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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전국 투어 <DOCKING>과 연말 콘서트 <뒤끝>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죠. 이 중 의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 <이승윤 콘서트 도킹: 리프트오프>가 곧 개봉 합니다. 공연 당시를 돌이켜보면 어떤 순간이 기억에 남나요?
무대에 서기 위해 리프 트에서 내린 뒤 객석을 바라봤을 때, 처음으로 제 공연장에서 응원봉이라는 걸 봤어요. 오래도록 준비해왔지만 그 순간 ‘도킹’이라는 전국 투어 프로젝트가 제 앞에 왔음을 실감했죠.

공연 실황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현장감을 살리고 싶었어요. 공연장의 앰비언스(음이 퍼지는 공간감)를 생생하게 담고 싶어 여러 시도를 거듭했죠. 공연 당시에는 영화 개봉까지 생각하지 못해서 관객의 소리를 충분히 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다른 공연에서의 현장음을 일부 사용했어요. 도킹 때 관객들이 떼창을 잘 못하셔서 오히려 제가 배려한 거라고 볼 수 있고요.(일동 웃음) 실제 공연에서는 잠깐의 정적이나 여백이 있을 수 있는데, 영화에선 바로 몰입할 수 있도록 흐름을 더 타이트하게 가져가려 했어요.

이승윤의 공연에는 최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해요? 비절제 구간이요. 절제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로 다 같이 작정하는 순간. 공연 초반에는 관객들이 서로 배려하며 텐션을 조절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말로 하지 않아도 ‘이렇게 놀면 모두가 행복하겠구나’ 하고 다 함께 느끼는 순간이 있어요. 그때 음악 안에서 우리의 에너지가 한데 모이고 있음을 직감하죠. 이런 시간을 만들기 위해 저도 최선을 다해 몰입하고요.

현재 3집을 준비 중이에요. 1집과 2집을 내던 시기와 지금의 이승윤 사이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이전엔 ‘잘해야지’ 하고 생각했다면 이번에는 ‘승부다’라는 마음이 들어요. 지금까지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면, 이번에는 잘하는 것 그 이상을 바라고 있어요. 이승윤이라는 음악인의 여정에 승부수를 띄우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웃음)

새 앨범을 작업하며 몰입하는 화두는 무엇인가요?
분수라는 단어에 꽂혀 있어요. 제 소신 중 하나가 ‘분수를 알고 그것을 지키며 살자’거든요. 이번 앨범으로 나의 분수가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합니다.(웃음) 이승윤이라는 사람의 분수가 어마어마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저 나를 멋지게 보여주겠다는 마음이에요.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장치를 뜻하는 분수처럼요.(웃음)

한 인터뷰에서 “나는 생의 모든 단계에 놓인 마음을 한 번씩 손보며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싶다”라고 말했어요. 지금의 단계에서 이승윤은 어떤 방식으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고 있나요?
안정적인 일상을 원한다기보다는 긴 생애를 돌아볼 때 제 삶 자체에 균형이 있길 바라요. 그런 맥락에서 지금은 자의식 과잉을 할 때라고 봅니다.(웃음) 예전엔 ‘나이 들어서 후회할 가사는 쓰지 말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지금 아니면 언제 후회해’ 싶은 거죠. 인생에 이럴 수 있는 시기가 얼마 안 된다고 보거든요. 아무것도 몰라서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자의식을 분출하는 때가 있고,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뒤 다시 한번 마음먹는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보고요.

진정으로 나를 보여줄 순간이 되었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그렇죠. 아까 분수 이야기도, 승부수를 띄운다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이승윤의 음악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을 한 가지 꼽자면 무엇일까요?
크레디트요. 혼자서는 못 만들어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음악을 만드는 일이 쉽진 않지만요. 매일 삐치고 투정 부리고 다투고 화해하고 또 싸우기를 반복하고 있어요.(웃음)

그럼에도 타인의 힘을 믿게 되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관계라는 건 결국 조건을 기반으로 맺어져 있잖아요. 그런데 무조건적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관계가 지닌 조건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 순간. 그때 타인의 힘을 믿게 돼요.

그런 순간이 주로 언제 찾아와요?
음악에 몰입할 때 자주 마주해요. 엄밀히 말하자면 팬들과 저의 관계도 조건부일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음악 안에서 마주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앞서 말한 ‘비절제 구간’이 찾아올 때 서로를 향한 마음이 무조건부일 거라 착각하게 된단 말이죠.

왜 유독 음악 안에서 그런 순간을 만날 수 있는 걸까요?
일상 속 대부분의 시간은 이해타산을 중심으로 흘러가잖아요. 면 대 면을 비롯한 물리적 만남에서 더욱 그런 것 같고요. 하지만 음악 안에서의 만남은 실재하지만 추상적인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듯해요. 음악가가 노래를 만들면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을 때 언제 어디서든 그것을 찾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듣고 싶은 마음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기만 하면 음악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물리적 만남보다 더욱 자유롭게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면에서 음악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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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이라는 뮤지션은 정형화된 틀이나 규정에서 멀어진 채 독자적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장르가 이승윤’이라는 말이 있듯이요. 하지만 틀이라는 건 때론 아늑한 울타리가 되기도 하잖아요.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모두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결국 다 잃어버리고 흩어질 거라고 생각하기에 두려움이 덜한 것 같아요. 전 틀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지만 틀 자체도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하거든요. 그럼 그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요. 나를 둘러싼 수식이나 규정 자체도 온전하지 않을 텐데, 그 안에서 살면 뭐 어떻습니까.(웃음) 움켜쥘 수 없는 것 때문에 아등바등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마음뿐이에요.

그럼 이승윤은 주로 언제 자유롭다고 느끼나요?
내가 내뱉은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요. 그래서 어려워요.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고, 단정 짓고 싶지 않거든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서 매일 말하면서 살아야 하잖아요. 내가 한 말을 돌이켜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내가 자유롭게 사유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편이에요.

2집 앨범 소개에 ‘염세를 알아야 진짜 이상을 꿈꿀 수 있다’라는 글귀를 담았어요. 이 문장은 어떤 마음으로 적었어요?
염세도 결국 이상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 문장을 통해서 꿈과 이상만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었고요.

이상이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지만 염세 또한 만만찮게 강하잖아요. 염세나 비관에 지지 않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엄청 지는데요….(일동 웃음)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저는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거든요. 오로지 꿈 혹은 염세만을 말하는 어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세상엔 꿈도 희망도 염세도 비관도 있으니 매 순간 잘 선택하며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희망과 비관을 모두 마주하며 겪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염세에 지지 않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끝도 없이 온몸으로 부딪히는 거죠. 땅속을 파고 들어가고 또다시 나오기를 반복하면서요.(웃음)

그 과정에서 희망을 찾은 적도 있나요?
최근에 영상 하나를 봤어요.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운동장부터 복도, 교실, 체육관까지 시리얼 박스를 도미노처럼 세우고, 그것이 쓰러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보여주는 영상이었어요. 아이들이 구간별로 옹기종기 모여 시리얼 박스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느꼈어요.

어떤 맥락에서요?
사실 도미노라는 것도 아무 의미 없잖아요. 그냥 세우고 쓰러뜨리는 거니까요. 제가 하는 음악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도미노를 세우고 넘어뜨리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겠죠. 하지만 시리얼 박스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무척 기뻐하듯이 내가 하는 음악도 도미노 하나만큼의 의미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것이 이승윤이 음악을 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겠죠?
맞아요.(웃음) 아무리 쓰러져도 다시 세우면 되니까요. 도미노가 부딪히고 넘어지며 탄생하는 그 예쁜 순간을 자꾸만 보고 싶어서 계속 음악을 하는 것 같아요.

니트 톱과 팬츠, 킬트, 양말, 부츠 모두 Dior Men.
트렌치코트와 셔츠, 쇼츠, 샌들 모두 Dries Van Noten, 브레이슬릿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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