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데뷔해 영화 <협상>과 <보이스 비>, 드라마 <런 온> 등을 거치며 연기의 세계에 점점 깊숙이 들어온 배우 김시은. 그는 첫 주연을 맡은 영화 <다음 소희>에서 콜센터 현장 실습생 ‘소희’의 아픔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담아내며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했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영화의 힘을 감지했다. 영화는 국경을 초월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함을 그는 이제 안다.
지난 5월 칸 국제영화제에 다녀왔어요. 스크린으로 <다음 소희>를 보니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저도 그날 처음 <다음 소희>를 봤어요. 지난겨울에 촬영한 영화를 처음 감상한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더라고요. 상영이 시작되니 저밖에 보이지 않았어요.(웃음) 아쉬운 장면도, 기대한 만큼 잘 나와서 뿌듯한 장면도 있었죠. 관객의 생생한 반응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어요.
상영이 끝난 후 7분간 기립 박수가 쏟아졌죠. 상영 전에 걱정이 많았어요. 콜센터로 현장 실습을 나간 고등학생 ‘소희’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의 사회적 상황과 정서가 짙게 배어 있는 실화 기반의 작품이라 해외 관객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칸의 관객들이 같이 웃고 울어주더라고요. 해외에도 수많은 ‘소희들’ 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상 깊었던 해외 관객의 반응은 무엇이었나요? <다음 소희>를 상영한 다음 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저에게 다가오시더니 너무너무 감동적이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상영 직후가 아니라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접한 관객의 반응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김시은 배우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브이로그에서도 관객들의 반응을 볼 수 있죠. 영상을 보며 본인이 직접 만들었을 거라 짐작했어요. 맞아요.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는 일이 인생에 여러 번 찾아오지는 않을 테니 기록을 남기고 싶었어요. 영상 편집을 독학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만들어봤죠. 그런데 저 유튜브 채널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열심히 찾아봤죠.(웃음) 구독자가 예상보다 적어 놀랐어요. 더 많은 이들에게 채널을 알리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칸에서 경험한 일에 많은 분이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과 <다음 소희>를 진심으로 아끼는 분들만 제 채널을 비밀스럽게 찾아와주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해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 특별한 날이라면 제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요. 오늘처럼 화보 촬영을 하거나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가는 날도 담으면 좋을 것 같아요.
때마침 <다음 소희>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의 오늘_ 파노라마’ 섹션에 초청되었어요. 우리나라 관객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해요. 떨리니까 관객 사이에 숨어서 보려고요.(웃음)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공식적인 자리가 마련된다면, 그때 <다음 소희>의 배우로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다음 소희>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소희와 그가 겪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다음 소희>가 잘 완성될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되었어요. 소희와 가장 어울리는 배우가 정주리 감독님의 선택을 받기를 바랐고요. 제가 소희 역으로 감독님과 미팅한 첫 번째 배우였는데, 편안하게 대화를 몇 마디 나눈 후 헤어지기 전 감독님이 저한테 “다음에 만나면…” 이라며 두 번째 만남을 기약하셨어요. 제가 소희를 연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죠.
정주리 감독이 김시은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전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려 하는 편인데, 그 이 면에 있는 어려움을 감독님이 감지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누구나 그렇듯 제게도 감추고 싶은 어떤 면이 존재해요. 완벽하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한테 들켜버린 거죠.(웃음) 저에 대해 바로 알아봐주셔서 더 믿음이 생겼어요.
김시은 배우의 집중력에 대해서도 칭찬했죠.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콜센터에서 일하는 장면을 찍을 때, 제가 다른 배우와 실제로 통화하며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식으로요.
타고난 기질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요? 사소한 것에 순간적으로 몰입하거나 지나치게 고심할 때가 많기는 해요. 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기질인 듯해 고쳐보려고도 했는데, 한편으론 연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희를 연기할 땐 어땠어요? 아픔을 지닌 인물이라 촬영이 끝나면 그에게서 빠져나오는 게 중요했을 것 같아요.연기할 땐 소희인 것이 맞지만, 영화 바깥의 삶은 시은이로 지내도 된다는 감독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되었어요.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 중 소희한테 유난히 더 집중한 것 같아요. 시나리오에 표현된 소희로만 연기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거든요. 실화와 관련한 자료를 최대한 많이 찾아서 보되, 그 정보를 인지만 하려고 했어요. 실제 사건에 대해서는 김시은으로서 알고 있고, 소희가 되어 연기할 땐 철저히 작품만을 따른 거죠.
시나리오 속 소희를 어떤 사람으로 이해했나요? 소희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에요. <다음 소희>를 만들어가며 소희와 형사 유진이 닮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보다 나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소희는 유진처럼 정의롭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갔을 거예요.
<다음 소희>의 전반부는 소희, 후반부는 유진의 이야기로 이뤄져 있죠. 소희를 연기한 배우로서 후반부를 감상한 마음이 남다를 것 같아요. 유진이라는 사람 자체에,그리고 그가 포기하지 않고 소희의 일을 다뤄주었다는 점에 감사해요. 소희와 유진의 이야기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질 수 있기를 바라요. 조금이라도 더, 이전보다 나은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다음 소희>가 세상에 꼭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한 게 떠오르네요. 어떤 영화를 만나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관객의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통해 낯선 감정이 불쑥 찾아오거나, 스스로 가늠하지 못한 심리를 정의하게 될 때도 있을 테고요. 이게 영화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관객이 아닌 배우로서 느끼는 영화의 힘은 조금 다를 것 같아요. 맞아요. 배우에게 영화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은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요. 삶의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고,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래서 현장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해요.
최근 현장에 함께한 사람에게 들은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곧 공개될 새 영화의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때, 감독님이 제게 은밀하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넌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야.” 담백하지만 강렬한 그 한마디가 마음 깊이 와닿았어요.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해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문할 때마다 ‘단단한 사람’ 이라는 답을 얻었거든요.
단단한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갖춰야 할까요?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해야 해요. 앞으로 마주할 여러 선택에 흔들리지 않고, 제 앞에 펼쳐진 길에 최선이라는 발자국을 남기며 나아가고 싶어요. 배우를 넘어 한 명의 인간으로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