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노마드> <하고 싶은 아이> <피터팬의 꿈> 등에서 불완전한 10대의 단상을 연기하며 영화의 세계에 빠져든 배우 김동휘. 스스로 프로의 무대를 제대로 경험한 첫 작품이라 말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했다. 멀고 거대한 목표를 성취하기보다 가장 가까이의 문제를 마주하며 성장하는 것이 그만의 방식이다.
관객에게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2022년 봄에 만난 작품이지만, 배우에겐 2019년 겨울의 영화일 거예요. 3년 전에 촬영한 작품이라고요? 맞아요. 2019년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촬영했어요. 정확히는 2년 반이 된 거죠. 저도 올해에야 이 영화를 꺼내 볼 수 있을지 몰랐어요.
꽤 오래전이라 기억이 흐려졌을 수도 있겠어요. 처음 ‘한지우’가 되던 날에 대해 어떤 기억이 남아 있나요?너무 생생하죠. 제작사 사무실에 가서 대표님이랑 감독님이랑 셋이 미팅을 했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제작사 대표님이 같이 하자며 종이 봉투에 시나리오를 넣어 건네셨어요. 가방도 없어서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걸 잘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에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마치 돈다발이 든 현금 봉투를 들고 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혼자 괜히 그랬던 거죠.(웃음)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이 단순히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기에 든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죠. 설렘이자 부담감이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에겐 모두 처음 있는 일이었거든요. 장편영화도 처음이고, 공개되지 않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온전히 받는 것도 처음이고, 심지어 주인공 역할이었으니까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의 설렘과 부담감은 촬영하면서 더 커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첫 촬영 날에는 떨리는 걸 넘어 아예 얼어 있었어요. 사람이 너무 얼면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더 집중해야 해’, ‘절대 민폐 끼치면 안 돼’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던 것 같아요. 최민식 선배님께 “동휘야, 너지금 너무 얼어 있는 것 같아. 좀 더 편안히 해보면 좋겠다”라는 조언을 듣고 나서야 제 상태를 인식하고 적응할 수 있었어요. 그 이후부턴 현장 가는 게 되게 즐거웠어요.
첫 장편영화라는 의미도 클 테지만, 경험과 내공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민식 배우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특별했을 것 같아요. 앞으로 연기를 하면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귀한 기회였고, 값진 경험이었어요. 친구들한테 ‘첫 등산부터 에베레스트를 올랐다’고말한 적이 있어요. 그만큼 최민식 선배님과 함께 연기하는 건 저에겐 말도 안 되는 거대한 도전이었고, 그래서 끝까지 해냈다는 사실에 무척 뿌듯해요. 이 작품 이후로는 현장에서 어떤 게 다가와도 꽤 의연하게 대처하게 된 것 같아요.
최민식 배우에게 연기를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어떤 형태의 배움이었나요? 배우로서 영화 작업을 할 때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소양이요. 예를 들면 현장 콜 타임이 아침 7시면, 딱 맞춰 가는 게 아니라 더 일찍 가서 현장의 공기를 체득하는 스태프와 융화되는 시간을 갖는 거죠. 이건 간단한 하나의 예시일 뿐이고 그 외에도 크고 작게 갖춰야 할 것이 아주 많아요. (최민식 선배님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부터 사람을 마주하는 방식까지, 영화 안팎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어요.
누군가는 여러 작품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경험치를 한 작품에서 체득한 셈이네요. 그렇죠. 고농축의 배움이었죠. 선배님의 경험치를 작은 캡슐에 담아서 ‘자!’ 하고 던져주시는 걸 받은 것 같다고 할까요? 현장에서 제가 “선배님은 제 멘토세요” 이렇게 말하면, “어휴, 집에가” 하며 손을 휘휘 저으시고.(웃음)
배우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두 발을 모두 들여놓았고, 근사한 멘토도 만났어요. 이제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중인가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개봉 후에 주변 사람들이 앞으로 목표가 무어냐고 묻곤 하는데, 사실 뚜렷한 목표는 없어요. 어떤 목표를 설정해두면 거기까지 가는 동안은 분명한 동력이 되겠지만 막상 이루거나 반대로 실패했을 때 오는 공허감이 있잖아요. 저는 한 가지 방향에만 매몰되고 싶지 않아요. 멀리 내다보지 않고 지금 맡은 작품만 생각하며 가려 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면 1년, 5년, 10년이 훌쩍 지나갈 테고 그 사이에 어떤 성장을 이룰 거라 기대하는 거죠.
지금은 어떤 작품에 빠져 지내는 중인가요? 드라마 <미씽: 그들이 있었다 2>를 촬영하는 중이에요. 망자들이 모인 영혼 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인물‘오일용’을 맡았어요. 지금 제 신경은 온통 이 사람에게 가 있어요. 복잡다단한 인물이라 어떻게 풀어내야 보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에요. 남은 한 해의 목표는 이 인물을 잘 표현해내는 거예요.
잘해내는 방식을 찾았나요? 대본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대사를 못 외워서 그런 게 아니라 대사와 대사 사이의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어서요. 저는 그걸 하얀 말이라 부르는데, 말을 하면서 취하는 태도나 표정 그 외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거죠.
드라마 <비밀의 숲>을 촬영할 때 대본이 찢어질 뻔한 적이 있다고요. 얼마나 보는 거예요? 작품 하는 내내 보고 또 봐요. 몇 달을 보다 보면 어느 날은 ‘그만 보고 싶다’, ‘이제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거든요. 그때를 제일 경계하면서 또 보고요.(웃음) 작품을 하는 동안은 스스로에게 좀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요. 그 공력이 큰 에너지로 발현되는 날이 올 거예요. 이 정도면 됐다 싶은 곳에서 멈추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누가 해도 무방한 것이 아니라 저만의 것을 하고 싶거든요. 그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했는데 결국은 작품을 성실하게 들여다보는 것이지 싶더라고요. 모든 건 시나리오 안에 있다고 믿는 거죠.
답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려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속 한지우와 같은 마음인 것 같아요. 닮은 점이 조금 있긴 해요.(웃음) 저도 지우처럼 문제가 있어야 정답도 있고 오답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시나리오를 문제라 생각하면 저는 여기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문제를 계속 바라보는 사람인 거죠. 해결이 아니라 해결의 방식이 궁금한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