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이 장동윤

태일이 장동윤

블랙 니트 스웨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드라마 <써치> 이후 행보가 궁금했는데, 그다음이 애니메이션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애니메이션 <태일이>에서 주인공 ‘전태일’의 목소리를 연기했어요. 목소리만으로 캐릭터를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도전인 작품이었어요. 표정이나 몸짓 없이 오로지 음성만으로 연기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이를테면 난감한 감정을 소리로 표현한다거나 의자에 앉는 장면도 ‘읏쌰’ 이런 소리를 넣는 게 조금 낯설었어요. 게다가 실존 인물을 연기해야 해서 초반에는 전태일이라는 인물의 목소리를 놓고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어쨌든 새롭게 만든 창작물이니 실제 인물을 따라가려 하기보다 제 목소리로, 제 식대로 표현하는 게 맞겠다 싶더라고요. 다행히 감독님도 제가 준비한 여러 시도를 열린 태도로 받아주셔서 전태일이라는 인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연기할 수 있었어요.

전태일 열사에 대해 꽤 많이 연구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탐구하고 연기하면서 가늠한 전태일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유별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워낙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노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노동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 비슷했을 거예요. 다만 태일이는 한 발짝 앞서서 움직였을 뿐이고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태일이의 말이 있다면요? ‘나와 마주 보고 삽질을 하던 아저씨는 키가 크고, 배가 불룩한 사람이었어. 기름때에 절어 있는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아저씨는 안 보이고 모자만 보이는 거야. 마치 모자가 일을 하는 것 같았어. 이 바닥에서 사람들은 자기 모자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거야. 나는 어떻게 보일까? 내 낡은 운동화로? 아니면 찢어진 바지를 입은 말라깽이 청년으로 기억될까?’ 태일이가 친구한테 보낸 편지의 내용인데, 이 글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요. 묵묵히 남들처럼 일만 하던 태일이가 노동자의 삶에 대해 고찰하고 움직이는 계기가 담긴 편지가 아닌가 싶어요.

한 작품을 마치면 무엇이든 남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태일이>를 마친 후 어떤 것이 남았다고 생각하나요?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 연기를 한 경험보다 이 작품이 가진 의미가 더 크게 남아요. 실존 인물을 파고드는 작업을 하며 배우로서 배운 게 많아요. 아마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어떤 형태였어도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다루는 작품이라면 참여했을 것 같아요.

전태일이라는 인물과 어떤 접점을 느낀 건가요? 단순히 대구 출신에 서울에 올라와 일하고 평상시에 글 쓰는 걸 좋아했다는 접점도 있지만, 그보다 뭔가 정서적으로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글을 택한 점도 그렇고, 글에 드러난 사고방식에서 접점을 느꼈어요. 저만 특별하게 느낀 게 아닐 수도 있지만요.

 

 

태일이 장동윤

화이트 리본 타이 블라우스 로드앤테일러(Lord and Tailor), 그린 컬러 니트 스웨터 이자벨 마랑 옴므(Isabel Marant Homme), 팬츠와 하이톱 스니커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태일이 장동윤

블랙 니트 스웨터와 지퍼 라인 팬츠, 트라이앵글 벨트, 앵클부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태일이>를 작업하면서 써둔 글도 있나요? 배우로서 작품을 하기 위해 글을 쓴 적은 없어요. 글은 개인적인 부분이고, 일과는 관계가 없어요. 저는 그래요.

글을 쓰면서 사유하는 것이 연기에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두는 편인가 봐요. 평상시에 생각나는 게 있으면 시나 수필을 쓰고, 아주 가끔은 시나리오도 쓰긴 하는데 연기와는 완전히 별개인 것 같아요. 제 경우엔 오히려 상반되는 부분이 많아요. 연기가 대본을 토대로 연출자의 생각을 표현하는 거라면 글은 온전히 제가 만들어내는 창작의 영역이거든요. 굳이 접점을 찾으면 뭔가를 표출한다는 점 정도일 거예요. 제가 어릴 때부터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했거든요. 그런데 글과 연기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요.

글을 쓰며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는 편이라면, 연기할 때는 어느 정도 드러내는 편인가요? 감독님의 요구에 따라 달라져요. 드라마나 영화 모두 배우가 아니라 연출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감독님의 요구에 맞추는 게 배우의 몫일 테고요. 작품에 따라 제가 가진 모습을 맘껏 드러내기도 하고, 반대로 아예 저를 배제할 때도 있어요.

어느 쪽이 더 즐거워요? 아무래도 자신을 드러내는 쪽일 테죠? 물론 장난기 많고 어리숙한 면도 있는 저 자신을 그대로 표출했는데, 그게 재미있는 형태로 발현되면 즐겁죠. 그런데 반대의 방식에서 느끼는 짜릿함도 있어요. 말랑하고 코믹한 작품일수록 제가 많이 담기고, 무겁고 센 작품일수록 만들어내는 부분이 많아요. 지금 촬영 중인 영화 <늑대사냥>은 극단적으로 저를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연기하고 있어요.

두 가지 방식을 오가는 걸 즐기는 편인가요? 그간 연기한 인물들의 간극이 큰 편인데요.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축구 선수로 따지면 슈팅만 잘하기보다 수비도 하고 패스도 잘하는 멀티플레이어여야 감독의 부름을 받을 가능성이 높잖아요. 저도 배우로서 무기를 다양하게 갖춰놓으려고 자꾸 시도하는 거죠.

 

 

태일이 장동윤

블랙 수트와 그레이 니트 터틀넥, 하늘색 니트 폴로 모두 프라다(Prada).

태일이 장동윤

블랙 레터링 티셔츠 사카이(Sacai), 스카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태일이 장동윤

블랙 수트와 그레이 니트 터틀넥, 하늘색 니트 폴로 모두 프라다(Prada).

 

몇 년 전 인터뷰를 살펴보니 액션과 여름 향기가 나는 청춘 멜로드라마를 시도해보고 싶다는 말을 했더라고요. 신작 <늑대사냥>이 액션물, <롱디>가 멜로물이니 결국 다 해낸 셈이네요. 아직도 햇병아리라서 할 게 많아요. 하하. 계속 도장 깨기 해야죠.

도장 깨기 끝에 어떤 것을 만나길 바라나요? 최종 보스랄까요. 최종 보스가 있을까요? 모든 장르를 다 섭렵한다고 해도 끝은 아닐 테니까요. 계속 경험치를 쌓아두고 어떤 장르든, 인물이든 제 앞에 나타났을 때 그에 부합하게 잘해내고 싶어요. 저 배우는 액션은 안 어울려, 멜로는 좀 어색해, 코믹이 안 되더라, 이런 식으로 안 될 거란 소리를 들으면 슬플 것 같아요. 그만큼 일거리가 없어지는 거잖아요.(웃음)

배우가 일을 잘한다는 건 어떤 걸까요? 언제부턴가 마음가짐이 바뀌었어요. 거창하게 생각할 거 없다는 쪽으로요. 간단하게 말하면 창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배우의 몫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현장에서 되도록 창작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걸 절대 원칙으로 삼고 현장에 가요.

간혹 보태고 싶은 아이디어가 생길 때도 있잖아요. 주관과 직관이 쌓여 완성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작품에 도움이 될 생각이라고 100% 확신하면 말하는데, 웬만하면 정답은 감독님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해요. 물론 가끔 ‘왜 이렇게 표현하라고 하시지?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렇게 해달라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더라고요. 어쨌든 배우는 모니터 뒤에 있고, 감독은 모니터 앞에서 큰 그림을 그리잖아요. 각자의 자리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연기를 대하는 태도와 기조가 명확해 보여요. 만족의 지표도 명확할 것 같은데요? 감독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기류가 있어요. 그냥 오케이가 아니라 시원하게 ‘오케이! 됐어!’라는 말이 나오면 짜릿하죠. ‘내가 의도에 맞게 한 거구나’ 하는 만족감. 그런 재미로 이 일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신뢰가 중요해요. 어쩌면 이 일은 믿음을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