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 가운데서 만난 배우 구교환의 영화적 순간. 영화 <탈주>로 돌아온 배우 구교환과 보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하루.


링과 네크리스, 하프 스타킹, 롱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링과 하프 스타킹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화 <모가디슈>가 개봉하고, <D.P.> 시즌 1이 공개되던 여름에 만났었죠. 다시 여름이네요.
3년 전이죠? 그 촬영 되게 만족스러웠거든요. 꽃을 물고 있는 모습이 제 시그니처처럼 자리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도 꽃을 물었잖아요?
디렉터님이 제안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요. 저는 오늘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웃음)
아… 그럼 이게 약간 초자연적인 현상인 거예요.(일동 웃음) <마리끌레르>와 구교환이 만나면 꽃을 부른다!
오늘은 몸을 많이 쓰는, 움직임이 큰 화보였잖아요. 컨셉트를 너무나 빠르게 이해하고 구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구교환 감독님이다. 감독님만이 이해해주는 거다’ 하며 즐거워했어요.
밖에 나왔는데 안 뛰어놀면 의미가 없잖아요. 공간을 넓게 쓰는 게 이 화보에 유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막 해도 잘 만들어주실 거잖아요. 헿헿
3년 사이 필모그래피를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했어요.
기회가 되면 작품을 계속하려고 했어요. 억지로 작품을 찾아다닌 건 아니에요. 궁금하거나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만나면 크게 셈하지 않고 했어요.
조금 전 디지털 콘텐츠 촬영인 밸런스 게임에서 ‘술래잡기에서 진짜 빠른데 길치인 술래 vs. 느린데 길을 다 아는 도망자’ 중 빠른 길치를 선택했잖아요?
그러네! 길치처럼 작업해요. 근데 어떻게 보면 속도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더 정확히 이야기 하면 동네 한 바퀴. 동네 걷는 거 참 좋거든요. 여행이나 로케이션 헌팅 할 때도 웬만하면 지도 앱 끄고 그냥 돌아다녀요. 발길 닿는 대로.
그 성향이 필모그래피에도 고스란히 담기는 거죠?
맞아요. 시작하지 않은 작품을 두고 어떨 것이다 하고 판단하거나, 그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잖아요. ‘내가 재미있으면 된다.’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 선택들을 모아보니 제 성향도 드러나는 거 겠죠. 오늘 화보 찍을 때도 되게 재밌었거든요. 그런 작업을 찾으려고 해요. 내가 즐길 수 있는 작업이요.

“저도 제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빅 팬이거든요. 만드는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면 즐기면서 작업하게 돼요. 팬심은 못 이기거든요.”

이제훈 배우와 함께한 영화 <탈주>가 7월 3일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배우 구교환의 연기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애매함 또는 삐끗함에서 오는 반짝임이 있죠. 반면 예고편에서 본 ‘현상’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공고해 보여요. 이 빈틈없는 캐릭터에 관객들이 어떻게 ‘구’며들지 기대되고요.
현상은 ‘북한을 벗어나려는 병사 규남(이제훈)을 잡는다’는 목적 의식이 뚜렷한 인물이에요. 지금까지 임했던 인물 중 목적이 가장 분명한 캐릭터일 거예요. 목적 안에서 변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기본 뿌리는 잡고 가야 하고요. 스트레이트하게 가는 와중에도 영화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삐끗거림을 저 혼자 몰래 심어놨어요. 문득문득 현상의 표정을 통해 그의 공적인 부분 외의 것을 발견 하는 재미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상을 두고 페노메논(phenomenon), 현상적인 인물이라고 자주 농담하는데… 농담입니다.(웃음)
이종필 감독님이 팬픽처럼 ‘현상’에 대한 서브 텍스트를 써주셨다고요.
굉장히 사변적인 글이었어요. 현상의 브이로그를, 그의 일기를 훔쳐보게 해주셨어요. 영화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었어요. 모든 감독님이 그렇겠지만 이종필 감독님은 <탈주>라는 영화의 가장 큰 팬이신 것 같았어요. 저도 제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빅 팬이거든요. 만드는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면 즐기면서 작업하게 돼요. 팬심은 못 이기거든요.
이종필 감독님이 어디선가 ‘현상은 현재 굉장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탈주가 필요한 인물이 아닐까?’라는 말을 했어요. 규남이 물리적인 탈주를 한다면, 현상은 그를 쫓는 과정에서 내면의 탈주가 이뤄지는 것일까 짐작하게 됩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해요. 한데 그 내면의 탈주라는 것을 보편적인 감정이라 생각하며 접근했어요. 거창한 이념이나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일 앞에서 때로는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잖아요. 자장면을 먹고 싶은데 누군가 파스타 먹으러 가자고 하는 순간 같은. 그때 ‘아, 정말 자장면 먹고 싶다. 하지만 따라야겠지’ 하는 식의 보편적인 감정이었어요. 다른 무엇보다 추격만 있으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추격에만 집중한 인물이라면 제가 그렇게 크게 이 인물에 관심이 가지 않았을 것 같아요.
요즘 탈주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무엇으로부터 탈주하고 싶나요?
탈주하고 싶다기보다는… 잡으러 가고 싶은 것이 좀 많네요?(일동 웃음) 잠깐 홍보! 올해 제 장편영화를 크랭크인 할 예정이에요. 그 시나리오를 잡으러 가고 싶고…. 잡으러 가고 싶은 음식도, 갖고 싶은 것도 많아요.
역시 술래네요.
저는 술래 타입이에요. 근데 되게 나태한 술래. 안 잡아도 돼~. 술래가 마음 편해요. 쫓기는 입장이면, 규남이면 너무 고통스럽잖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요. 근데 술래는 잠도 자고 밥도 먹을 수 있어요.

잠깐 홍보라고 했지만 틈틈이 다음 연출작을 준비했군요.
최근 배우로서 작품에 참여하는 일이 더 많았는데 이 작업은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박아버린 거예요. ‘올해 안에 내 작품 꼭 크랭크인 할 거야’ 하고 떠벌리고 다녔어요. 시나리오 수정 중인데 재미있어요. 연기하고, 연출하는 이 밸런스가 잘 맞아요. 연기하다가 시나리오 쓸 생각하면 또다시 채워지고, 쓰다가 답답하면 연기하는.
“안 하는 것도 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스트레스 받고 고민하고 있는 시간도 작업하는 시간이에요. ‘해야 하는데’ 하고 외면하는 것 도 하고 있는 거예요.” 백상예술대상 영상 인터뷰에서 남긴 이 말에 전국의 마감 노동자 수십만 명이 ‘좋아요’를 누른 거 알고 있 죠? 마감에 절절히 고통받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당시 마감 중이었나요?
맞아요.(일동 웃음) 클라이언트가 있었고, 제출 기한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당시 제 태도가 고스란히 반영된 거 맞아요. 지금 당장은 시나리오 수정본을 보내야 하는 마감이 있어요.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여기서 화보를 찍고, 인터뷰 하는 것도? (잠시 정적) 작업하고 있는 거예요.(일동 웃음) 배우도 마감이 있어요. 내일 슛 들어간다고 하면 그게 마감이잖아요. 장면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 또한 안 하는 것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무적이에요. 제가 오늘 나눈 대화에서 영감을 받고 대사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결국… 뭐, 다 좋게 생각하자는 거죠. 좋은 게 좋은 거다.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데 좋게 생각하려고 하는 건 작업에 먹히면 위험하니까. 영화가 수단이 되면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이 모든 일이 재미있는 것이라 생각하려 해요. 실제로도 재미있고요. 반반 적당히, 세미로 살자.
평소에도 연출과 연기에 대해서 ‘일 반, 놀이 반’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잖아요. ‘2분의 1’ 정신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은 뭔가요?
딴딴하게 채워져 있으면 팍 하고 부러져요. 반은 타이트하게 준비하고, 반은 열어놓는 게 저에겐 잘 맞아요. 제가 존경하는 훌륭한 배우들 중에는 완전히, 완벽하게 준비하는 분들도 있어요. 스포츠 선수들도 각자의 루틴이나 경기 방식이 다르듯 각자에 맞는 작업 방법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한데 필요하다면 어느 장면에 한해서는 완벽하게 준비해 갈 수도 있는 거죠. <꿈의 제인>의 연설 장면처럼 준비를 많이 하고 임한 장면도 있어요. 전체를 장악하지 않는 선에서 간헐적으로 완벽하게 준비하는 거죠.

“영화가 수단이 되면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이 모든 일이 재미있는 것이라 생각하려 해요. 실제로도 재미있고요. 반반 적당히, 세미로 살자.”

절반의 여유를 두고 유연하게 연기하기 위해서는 내 쪽에서 먼저 경직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어요.
경직되지 않기 위해 감정적인 스트레칭을 계속하죠.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인데 ‘쫄지 말자’가 가장 중요해요. ‘목적만 정확하다면 뭘 해도 괜찮다, 오답은 없다’고 믿어요. 이런 창작 분야에서는 더더욱요.
여러 상황을 열어놓고 작업하는 방식은 때로 결과의 낙차를 감당해야 하기도 하죠. 이는 어렵지 않나요?
어려워요.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닌데, 중요하기도 해요. 거기까지는 완벽하게 세미 정신을 도입하진 못했어요. 아아악. 과정이 즐거웠으면 하고, 결과까지 좋았으면 해요. 많은 분들이 보길 원해요. 안 봤다고 원망하지는 않지만 저만 혼자 갖고 있고 싶지 않아요. 어떤 방식이든 많은 사람이 제 작업을 봤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그래서 이달 <마리끌레르>도 다 팔렸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했으면, 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혼자 갖고 있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관객 혹은 유저들과 만나려고 하는 거니까.
올여름은 많은 관객들과 만나게 될 거예요. 이 계절을 어떻게 보낼 예정인가요?
<탈주>와 함께 뜨겁게 보낼 것이고, 사이사이 장편영화 프리프로덕션을 하겠죠. 어디서 찍을지 로케이션 헌팅도 하고, 시나리오 수정도 하고, 배우 캐스팅까지 재미있는 작업만 남았어요. 열심히 수정 중입니다.
가장 좋았던 여름의 기억이 있다면요?
좋아한 여름이 많은데. <로미오: 눈을 가진 죄>라는 단편이 있어요. 대만 영화제에 가는 김에 거기서 촬영을 하자고 계획했어요. 하루 이틀 뒤가 출국이었어요. 그때까지도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에서 연남동 경의선숲길공원의 한 벤치에 앉아 이옥섭 감독과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정말 꿀잠이었거든요. 얼굴이 타는 줄도 모르고 잠이 든 거죠. 일어났을 때 해가 멀리 걸려 있는 매직 아워 같았어요. 보통 그렇게 잠들었다 일어나면 기분이 굉장히 찜찜한데 이상하게 개운했어요. 결국 <로미오: 눈을 가진 죄>는 만들어졌고요.
회피한 채 낮잠을 자는 시간도 하는 시간이니까요.
그럼요. 그래도 영화는 만들어진다.
마무리할까요. 영화와 무관하게 요즘 가장 애호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예쁜 양말들을 좀 사고 있어요. (바지 밑단을 살짝 들어 도트 무늬 양말을 보여준다. 일동 탄성) 헿헿, 신발 신으면 안 보이거든요. 내 속의 은밀한 취향. 귀여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