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5년 전쯤 영화 <거인>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뒤로 꽤 많은 작품에 출연했는데 배우로서 선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있을 것 같다. <거인>이 그렇다. <거인>의 ‘영재’를 연기한 후 작품을 선택할 기회가 생겼다. 배우로서 연기하고 싶은 작품의 기준도 좀 더 분명해지고. 김태용 감독님과 영화를 찍으며 <거인>이 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쯤엔 배우의 길을 계속 걸을지 확신이 없었고, 주변에 이 정도 해봤으면 됐으니 이제 딴 길을 생각해보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거인>으로 상을 몇 개 받고 나서 지금 내가 맞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을 받아서 좋은 게 아니라, 내가 가는 길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거인>을 하고 나서 많은 작품을 만났다. 봉준호 감독님을 비롯한 많은 감독님이 <거인>을 통해 최우식이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다. 작은 영화로 큰 주목을 받았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거인>이 배우라는 길에 대한 확신을 준 작품이라면, <마녀>는 도전할 용기를 준 작품이다. 지나온 모든 작품이 매번 내게 많은 것을 주지만 과거의 나였다면 <마녀>를 선뜻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녀> 이후 나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더 다양한 결의 캐릭터에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거인>으로 최우식을 발견했다면, <마녀>는 최우식에게서 기대하지 못한 또 다른 최우식을 발견하게 한 것 같다. 언젠가는 대사가 없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 언어는 연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말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다른 장치, 표정을 비롯한 다른 표현 방식으로 연기하는 거다. 그리고 듬직한 캐릭터도 해보고 싶다. <마녀>의 ‘귀공자’와 또 다른 느낌으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인물에 욕심이 난다. 내가 체격이 큰 편은 아니지만 그런 체격적인 조건을 넘어서 듬직한 인물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기생충>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일 것이다. 영화를 통해 성장하는 시간도 있었을 테고. 봉준호 감독님과 함께한 점도 그렇고, 송강호 선배와 부자지간으로 연기 호흡을 맞춘 점도 그렇고, 많은 선배 배우들과 함께한 점도 그렇고, 많은 것을 공부한 현장이었다. 모든 현장은 매번 다른 깨달음을 주는 것 같다. <기생충>은 재미있는 현장인 동시에 부담감이 큰 작품이기도 했다. 내가 화자로서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 데다 송강호 선배가 아버지로 나오니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지. 나는 현장이 편안해야 잘하는 성격이어서 현장을 두려워하기보다 편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연기를 시작한 후 좋은 배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나? 좋은 배우가 되는 건 정말 어렵다. 얼마 전부터 든 생각인데, 1년에 영화를 많이 찍으면 보통 서너 작품을 한다. 다작이 목표는 아니었는데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잘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라면 겁내지 않고 선택했다. 좋은배우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관객 입장에서만 그 기준을 생각하면 그냥 내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연기가 좋아서 배우를 시작했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신경 써야 하고.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연기하기가 더 힘들어질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과정을 즐기는 배우가 되고 싶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즐거운 배우. 오늘 같은 화보 촬영도 즐겁게, 연기도 즐겁게, 촬영 현장도 즐겁게. 어떤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재미있게 살고 싶다.
배우 최우식에게는 지나온 시간보다 나아가야 할 시간이 많다. 그 길에서 지키고 싶은 가치관이 있나? 일하며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잘 찾는 것 같다. 한때 슬럼프가 심했었는데 고민도 많고 밤에 잠을 잘 못 잘 때도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 기대와 희망을 갖기보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과 고민이 많은 내 성격이 연기할 때는 장점이 된다. 고민해서 나오는 연기와 그렇지 않은 연기는 다르다. 나의 겁쟁이 마인드가 연기할 때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일이 나와 잘 맞고. 난 결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 카메라 앞에서는 나서고 싶다. 그러는 나 자신이 스스로 재미있고. 그게 내가 일하는 이유다.
앞으로 최우식에게 채우고 싶은 것과 덜어내고 싶은 건 뭔가? 걱정과 고민을 덜어내고 싶다. 그리고 이대로 지내고 싶다. 연기를 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씩 꺼내 써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을 살아가야 한다. 30대 중·후반, 40대, 50대를 연기하려면 그 시간을 살아봐야 한다. 친구랑 많이 놀아도 보고 가족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고 연애도 하며 내 삶을 채워가야지. 덜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건 지금의 최우식은 비우기보다 채워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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