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양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 자체가 내 고유함임을 깨달았어요.”
연기 안에서 살아보고 겪어내고 또 이해하며 부단히 확장되는 것. 배우 임수향이 자신의 고유성을 널리 퍼뜨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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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녀와 순정남>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몸이 한 10개는 있으면 좋겠어요.(웃음) 방영 초반인데 찍어둔 분량이 많지 않아서 생방송 하듯 진행 중이에요.

  

<미녀와 순정남>은 50부작이라는 긴 호흡을 이어가는 드라마예요. 그 시작점에서 어 떤 마음을 품고 있나요?

회차가 많은 작품은 오랜만이라 새로운 마음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미니시리즈는 하나의 스토리를 함축해 심도 있게 풀어가는 데 반해 50부작의 가족드라마는 사건이 꾸준히 발생하고 나중에는 시청자도 캐릭터에 정이 들어요. 제가 맡은 ‘도라’는 톱 배우인데, 스캔들을 겪고 재기하는 인물이에요. 도라가 앞으로 무수한 일을 마주하고 헤쳐나가야 할 텐데, 몸과 마음의 힘을 어떻게 적절히 안배해 풀어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배우로서 배우를 연기한다는 점에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님께 도라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여쭤본 적이 있어요. 도라는 자신을 둘러싸고 계속 부풀려지는 이야기 때문에 한순간에 밑바닥으로 추락하거든요. 작가님은 도라 를 통해 SNS에서 퍼지는 루머나 가짜 뉴스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쉽게 망가 뜨릴 수 있는지, 그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 지점 에 대해 깊이 고민했죠. 저도 배우로 활동하면서 억울하다고 생각이 든 순간이 있고, 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이 사람 이렇대’라고 말해도 내가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믿지 않으려고 해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와전 되기 십상이고 그 파급력이 엄청나니까요. 연기하며 도라를 닮아가거나 도라에게 배우고 있는 부분도 있어요? 아직은 도라가 밝은 상태여서 저도 요즘 텐션이 높아요. 도라는 단순한 캐릭터거든요. 싫으면 싫고, 좋으면 너어어무 좋아해요.(웃음) 화를 냈다가도 ‘내가 잘못했네’ 싶으면 바로 사과하고요. 저는 걱정도 많고 무슨 일이든 곱씹어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순간순간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며 투명히 드러내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한 인터뷰에서 연기하는 동안 작중 인물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어요.

맞아요. 배역에 깊이 몰입하는 편이에요. <신기생뎐>의 ‘단사란’이나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오예지’ 같은 차분하고 현명한 여성을 연기할 땐 제가 더 단단해졌어요. 대 본을 읽으면서 부드럽게 거절하거나 명확하게 의견을 밝히는 방법을 배웠고요. 이후에도 무언가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 이 인물을 꺼내보기도 해요. 반대로 인물의 부정적인 부분이 배우 안에 들어올 수도 있겠어요. 그럼요. 가능한 좋은 영향만 받으려고 하지만, 살인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인물을 연기하면 정신이 피폐해져요. 장례식 장면을 찍는다든가 인물의 역경을 그려내야 하는 때에는 진이 다 빠지죠. 감정 소모가 크니니까요.

  

인물을 겪어내는 과정에서 소진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임수향만의 방법도 있나요?

일단 많이 먹어야 해요.(웃음) 음… 그럴 때야말로 배역과 나를 분리해야 하지만, 좋은 연기를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인물을 삶 안에 들이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봐요. 그럼 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꾸준히 나를 찾아야 한다는 거예요. 나를 중심에 두기 위한 힘은 어디에서 찾는 편이에요? 가족, 친구, 같이 일하는 (회사) 식구들에게 힘을 얻어요. 특히 친구들이 저를 원래의 자리로 끄집어내줘요. 친 한 친구들은 저를 연예인이라 생각하지 않거든요. 메이크업하고 나타나면 “맞다, 너 연예인이었지!”라고 말할 정도로요.(웃음) 유명해졌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다 나에게 잘해주거나, 배우로서 작중 인물에 몰입하다 보면 사람이 변할 수도 있잖 아요. 그런데 친구들은 저를 임수향이라는 사람 자체로 대해요. 늘 “야, 초심을 지켜” 하면서요.(웃음) 그러면 다시 본연의 저를 찾게 되더라고요.

    

주변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관계에서 힘을 얻는 편인가 봐요.

맞아요. 내 얘기를 이렇 게 많이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의지해요. 사실 그게 내 약점이 될 수도 있잖아요. 누군가 맘먹으면 악용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설령 이게 내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더라도, 그저 말하는 것만으로 해소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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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할 수 있는 건 타고난 성정이에요? 그걸 어려워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여러 사람의 의견과 반응을 듣는 걸 좋아해요.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지 주변에 물어본 뒤 결정하는 편이고요. 예를 들어 제가 오늘 화보를 찍으면서 얼굴에 주근깨를 찍었잖아요. 그럼 스태프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물어봐요. “어때?” 하고요.(웃음) 이런 모습이 자신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여러 사람의 생각이 모이면 그게 대중의 의견이 될 거라고 봐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임수향 안에 굳은 심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음…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 확신을 품고 있다면 모든 일을 쉽게 결정했겠지만, 늘 어려워요. 누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것 같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 같아요. 한때는 명확한 취향과 확고한 자아를 지닌 사람이 부러웠어요.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을 좋아하는 분이 많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임수향’ 하면 떠오르는 게 뭘까 싶어서 주위에 물어보니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더라고요. ‘내가 지닌 고유함은 뭐지?’ 싶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아서 슬펐고요. 이 지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죠.

  

그 시간을 거쳐 찾아낸 것이 있나요?

나는 다양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 자체가 내 고유함이라는 것이요. 모든 사람이 한 가지에만 몰두할 필요는 없잖아요.내가 좋아하는 것이 모여 임수향이라는 사람이 되겠구나 싶었죠. 나는 다양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 자체가 내 고유함이라는 것이요. 모든 사람이 한 가지에만 몰두할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모여 임수향이라는 사람이 되겠구나 싶었죠.

  

많은 것을 품을 수 있기에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온 것이 아닐까요. 2011년 <신기생뎐> 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 해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왔잖아요.

저는 그냥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 봐요. 일을 안 하면 더 우울해지는 편이에요.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 때도 있지만, 더 큰 스트레스는 연기를 하지 않을 때 찾아 와요. 연기하고 싶은데 일이 없을 때, ‘딱 하나만 시켜주면 잘할 수 있는데’라고 생 각했어요. 그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하죠.

  

슬럼프가 오거나 그만두고 싶은 순간은 없었어요?

물론 있었죠. 아무리 연기가 좋아도 지칠 수밖에 없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연기가 아닌 다른 것을 해서 더 행복할 수 있다면 이 일을 그만두자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전 연기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더라고요. 더 마음이 가는 일을 아직 찾지 못했고요. 열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좋아하나 봐요.

  

어떤 지점에서 연기가 그렇게 좋아요?

연기를 할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우린 매 순간 절제하면서 살고, 대놓고 감정 표현을 하기도 어렵잖아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마구 울거나 소리 지를 일도 없고, 이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랑을 할 일도 드물어요. 하지만 연기를 할 때는 다채로운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어요. 나를 잠시 저 멀리에 던져둔 채 작중 물에 몰입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거죠. 내가 모르는 인물의 삶을 살아내고, 경험해보지 못할 일을 몸소 체험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 안에서 여러 인물을 겪어내다 보면 타인을 이해해보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나요?

연기를 하면서 제가 꾸준히 넓어지는 듯 해요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이 있고, 삶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음을 배우거든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서 누군가에게 화를 낼 일도 줄었어요. 물론 세상에는 사회규범이 있고, 기본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죠. 하지만 연기하던 습관 때문인지 ‘저 사람은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을까?’, ‘저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보기도 해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계속 확장되고 있나 봐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해의 폭을 한정하면 나와 비슷한 인물에만 몰입할 수 있어 연기하기가 어렵거든요. 열린 마음으로 있어야 대본 속의 이야기들이 제 안에 들어오더라고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작품 안에서 여러 인물을 마주하며 나아갈 배우 임수향의 생이 먼 훗날하나의 이야기로 그려진다면, 그것이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요?

진정성이 있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걸 추구하며 살기보다는 그저 제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길 바라요.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한 가지를 명확히 좋아하기보단 다양한 것을 수용하고 싶거든요. 매 순간 진심으로 살다 보면 그때그때의 임수향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을까요?

  

재킷, 팬츠, 스커트, 벨트, 슈즈 모두 Prada.
프린지 드레스 Maison R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