되는데. 지금은 스스로에게 이 말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네가 배우로 살지 않아도 너는 충분히 잘 살아 있어”라고.

배우로서 조금 늦게 빛을 발한 것이 여빈 씨에게 남긴 것들이 있네요. 누군가는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의 저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과 노력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어렴풋이 제 속도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그 세계에 섣불리 합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천천히 시도했던 것 같고. 그래서 적합한 시간에 많은 것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가고 있다고 느껴요. 쫓기거나 끌려가는 게 아니라 함께 플로를 타고 있는 것 같은. 근데 이건 단순히 제 의지만으로 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신이 도와주는 거라 생각해요. “저 조그만 아이가 행성 안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네. 내가 조금 도와줘볼까?” 이럴 수도 있고. 아니면 제가 너무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가 하늘에서 “아이고, 우리 애기 애쓰고 있네. 할머니가 도와 줄게” 하며 도움 한 스푼 톡톡 뿌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스트라이프 톱과 네이비 원피스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볼드한 이어링 페페쥬(Pepe Zoo).

 

최근 한 인터뷰에서 “지금껏 맡은 역할에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봤을 때 예쁘지 않을 수 있지만 제가 느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이런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었다”라고 말했어요. 여빈 씨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궁금해요. 대학 입시 면접에서 자신이 가진 보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제 마음입니다” 하고 답했어요. 추한 것도 아름다움으로 느낄 수 있는 제 마음이 보물인 것 같다고요. 그리고 나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데 가슴이 저릿했어요. 마음 안에 온 우주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마음 안에 작은 우주가 팽팽팽 돌아가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느낌이요. 이런 마음이라면 이 세상 어디에 있어도, 완벽히 절망적인 상황이더라도 어떤 희망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물론 내 마음 안에서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를 찾고 싶어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어요. 앞으로 그렇게 살고 싶다는 의지였을 수도 있고요.

새로운 드라마 <글리치>를 촬영하고 있어요. 배우로서 작품마다 낯선 장소에 자신을 놓고, 매번 새로운 의심과 고민을 반복하는 과정이 어렵진 않아요? 저는 재미있어요. 이 모든 과정이 경이롭고 신비해서 감탄할 때도 많아요. 어떤 인물을 새롭게 만나고, 현장에서 상상하지 못한 일을 겪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마주 앉은 동료들, 감독님과 작가님,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금껏 제가 몰랐던 다른 세계를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 얻는 쾌감이 커요. 불안과 두려움, 초조함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멋진 직업이에요. 맞아요. 참 멋진 일이에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만나게 되니까요. 어떤 근사한 만남처럼 내게 와주는 거니까요. 물론 모든 과정이 마냥 행복하다고 할 순 없어요. 어떤 때에는 처절하게 외롭기도 하고, 두렵고 불안하기도 해요. 때때로 그런 감정들이 나를 작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살아 있음도 느껴요.

연기는 그 순간에 생생히 사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순간이 지나면 되돌리거나 정정할 수 없잖아요. 눈앞의 순간에만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는 것 역시 멋지면서도 두려운 일 아닐까 싶어요. 순간이 지나버리면 오늘 이 인물로 사는 이 신은, 그 순간의 삶은 지나가버리는 거잖아요. 연기를 할수록 유일무이하게 주어지는 기회에 대해 절절히 체감해요.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해요. 최선을 다했으니, 최선을 다한 나에게 또는 당시의 환경이나 상태에 대해 핑계 대지 않고, 합리화하지 않는 자세를 배워가게 되고요.

연기가 그렇듯 인생의 모든 순간 역시 유일무이하고, 잠시 내가 삐끗한 순간을 복기할 수는 있지만 단지 거기에만 함몰되어서도 안 되는…. 맞아요. 축소된 인생이 여기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계속 배우게 돼요. 마음을 단련하게 되고요. 음,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어요. “언제나 당신은 당신의 순간에 최선이었고, 모든 순간은 지나가니까 잘 보내주자고, 이 물결을 함께 잘 타자”고요.

인생이 물결이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버린다고 생각하면 허무하기도 해요. 물살 사이에서 뭐 하나는 제 것으로 두고 싶고요. 물결 위에서 잡고 싶은 건 없나요? 흘러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빈손인 때가 있더라도요? 서퍼의 마음으로 그때의 풍경을 누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거니까.

순간에 충실하며 물결을 만끽하는 와중에 여빈 씨는 어떤 사람이고 싶어요? 제가 용기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미지의 것에 거침없이 뛰어드는 사람이고 싶어요. 궁금한 것,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 흥미로운 것에 계산하거나 어떤 시선에 갇히지 않고, 배우의 본능에 충실하며 어디건 풍덩 빠질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나를 지나치게 보호하지 않는 선에서, 억지스럽지 않은 선에서 즐기고 싶고요. 배우로서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면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