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로서’ 역으로 함께한 드라마 <꽃 피면 달 생각하고>가 종영한 지 한달 가까이 지났습니다. 이번 작품도 마지막 촬영 날에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어요. 드라마 종영때뿐 아니라 헤어지는 순간을 맞을 때면 눈물이 자주 나요. 순간에 깊이 몰입하는 편이라 참 슬프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엔 괜찮아지더라고요.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면 헤어지는 상황이 지난 후에 그다지 미련이나 아쉬움이 남진 않는 것같아요.
작품이 끝나면 연기한 인물에서도 쉽게 빠져 나오나요? 그 부분에 크게 어려움을 느끼진 않아요. 인물이 마음에 오래 머무르면 그 여운을 즐기는 편이고요. 그간 제가 맡은 인물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아서 오래 간직할 때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꽃 피면 달 생각하고>의 로서는 잘 떠나보냈어요? 로서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잘 보내줬어요. 촬영을 세달 전쯤 마무리해서 방송을 연기자와 시청자 사이의 눈으로 보게 되었더라고요. 로서가 단단하고 현명한 친구라는 걸 시청자들도 느끼기를 바랐어요.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요? 로서한테 닥친 여러 위기 중에서도 엄청난 빚을 진 상황이 제일 큰 시련일거라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로서가 빚 백 냥을 갚기 위해 금주령의 시대에 술을 만들어 팔겠다는 결심을 하고 고군분투하는 초반의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요. 이를테면 ‘술이 지닌 이로운 점들이 있는데 왜 나쁘다고만 생각하냐’라면서 감찰사 ‘남영’(유승호)에게 진심을 이야기하는 장면이요.
금주령에 맞서는 로서의 밀주만큼은 아니겠지만, 무언가를 위해 용기 있게 도전한 경험이 있어요? 제 인생에서 꼽자면 데뷔하려고 한 것이요. 잘 될지 잘 안 될지 정해져 있는 직업이 아니고, 일찍부터 마음먹고 데뷔를 준비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저에게 용기가 없었다면 이 일을 못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찾아봤는데, 혜리 씨의 데뷔 일로부터 4천1백여 일이 지났더라고요. 으악! 그렇군요. 사실 저는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같거든요. 데뷔 이후의 삶이 제 인생의 반 이상을 차지하면 더 실감하지 않을까요?
2010년에 열일곱 살의 나이로 데뷔했으니까 5년 정도 남았네요. 5년 뒤에 혜리씨를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 다시 질문할게요. 꼭 물어봐주세요.(웃음)
로서는 대담하고 주체적인 인물이죠. 그와 비슷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 오늘날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맞아요. 로서는 ‘여자가 어떻게 술을 빚어?’라는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요. 그때의 시각으로 보면 로서가 괴짜인데, 21세기의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잖아요. 그래서 로서를 연기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혹시 내가 어떤 편견에 갇혀서 누군가 괴짜같은 행동을 할 때 왜 저러느냐고 말한 적이 있나? 그 사람의 행동이 다음 세기에는 별 것 아닌 일이 되진 않을까?’ 로서가 당시의 사회적 약자이듯, 제가 살아가는 세상 속 약자들의 생각과 행동도 들여다봐야 한다고 느꼈죠.
얼마 전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을 진화하는 소방관과 피해를 입은 취약 계층의 아동, 우크라이나의 아동과 가족을 위해 기부했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특히 와닿았어요. 아이는 어른에 비해 더 쉽게 위험한 상황에 놓이잖아요. 아동, 여성, 노인 등 약자를 더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기부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건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렵지만 쉬운 일인 듯해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많은 분이 기부에 동참하더라고요. 따뜻한 사람이 참 많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한 후 꾸준히 작품에 출연해왔어요. 지금까지 맡은 인물과 결이 다른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을 것 같아요. 요즘 미국 드라마 <애나 만들기>를 보고 있는데, 인물이 진짜 흥미로워요. 범죄를 저지르는데도 애나의 재주가 워낙 뛰어나다보니 설득력이 생기더라고요. 악역인데도 응원하게 되었죠. 이런 매력적인 인물을 맡으면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연기를 해나가며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나요? 어떤 작품을 만나고, 작품 속 인물과 한 시기를 보내면서 저 자신에게 원하는 것들이 생겨요.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보다 여유를 갖고 스스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살피려하는 식으로요. 인물이 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지점을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지난가을에 한 인터뷰에서 로서한테 배울 점을 묻는 질문에 ‘좀 더 있어 봐야 알 것같다’라고 말했죠. 이제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제가 스스로에게 숙제를 줬었네요. 저한테 로서는 행하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생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면을 배우고 싶어요. 예전엔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도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면, 올해는 ‘하자’라는 말을 더 많이 하려고 해요.
평소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편이라고 들었는데요. 요즘은 오히려 계획을 덜 세우려고 해요. 무언가에 옭아매여 있는 느낌이 좋진 않더라고요. 계획형인 사람은 어떤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하는 듯해요. 저도 그럴 때가 있고요. 일기를 10년 정도 꼬박꼬박 썼는데, 하루라도 안쓰면 큰일날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 최근에는 매일 기록하진 않아요. 일과처럼 꾸준히 해오던 일에서 벗어나보면서 스스로를 좀 더 자유롭게 놔둬보려고 해요.
우연히 생긴 일이 좋았던 적도 있나요? 완전한 우연은 아니지만 계획에 어긋난 일을 꼽자면, 약속이 취소됐을 때요.(웃음) 원래는 곧바로 다른 약속을 잡거나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편이었는데 말이에요. 혼자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아주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골프 레슨이 부득이하게 취소되면 2~3시간동안 청소를 할 수 있죠.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게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는 상태를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최근에 이사를 해서 택배 상자들을 뜯는 재미도 쏠쏠해요. 이런 저런 ‘소확행’을 누리면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에요.
혜리씨의 일상은 유튜브 채널 <혜리>에서 살짝 엿볼 수 있죠. 유튜브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 중 하나잖아요.이 채널을 통해 자주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팬들의 공감을 얻은 댓글이 상단에 자리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영상을 본 분들이 좋은 말을 많이 남겨주더라고요. 저 자체를 좋아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곧 찾아올 완연한 봄은 혜리씨에게 어떤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요? 되돌아보면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간 듯해요. 또 봄은 아주 짧잖아요. 사람들을 만나고, 예쁜 옷도 입고, 기억할 만한 공간들을 찾아가면서 이 계절을 만끽하기를 바라요. 추억을 많이 남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번이 20대의 마지막 봄이기도 하니까요.
30대가 되기 전에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부지런히 사는 것. 그렇게 다가오는 30대를 잘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