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현철과 함께한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

니트 모크넥 스웨터 세퍼(Sefr), 더블브레스트 코트 마리아노(Magliano).

2019년 가을, 배우 조현철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한 땀 한 땀 어렵게 답을 이어갔지만, 그렇게 고르고 골라 신중히 내보내는 말들에는 흠결이 없었다. 당시 유난히 좋았던 몇 개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의 첫 장편영화 <너와 나>를 보며 지난 대답들이 떠올랐다. ‘어떤 순간에 유독 더 이야기하고 싶고, 더 만들고 싶고, 더 쓰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랑하는 것이 생겼을 때. 예쁜 걸 보면 나누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는 사랑이 작동하는 것 같아요. 내 안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을 남들에게도 이야기해주고 싶고요. 또 죽음을 목격했을 때. 죽음이 어떤 의미이고,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무엇이었고,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요.” 나는 그날의 대답이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곧 만나게 될 영화 <너와 나>의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라고 믿는다. 영화 <너와 나>는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세미’(박혜수)와 ‘하은’(김시은), 두 사람의 하루를 그린다. 영화는 내내 반짝이고, 따뜻하고, 세심히 예뻐서 그 생생한 아름다움 속에 오래 살고 싶어진다. 돌아온 아이들과 함께.

배우로 응했던 이전 인터뷰에서 영화 <너와 나>의 단서가 되는 이야기를 꽤 했더라고요. 지난 시간 내내 이 영화를 염두에 두고 살아온 것이 느껴집니다. 거의 모든 매체에서 한 인터뷰가 그럴 거예요.큰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습니다. 6년 전부터.

이 순간 영화 <너와 나>를 생각하면 어떤 장면이 떠올라요? 이 영화의 시작이 생각나요. 당시 많은 꿈을 꿨는데 꿈 하나가 씨앗이 된 것 같아요. 꿈속에서 완벽한 구(球)를 이룬 복숭아를 봤어요. 형태며 빛깔이 무척 곱고 선명했는데, 이상하게 복숭아를 보면서도 눈앞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생히 느껴지지만 현실에는 없는 것이라는 느낌이요.

‘눈앞에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영화 <너와
나>를 관통하는 주요한 줄기일 텐데요. 처음 시나리오를 쓰던 때를 기억하나요? 2016년 광화문에서 세월호 추모 행사를 했어요. 아이들 영정 앞에서 이 꿈 이야기를 해줘야지 하고 추모 행사에 갔어요. 막상 그 앞에 서니 아이들이 없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거지 싶더라고요. 무기력했어요. 동시에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언제 영화를 찍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저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요. 이상했어요. 사명이라고 하기엔 거창하고요.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끝내 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 같은 일로 받아들였다는 말로 들립니다. 사람이 이상하게 뭔가에 콕 박힌 이후에 오랜시간 그에 몰두하다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연관돼 보여요. 저로서는 (<너와 나>와 관련해) 이상하다 싶을 만큼 연루된 사건들이 잘 짜인 각본처럼 벌어졌어요. 마치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제가 지칠 때마다 ‘내가 이 끝을 보지 않으면 영영 모르겠다’ 싶은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영화를 완성하지 않으면 이 일들이 대체 왜 이런 방식과 형태로 벌어지는지를 내내 궁금해 할 것 같아 계속 하게 됐어요. 무엇보다 영화를 끝까지 만들게 된 주요한 동력은 친구들이에요. 제 주변 사람들과 아이들이요. 아이들이 계속 자기 이야기를 해달라고 저를 끌고 가는 느낌이 들어요. 누구를 위로하겠다고 시작한 일이지만,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저를 위로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에 와보니 이게 저를 살게 했다는 느낌이 들고요.

배우 조현철과 함께한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감독을 짓누르던 무게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내 무거운 의심 아래 살지 않았을까 싶고요. 그중 ‘내가 옳은가?’ 하는 자기 의심이 유독 강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내가 옳은가?’를 포함해 ‘의미가 있나?’,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나?’, ‘재미가 있나?’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었죠. 그래서 한동안 글을 못쓰던 시간도 꽤 길었고요. 의심 속에서도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영화라는 게 이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는 거예요. 영화라는 상영본은 그저 이 모든 활동의 부산물인 거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가 끝난 지금까지도 이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어요. 저희에겐 지난봄이 여러 의미로 아름다웠거든요.이 영화가 공개된 후 어떤 반응을 마주할지 모르겠지만 무엇이 오든 딱히 무섭지 않아요.

이전에 연출한 작품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았나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죠. <너와 나>를 찍을 때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여기서 뭘 더 안 해도 되겠다. 이걸로 됐다’ 하는. 이번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가 살아났다고 느꼈어요. 내가 살면서 이 이상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고요.

깨끗한 만족이네요. 네. 근데 그것도 얼마 안 가요.

영화 <너와 나>를 만난 이후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친구가 많이 생겼어요. 좋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새로운 인연들을 만났고, 그들과 같이 작업하는 게 좋더라고요. 혼자 하기보다 여럿이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찍어가는 과정이 새삼 좋았어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생물학 책 몇 권을 접하게 됐거든요. 그 과정에서 공생이라는 개념,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종뿐 아니라 이 모든 생명체가 같이 호흡하며 살아간다는 것, 물질 세계 속 생물학적 호흡을 통해서든, 의식 세계 속 호흡을 통해서든 모든 생명은 양자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거시적으로 보면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스케일의 우주적 관점에서도 우리는 연결돼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유난히 행복하고, 지나치게 많은 돈을 벌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연결돼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을 누리는 만큼 어딘가에서 분명히고통이 있을 것이기에. 적당히 행복하게, 최소한의 것을 소유하며 조화롭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곧 부산에서 <너와 나>를 보게 될 관객들과 단 하나의 것을 나누고 싶다면요? 단 하나의 것…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나누고 싶어요. 깨끗하고, 예쁘고, 완벽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밉고, 추하고, 부족하고, 실수하는 것을 포함한 아름다움 그 자체를요. 저는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엮어나가기 시작할 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제 삶을 세월호라는 사건에 엮어놓는거죠. 이 영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 저희에게 세월호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의 이야기죠. 그럼으로써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관객들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감독으로, 배우로 오랜 시간 영화 안에서 살고 있습
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야기예요. 양자적 상호작용. 그것 말고는 세상을 설명할 길이 없더라고요. 모두가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가잖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심지어 아플 때 이야기를 하면 몸이 나아지잖아요. 아빠도 그랬거든요. 이야기하면 나아진다고.

이야기의 도구는 선택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근데 왜 영화를 하나… <너와 나>를 하면서 느낀 건 연기를 시킨다고는 하지만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아두고 촬영을 하고 있으면 현실에서도 그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현실인 거예요. 저희에겐 세미가 돌아온 것도, 돌아온 거죠. 나에게는 살아서 돌아온 거예요. 만약 누군가 세미같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가 이 영화를 본다면 그에게도 제가 받은 느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영화라는 것이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하고요. 누군가를 죽이고 때리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오늘은 감독으로서 만났죠. 배우로서 행하는 삶과 감독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내는 삶, 이 둘의 낙차는 좀 견딜 만한가요? 연기를 안 했으면 이 영화를 계속 끌고 나갈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어요. 글만 썼다면 영화를 어떤 방식이든 상업적인 면으로 풀어야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연기로 생계를 이어갔기 때문이잖아요. 연기가 쉽지 않은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다들 다 그렇게 견디면서 살고 있으니까. 저라고 ‘힘들어서 하기 싫어’ 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연기는 너무 나서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하자. 그 대신 하고 싶은 얘기는 꼭 해야 하는 성격인 것 같긴 해요. 유전인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어요.

어떻게든 해야 할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조금 개운
한가요? 지난 1년간은 개운했는데요. 이제 뭘 하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면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