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끌레르와 1년 만에 만났어요. 요즘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나요? 지금까지 운동을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이 있나 싶을 만큼 운동에 빠져 있어요.(웃음) 책도 많이 읽어요. 책은 한번 빠지면 바짝 읽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야 책에 담긴 지식이 제 안에 흡수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낮과 밤에 읽는 책이 각각 달라요. 요즘 낮에는 진화생물학에 관한 책인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있어요. 오전에는 주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책을 읽어요. 처음엔 진화생물학이라는 주제가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인간이 친화력을 발휘해 서로 나누고 공유하는 모습이 이해하기 쉽게 담겨 있어요. 밤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요. 지난해에 처음 읽었는데, 드라마 촬영하며 틈틈이 볼 때는 막연히 좋은 내용인 건 알겠어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어요. 시대 상황이나 용어가 쉽지 와닿지 않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까 그 책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밤에 소설을 읽는 이유가 있어요? 전 감정에 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밤에는 마음 놓고 감정에 져도 될 것 같아요. 인문과학서를 읽는 이유와 비슷한 지점이 있는데, 저는 뭔가를 이해할 때 은유적인 것은 잘 흡수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흡수한 것들을 제 안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해서는 흡수만 해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흡수한 것을 이해하고 자기 객관화를 하고 부족한 점을 인지하는 이과적 사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감정에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이어졌어요. 체계적으로 생각해서 결괏값을 내는 능력을 키우고 싶어요. 그래서 밤에만 감정에 여유를 주려고 해요.
영상의 시대에도 책과 글이 주는 힘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책이 가진 힘은 뭘까요? 현재 작품을 하지 않고 있어서 시간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다 보니까 책을 많이 읽게 돼요. 책이란 게 한 권 읽으면 또 읽고 싶고, 좋은 책은 아주 많으니까요. 지금 한 권을 다 읽으면 다음엔 무슨 책을 읽지 하며 계속 연결되고 있어서 그 흐름을 이어가는 중이에요.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소모적인 것보다 뭔가 남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싶어요. 소모적인 일만 하며 시간을 보내면 그날 하루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아 후회되고 스스로에게 미안해지거든요.
내년 상반기에 향기 씨가 출연한 <날아올라라 나비>가 방영 예정이에요. 어떤 내용인지 알려줄 수 있나요? 헤어 숍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예요. 나이는 어리지만 경력이 많은 인턴 역할로 출연해요. 저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이 엄청 재미있어요. 어떻게 보면 만화적이라고 할 만큼 캐릭터마다 상당히 독특한 지점이 있어요. 그런 캐릭터들이 모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대본이 정말 재미있어요.
그 안에서 어떤 인물을 연기해요? 왕소심이에요. 그냥 소심한 정도가 아니라 캐릭터적으로 ‘소심이’를 붙여놓은 것처럼 엄청나게 내성적인 인물이죠. 그 캐릭터가 여러 일들을 겪으며 조금씩 변해가요. 그 이야기들이 아주 재미있어요.
그간 연기한 인물들과 결이 다르게 느껴져요. 이전과 다른 캐릭터라는 점이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나요? 그런 이유로 <날아올라라 나비>를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 전에 연기한 인물들에 비해 흥겨운 에너지를 갖고 있기는 해요.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제게 기회를 준 작품 중 이야기가 너무 좋거나 제가 맡을 캐릭터 자체가 매력 있으면 선택했어요. 다만 이제는 조금 다른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플랫폼이 다양해진 만큼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니까요. 지금 제 나이가 배우로서 과도기가 아닌가 생각해요. 지금까지 대중에게 각인되어온 이미지대로 밀고 나가야 할지, 지금까지와 다른 이미지로 어긋나게 가야 할지 아직 답을 모르겠어요. 아마 이번 드라마에서는 결이 조금 달라진 정도라고 느끼시지 않을까 해요.
배우에게는 각각의 작품이 저마다 다른 세계로 다가올 것 같아요. 다른 세계를 경험할 때마다 배우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겠죠? 많이요. 처음에는 그렇게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 몰랐어요.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인가요? <우아한 거짓말>의 ‘천지’. 천지를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나요. 그래서 이한 감독님이 제게 미안해하세요. 그런데 이게 슬픔 때문만은 아니에요. 천지를 아픔으로만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얘긴데요. <우아한 거짓말>은 한 인물이 다른 인물과 대립하거나 상처를 받아 아픈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내면 깊숙이 뭔가를 파고드는 감정을 알게 해준 작품이에요. 감정으로 인물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떤 건지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가 연기한 인물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어요. 작품 속 인물을 사건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인생을 보게 되었죠.
무엇이 향기 씨를 계속 연기하게 하는 걸까요? 너무 재미있어요. 그리고 연기하면서 맡은 인물에게 배우는 게 많아요. 단단한 인물을 연기하다 보면 저도 조금씩 괜찮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아 감사하고요. 그러고 나면 또 다른 에너지로 다른 인물을 연기하게 돼요. 일종의 선순환이죠.
괜찮은 어른이란 어떤 어른일까요? 저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저에게 괜찮은 어른이란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에요. 물론 정답은 없어요. 때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혹은 내 커리어를 위한 선택일 수도 있겠죠. 감정을 위한 선택일 수도 있고요. 상황마다 기준을 잘 잡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괜찮은 어른 아닐까요? 우연히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됐기 때문에 이 직업에 대한 생각이 저에게 자연스레 스며들었어요. 어떤 이유로 연기를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배우가 직업이 아니라 제 일부가 됐어요.
직업이 자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해요. 맞아요. 지금은 재미있어서 연기를 하고 있지만, 때론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여러 작품을 통해 그런 인물로 비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해요. 좋은 메시지가 담긴 작품 속 한 인물을 연기했을 뿐인데, 마치 김향기라는 사람도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낀다고 할까요. 괜스레 작품을 홍보하며 좋은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 모든 게 감사한 일이죠. 감사한 마음으로 솔직해지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작품에 출연하지 않는 동안 자신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하나요?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새로운 에너지가 생겨요. 그렇게 생긴 에너지를 다른 데 써보고 싶기도 하고요. 일종의 선순환이죠. 이제는 ‘너 그냥 해, 일단 해봐’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너무 싫어서 뭔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해보려고 해요. 직접 부딪히고 겪어야 뼈저리게 깨달으니까요. 걱정하고 마음 졸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렇게 걱정하느라 제 풀에 지치기보다 아무리 쓸모없는 일 같아도 경험해보려고 해요. 전에는 뭔가 미션이 주어지지 않으면 가만히 있곤 했어요. 에너지 자체가 적은 사람처럼. 그러다 좀 더 생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특별히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기보다는 자연스레 변한 것 같아요. 운동을 열심히 해볼까? 어? 운동이 재밌네? 이제 산책 좀 해볼까? 햇살이 좋네. 이런 식으로. 언젠가 삶은 뭔가를 의식하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글을 봤어요. 몰입 상태의 성취감 같은 거죠.
20대의 나날이 어떤 모습으로 채워지길 바라나요? 향유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어요. 저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자기 객관화를 하려고 해요. 그래야 제 일상이 좀 더 윤택해져요. 제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구분해서 적어보면 큰 도움이 돼요. 좋아하는 음식처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적어요. 살다 보면 힘든 시기가 오기 마련인데, 그럴 때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한 것을 보다 보면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줘요. 그 도피처를 여러 개 써두는 거죠.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가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힘들 때 제가 좋아하는 것을 새삼 떠올리면 추스르는 데 많은 도움이 돼요.
오늘 문득 떠오르는 행복의 순간이 있다면요? 강아지와 산책하는 순간. 산책하면서 본 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