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부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촬영을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다시 여름이에요. 지난 사계절이 특별했으리라 짐작해요. 지금껏 이렇게 사계절을 선명하게 느껴본 적이 있나 싶어요. 여름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밭일하고(웃음) 가을밤에는 공기의 선선함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껴보고요. ‘구씨’와 재회할 때 걷던 눈길까지. 여름은 여름답게, 겨울은 겨울답게 보냈어요.
3일 전 마지막 방송을 했죠.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미정’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새삼 느껴지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촬영할 때는 텍스트로 인물을 그려나가잖아요. 대본 안에서 단서를 발견하고 또 감독님과 작가님으로부터 답을 얻기도 하고요. ‘미정은 크고 넓은 사람이다, 몇 만 년을 산 듯한 사람이다, 본능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는 말을 염두에 두고 미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그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촬영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미정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더 혼자였고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다고, 더 깊이 참아낸 사람이라고 느껴요.
인간은 고독 앞에서 비슷한 실수를 하잖아요. 고독과 외로움을 모면하기 위해 불필요한 상황을 만들고, 의미 없는 사람을 만나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미정은 자신이 혼자임을 완전히 껴안는 사람이라 좋았어요. 맞아요. 저도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나는 저렇게 못 해’였어요. ‘미정처럼 고독을 감내하고 곱씹으며 혼자임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한다면 저는 못할 것 같거든요. 고독을 정면으로 뚫고 나간다는 점에서도 미정이 큰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큰 사람이라는 표현, 참 좋은 것 같아요. 김지원 배우가 생각하는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해방 클럽’의 규칙이 있잖아요. ‘행복한 척하지 말자’, ‘불행한 척하지 말자’, ‘정직하게 바라보자’. 이게 참 어려운 일 같거든요. 이 규칙을 따르려 노력하다 보면 큰 사람이라는 말에 조금 가까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미정은 타인에게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인물이에요. 왜 정말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는 ‘조금만 이렇게 해줄 수 없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미정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여요. 다양한 이들을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큰 사람이죠.
인간에 대한 깊은 시선과 통찰을 담은 작품이죠. 작품을 하기 전과 후 스스로의 변화를 체감하나요? 지금껏 닿지 못했던 깊이와 넓이를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시작했는데요. 그 과정을 거치며 어떤 상황 앞에서든 말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미정이는 비겁하거나 변명을 하는 인물이 아니에요. 투명할 만큼 솔직하죠.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며 사회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그 부분에서는 최소한의 것만 해요. 적당히 하는 법이 없어요. 그런 점이 미정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지 않았나 싶어요. 왜 가끔 ‘이대로 살 수 없어. 다르게 살아볼 거야!’ 하고 나답지 않은 일을 해봤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나 뭐 했냐’ 싶은 날이 있잖아요. 너무 많은 사람과 말들에 휩쓸릴 때가 있는 것 같거든요. 그 가운데 나를 지키는 힘은 결국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일 같아요. 미정에게 배운 것들이에요.
투명한 미정만큼이나 김지원 배우 역시 어떤 선입견 없이 투명한 태도로 미정에게 다가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거라 짐작되고요. 미정에게 품은 질문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아, 너무 감사한 말이에요. 촬영 초반에는 ‘미정이가 어떤 이유로, 왜 이렇게 됐을까? 이 친구는 왜 이렇게 힘들까?’ 등 미정의 성향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애써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만약 내 친구가 미정과 같은 상황이라면 저는 친구에게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도 해보자’ 하며 해결책을 찾아주려고 할 것 같거든요. 미정을 이해하기 위한, 납득할 이유를 얻기 위해 감독님에게 질문도 많이 했는데 어느 날 감독님이 ‘미정은 그런 인물이야, 받아들이면 돼’ 하시더라고요. 그런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일인데 내 안에서 어떻게든 납득할 이유를 계속 찾은 거죠. 드라마가 끝난 지금, 내가 미정이를 이해하는 게 중요했나? 미정이는 그런 사람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네요. 이해라는 것이 반드시 합당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몰라요. ‘인간을 갱생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오만하다’는 대사가 있잖아요. 그 대사를 하면서 찔렸어요. 내가 그랬던 것 같아서요. 내가 미정이에게 ‘왜?’라고 묻는 것 자체가, ‘좀 이렇게 해볼 수도 있잖아?’ 했던 질문들이 부끄럽더라고요. 동시에 ‘왜 추앙이어야 했나?’라는 질문도 많이 했었거든요. 사람이 어딘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꼭 사람한테서 답을 얻어야 할까? 직업이나 일에서 얻는 성취감을 높이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었는데요. 하는 일이 잘 풀리고,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내일이 기다려진다’는 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추앙’이 나왔으니(웃음) 유독 대사로 회자된 작품인데요. 김지원 배우가 가장 사랑한 대사는 뭔가요? ‘죽어서 가는 천국은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그 장면의 내레이션 전체를 좋아해요. 분량이 길고 쉽지 않았지만 잘해내고 싶은 대사였어요. 제작 발표회 때 손석구 배우가 이 작품을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을 했거든요. 두고두고 곱씹어봐도 좋은 말인 것 같아요. 우리가 매일매일을 ‘와, 너무 즐겁다! 내일이 온다!’ 하는 마음으로 살지는 않잖아요. 지치고 실망하는 날이 있고, 근데 또 내일로 가야 하고, 살아남아야 하니까 소몰이하듯 힘겹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잖아요. 그런 날들 속에서도, 그럼에도 천국을 미루지 않고, 사는 동안 천국을 보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허구의 인물이 돼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삼 알게 되는 경우도 있죠? 맞아요. 정말 그래요. 왜 흔히 연애를 하면 타인을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는 말을 하잖아요.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정의하곤 하니까요. 마찬가지로 배우가 그 인물이 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해당 인물에 빗대어 나를 직면할 때가 있어요. ‘아, 나는 이 인물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밝은 사람이구나 혹은 나는 좀 용기가 없네’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깨닫게 돼요. 저는 저에 대해 세밀하게 설명하는 성향은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나는 요 정도지’ 하고 적당히 뭉뚱그려 생각하는 편인데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구체적인 단어들을 쌓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해하게 돼요. 그렇게 나를 조금 더 알게 된 후 다시 새로운 인물을 만나니까 또 넓어지고요. 그렇게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는 느낌을 받아요.
그렇게 얻게 된 세계의 확장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무엇인가요? 일상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하게 달라져요. 세상을 보다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된다고 할까요. 이전까지는 불합리한 상황에 놓이거나 목격하게 될 때 단편적으로 ‘왜 이래? 불합리해’ 하는 선에서 그쳤다면 점점 상황과 상황의 이면까지 두루 깊게 보게 돼요.
동시에 작품 안에서 허구의 인물을 이해해보려고 했던 노력이 실제 삶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것과 비례한다고 보나요? 저는 비례한다고 생각해요. 비례했으면 좋겠고요. 드라마는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과정에서 희망이나 용기, 정의를 주로 다루잖아요. 그 이야기 속에서 배우로, 한 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면 타인을 품는 품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돼요.
해방 일지를 쓰는 과정에서 김지원 배우도 해방된 것이 있나요? 미정의 해방은 구씨를 통해 이뤄낸 것도 있지만 스스로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남으로써 획득한 해방도 있어요. 나는 왜 우울할까. 나는 왜 다른 애들처럼 웃지 못할까 하고 고민하던 친구였는데, 어릴 때 쓴 일기를 보면 너무 뜨거운 아이였던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 내가 기억하는 나, 내가 미워하는 나, 내가 이렇다고 착각했던 내가 꼭 나의 전부는 아닐 수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거 같아요. 저는 늘 고민이 많거든요. 돌다리를 지나치게 두드리는 편인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조금 벗어나도 되겠다, 가벼워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무리할까요. <나의 해방일지>는 인생에 대해, 행복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죠. 그 질문에 조금이라도 답을 찾았나요? 마지막 질문이 너무 거하죠?(웃음) 아니에요. 제 MBTI가 INFP인데, INFP가 굉장히 좋아하고, 잘 대답하고 싶은 질문이에요. 삶을 이해하기 위해 무한히 질문을 던지는 유형이라.(웃음) 해방 클럽 모임에서 이런 대화가 나와요. ‘해방되셨나요?’라는 질문에 미정이 ‘내 문제점을 짚었다는 것. 그게 다인 것 같다’고 답하는데요. 내가 바뀌겠다고 한들 뜻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물살이 들어왔을 때 전처럼 뒤로 휩쓸려 가지 않고 계속 헤엄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내 문제점을 짚었다. 내가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에 조금 가까워질 수 있는 기로에 섰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