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민트> <호프> 그리고 <가능한 사랑>까지. 압도적 성취의 여정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배우 조인성의 겸허.

브라운 레더 재킷과 레이어링한 브라운 재킷 모두 Lemaire, 슬리브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계속 불편한 옷을 많이 입으려고 해요. 그렇게 해서 다만 10%라도 변하게 하는 것, 거기서 지속 가능한 배우의 모습이 나오는 것 같아요. 단언하지 않고, 쉽게 보지 않는 것, 그게 좋은 배우로 가는 길인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이제 막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발견한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영화 잘 봤습니다.” 올해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은 배우가 아닐까 싶어요. 어떤가요? 재미있게 잘 봤다는 말이 배우에게 어떤 감상으로 다가오는지요.

진심인가 싶기도 하고.(웃음) 진심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수고했다는 말처럼 들려요. 더 고생하라는 뜻인가 싶기도 하지만요.(웃음) 어떤 뜻이든 감사한 마음이에요. 올해는 오랜만에 관객과 원 없이 만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박수도 받고 응원도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얻은 힘을 재룟값으로 다시 다음 작품에 쏟아내야겠다, 그 정도 생각만 해요. 대단한 찬사를 받아도 확대해석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칭찬은 칭찬대로 받고, 발전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건 다시 생각해보고,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도 구분을 하고. 그렇게 좀 심플하게 한 해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 태도가 유독 도드라지는 장면이 있어요. <호프>로 칸영화제에, <가능한 사랑>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와 토론토 국제영화제 갔을 때, 들뜨지 않으려는 평정한 모습이 눈에 띄었거든요.

여유 있어 보인다고 얘기들을 하시는데, 실제로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간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다,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물론 굉장히 특별한 순간이지만, 그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저 순간순간을 잘 느끼자, 말하자면 관찰하는 느낌으로 있었어요. 언제 또 칸에, 베니스에 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 실컷 구경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있었죠. 다만 경쟁 부문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에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어요. 경쟁이라는 게 아무래도 긴장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받았을 때의 희열은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값졌고요. 내심 황금사자상을 바란 것도 사실이지만.(웃음) 어쨌든 너무 나의 작품, 그 안의 나만 보려고 하진 않았어요. 그러다 보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겠다 싶어서, 옆집 구경하듯이 조금은 멀리서 보려고 했죠.

<휴민트>부터 <호프> 그리고 곧 국내에 공개될 <가능한 사랑>까지, 올해의 배우를 묻는 질문에 모두가 여지없이 ‘조인성 배우’를 말합니다.

특히 운이 좋았던 건 이창동, 류승완, 나홍진이라는 대단한 감독님들의 세계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그게 올해의 성취이지 않나 싶어요. 올해의 배우라는 건 당연히 감사한 일이죠. 다만 앞서 말했다시피 고생했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이려 합니다.

블랙 레더 코트와 스트라이프 셔츠, 브라운 팬츠, 타이 모두 Amiri.

개봉 순서대로 <휴민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류승완 감독님이 처음과 끝에 자신의 집이 아닌 공간에서 깨어나고 잠드는, 노골적인 수미쌍관 구조를 쓴 건 처음인데, 그게 가능했던 건 ‘조 과장’이 ‘조인성 배우’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배우에게 이토록 강한 확신을 가지는 건, 단순히 작품을 여러 번 함께 했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하잖아요. “저 좀 믿어주세요. 믿고 가시죠.” 그런데 처음 만난 사이에서 믿음을 전제하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에요. 일을 해봐야 믿을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류 감독님과 같이 해본 경험이 있어서 생긴 믿음이라 생각해요. <모가디슈>를 하면서 4개월간 모로코에서 동고동락했고, <밀수>에서는 그 어려운 액션 시퀀스를 같이 만들어간 전우애가 있으니까,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어떤 확신이 서로에게 작용하는 거죠. 그 신뢰 덕에 감독님이 조 과장으로 시작해, 조 과장으로 끝나는 구조를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그와 반대로 배우 역시 류승완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 같아요. 혹은 <휴민트>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고요.

작품보다는 류승완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컸죠. 물론 그것은 반드시 작품으로 귀결되기도 하고요. 결국 감독과 배우 사이는 ‘믿을 구석’이거든요. 외로운 현장을 같이 갈 동료를 원하는 거예요. 어려운 일 할 때 마음 맞는 친구 하나 같이 가면, 그렇게 편할 수 없잖아요. 영화 만드는 일이 그런 과정이라 생각해요. 특히 감독님과는 더 깊숙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가 된 것 같아요. 어때? 괜찮아? 단순한 말이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신뢰가 있어야 물어볼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관계였기 때문에 기꺼이 같이 고생길을 걸어오며 작품을 만든 것 같아요.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어떤 감상이 들었나요? 고생길을 함께 거치며 만들어낸 작품, 그 안의 조 과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굉장히 만족스러웠어요. 저의 또 다른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고요. 최근 몇 년간 감정을 굳이 밖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드러낼 수 있는 힘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을 계속 연습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휴민트>라는 작품을 만나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게 이번 작품으로 얻은 성과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레이 롱 코트와 그레이 셔츠, 팬츠, 브라운 스퀘어 토 더비 슈즈 모두 Ami.

<휴민트>는 액션 신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그리고 자신 역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처절하게 격투하는 후반부 신이 굉장히 인상 깊어요. 그리고 최근에야 이 작품이 <호프> 이후에 촬영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 놀라웠습니다. 장대한 액션을 이미 한 번 치러낸 배우가 어떻게 다시 거친 액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가 싶은 거죠. 작품을 선택할 때 액션의 유무를 따지는 배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편한 길을 택하고 싶진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되더군요.

저는 액션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아요. 액션에 로망이 있는 배우도 아니고요. 단지 그 작품이 재미있으니까 하는 건데, 방금 말씀하신 대로 <호프>를 찍고 나서 몸이 좀 힘들기는 했죠. 그 사실을 감독님과 제작사에서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충분히 휴식할 수 있도록 관리해줬어요. 배우를 혹사하지 않기 위해 현장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려 하셨고요. 그럼에도 액션은 쉽지 않았지만, 믿음이 있는 관계니까 가본 거죠. 사실 시나리오 볼 때는 이걸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데, 하기로 한 이상 잘 나와야 하니까, 대충 할 수 없고 대충할 방법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그냥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하게 된다”는 마음 하나로 그토록 거칠고 치열한 액션을….

<모가디슈>를 찍는 동안 타지에서 4개월간 지내며 경험한 덕에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온다’라는 믿음으로 평정심을 갖게 됐어요. 끝을 알면 평정심을 가질 수 있거든요. 제일 어렵고 힘들 때가 9부 능선쯤이에요. 거의 다 다른 것 같고, 체력은 바닥이 났는데, 하지만 끝은 아닌. 그런데 그런 힘듦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버티는 거죠.

<모가디슈>의 액션이 처절하고 치열하다면, <호프>는 충격적입니다. 호오와 별개로 올해 관객에게 임팩트가 가장 큰 작품은 단연 <호프>입니다. 처음 시 나리오로 이 작품을 접했을 때, 그 임팩트를 감지했나요?

사실 시나리오를 통해 모든 그림을 감지할 수는 없어요. 말 그대로 소설이 아니라 시나리오니까요. 어쩌면 시나리오는 스케줄표 같은 것일 수도 있어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럼에도 <호프>의 시나리오에서는 어떤 강렬함이 느껴졌고, 촬영에 들어가고 점차 촬영을 해나가면서 ‘생각보다 더 센 영화구나’ 싶긴 했어요.

이 영화, 심상치 않다 하고 체감한 순간도 있었나요?

첫 컷을 찍자마자 왔어요. 모든 장면이, 특히 말 위에 탄 사람이 제 목덜미 낚아채는 장면이나 이런 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그림이잖아요. 그 장면은 현장에서 찍힌 걸 봤을 때, ‘아, 잘 가고 있구나’ 싶었어요. 어쨌든 새로운 걸 만들어 내려면 어느 정도 용기를 내야 하는데, 거기서 주저주저하면 구조적 한계 때문에 비슷한 컷밖에 못 건져요. <호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늘 더 과감하게 시도한 작품이에요. 그 용기가 반드시 카메라에 담길 거라 생각했고요.

무엇이 용기를 내어 한발 더 가보게 했나요?

나홍진 감독님의 생각을 믿는 거죠. 이창동 감독님이나 류승완 감독님과 작업할 때도 그랬지만, 나 감독님의 현장에 갈 때도 같은 마음이었어요. 철저히 그 세계 안에 들어가서 감독님이 원하는 연기를 한다는 마음으로 가요. 그래서 감독님이 만족하시면 좋겠고, 후회 없으면 좋겠고, 그를 위해선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으로 하는 거예요. 그게 배우의 역할이니까요. 그리고 나 감독님은 그렇게 온몸을 갈아 넣었을 때 그 이상의 것들을 화면에 담아 내는 아주 특별한 재주가 있어요. 그래서 힘들었지만, 힘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 고됨이 영화로 다 보상이 됐으니까요.

브라운 롱 코트와 셔츠, 베이지 팬츠 모두 Valentino, 스카프와 슈즈 모두 Valentino Garavani.

마침 이번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에 나홍진 감독님의 인터뷰도 실릴 예정이에요.

그러잖아도 며칠 전에 인터뷰했다고 들었어요.

그 자리에서 조인성 배우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듬뿍 남기셨거든요. 오늘은 반대로 감독님에 대한 조인성 배우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것은 분명 사랑이다 싶은데요.(웃음)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우리는 그냥 대화하는 건데, 주변 사람들이 서로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아마 그게 맞을 거예요.(웃음) 나 감독님과 또 작업을 해보고 싶고, 만약 함께 하지 않더라도 계속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거든요.

이보다 더 큰 고생이 있더라도요?

당연하죠. 왜냐하면 그건 곧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리고 배우가 불편하면 관객은 좋아할 겁니다.

두 분의 사랑에 금을 내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웃음), 그럼에도 이건 진짜 안 되겠다 하는 장면도 있었을 것 같아요. 강한 믿음이 있음에도 어렵다 싶었던 장면이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한 발을 뻗어 차로 넘어가는 장면, 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액션 팀에 물으니 그렇게는 안 해봤다고, 그래서 승마 팀에 물었더니 처음이라고. 그런데 나는 왜 해야 되는 거야?(웃음) 그런데 어쨌든 해내야지 장면이 완성되는 거니까, 안전장치를 다 하고 일단 해봤는데 또 그게 됐어요. 그러고 다음 날 감독님하고 통화하는데, “그런데 원래 이게 안 되는 거라는데요?” 하더라고.

(웃음) 감독님들은 왜 그러실까요?

그게 안 되는 거래요. 그래서 스태프는 다른 방면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내려 하고, 감독님은 이게 왜 안 되는 건가 생각하셨던 거죠. 그런데 됐어요. 저도 말을 한 발로 타게 될 줄 몰랐어요.(웃음)

그래서 결과물이 더 궁금했을 것 같아요.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들을 해내면서 완성한 영화 <호프>를 마주했을 때, 무엇이 보였나요?

정말 끝까지 가는 영화구나. 제가 시사회 날은 무대 인사를 하느라 못 보고, 개봉하고 2주 뒤에 아이맥스에 가서 봤는데, 치밀하고 집요하게 만든 크리처부터 사운드까지 하나하나 느껴져서 좀 울컥했어요. 그걸 얼마나 힘들게 해낸 건지,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는지 아니까 좀 울컥하던데요.

브라운 레더 재킷 Lemaire.
블랙 레더 코트와 스트라이프 셔츠, 브라운 팬츠, 타이, 슈즈 모두 Amiri.
블랙 로브 수트와 셔츠 모두 Zegna.

어떤 장면을 특히 좋아하나요? 본인의 장면 중에서요.

첫 등장 신이 좋았어요. 오프닝 시퀀스에서 ‘범석’(황정민)이 경찰차에서 내려서 ‘성기’ 무리랑 대화하는 장면이 좋더라고요. 그리고 좀 웃겼어요. 범석과 성기 무리 각각의 캐릭터가 조금씩 드러나는 게 웃기면서도 되게 좋더라고요. 그 장면부터 하나씩 쌓인 캐릭터의 특성이 영화의 밀도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강렬한 두 작품을 끝낸 이후, 체력적으로 힘에 붙여 쉬어야겠다고 생각할 때 쯤에 만난 작품이 <가능한 사랑>입니다. 결국 이 작품을 가능하게 만든 힘은.

이창동 감독님이죠. 이창동 감독님 작품은 그냥 지나가는 역할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줄곧 해왔고, 그래서 제안이 들어왔을 때 크게 고민하지 않았어요. 이것까지는 하고 쉬자, 까불지 말고 하자 그랬죠. 이창동 감독님 작품에 내 얼굴이 나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지라 더더욱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감독님 작품은 특히 글에서부터 어떤 기운이 느껴질 거라 추측했습니다. 감독님의 시나리오이자 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설)경구 형 말로는 감독님 작품만의 냄새가 있대요. 그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경구 형의 그 표현이 되게 좋더라고요. 영화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냄새거든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는 있는데, 냄새는 맡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감독님의 작품에는 어떤 향이 느껴져요. 그게 참 좋더라고요.

앞선 작품들과 다른 의미로 어려운 지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감독님 말씀으로는 조인성 배우가 맡은 ‘상우’는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인물이라고요.

상우는 자본의 상징으로 보이는 인물이에요. 다만 기성세대의 어떤 자본가나 재벌 느낌이 아니라 현시대 자본가의 모습은 어떠한지, 그에 대한 감독님만의 해석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예요. 그러니까 예시가 없는 거죠. <밀양>에서 송강호 선배가 표현한 키다리 아저씨가 색다른 모습이었던 것처럼요. 그래서 새롭게 창조하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정답이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고, 다양성을 열어놓고 찍은, 말하자면 NG가 없는 거죠. 그렇게 캐릭터를 구축해나갔던 것 같아요.

이창동 감독님은 배우에게 완성된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 질문으로 배우가 캐릭터를 확장해나가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감독님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면서 특히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연기 디렉션을 어떻게 주시는지였거든요. 아주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일례로 전 체 리딩 리허설이 없었어요. 대신 그날 촬영할 분량을 같이 앉아서 말하듯이 읽게 해요. 감독님은 배우가 자신의 말을 쓰기를 원하세요. 그러니까 연기가 아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하듯이, 이 말이 영화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세요. 그러면서 작전 회의를 하는 거죠. 이 신이 가야 될 목표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다만 그걸 굳이 드러내지 말라고 하세요. 그 마음을 가지고 있되 표현하지 말라고요.

너무 어려운데요.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그래서 재미있었어요. 보통 배우는 표현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글에 이미 쓰여 있고, 의미들이 놓여 있으니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라. 단조롭게 플랫하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좋았어요.

작업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 더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대개 사람을 볼 때 그날의 만남, 사건, 그러니까 결과로 보게 되지만 사실 그 삶으로 들어가보면 각자 겪는 풍파가 있잖아요. 그래서 사는 게 참 쉽지 않고요. 그럼에도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아마 굉장히 와닿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과 7년 만의 만남입니다. 당시 40대를 상상해보는지 묻는 질문에 “그때는 지금보다 편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라는 답을 남겼어요. 40대를 지나는 지금, 그 바람에 당도했다고 생각하나요?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다르게 보면, 그래서 프로다운 게 아닌가 싶고요. 확신을 가지는 건 아마추어라고 생각해요. 프로는 항상 이게 맞나? 이렇게 가도 되나? 이 지점이 맞았나? 아니면 더 갔어야 하나?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어렵게 봐야 해요. 확신을 가지고 쉽게 생각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 같아요. 계속 불편한 옷을 많이 입으려고 해요. 그렇게 해서 다만 10%라도 변하게 하는 것, 거기서 지속 가능한 배우의 모습이 나오는 것 같아요. 단언하지 않고, 쉽게 보지 않는 것, 그게 좋은 배우로 가는 길인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이제 막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발견한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확신을 가지지 않는 것은 계속해 나를 비워내야 하는 일이기도 한데,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무엇도 될 수 있으려면 나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작품 안에서 나라고 말할 게 없어야 돼요. 이건 자존감과는 다른 얘기예요. 외려 그게 자존감이기도 하고요. 오른뺨을 내달라고 했을 때 왼뺨까지 내줄 수 있는 거, 그게 자존감이죠. 3km를 가달라고 했는데 5km까지 내달리는 게 자존감이고요. 제가 옳다는 생각을 완전히 안 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알아차리려고 노력을 하는 거죠. ‘아, 내가 또 고집을 세우는구나’ 하면서요. 그래야 새로운 모습으로 갈 수 있고, 다양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는 노희경 작가님을 만나면서 갖게 된 생각이에요. 작가님과 세 작품을 같이 했는데, 그 과정에서 지금 저라는 배우의 베이스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아직 세 달여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올해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 것 같나요? 서두에 심플하게 한 해를 보내고 있다고 했지만, 이만하면 스스로를 상찬해도 좋을 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몇 년간 농사를 열심히 지었거든요. 수확이 잘된 것도 있고, 잘 안 된 것도 있고, 그 과정일 수도 있고, 또 그 수확이라는 건 어디에 의미를 두는지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할 거예요. 다만 수확 자체에, 그러니까 결과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 해요. 사실 영화가 영화관에 걸리는 기간은 불과 한 달 남짓이에요. 그 한 달을 위해 우리는 짧게는 반년, 심지어 <호프>는 2년을 들였어요. 그런데 한 달의 결과에만 목적을 두면 인생이 허무하고 허탈해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과정에 집중하려고 해요. 과정이 더 길기 때문이죠. 그래서 3편 모두 즐거운 과정이었냐 스스로 자문하면, 즐거웠어요. 후회도 없고, 게다가 감독님께선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뭘 바라요. 앞으로 오스카 레이스가 있지만, 욕심을 내는 게 아니라, 그저 그 또한 과정임을 알고 집중하려는 거죠. 그리고 칸에 갔다, 베니스에 갔다, 심지어 오스카 레이스도 뛰어봤다, 다 중요하지만 어쨌든 이 모든 건 과거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어요. 그게 다음의 어드밴티지가 되느냐, 그렇지도 않아요. 다 제로에서 시작이에요. 골프랑 똑같아요. 이번에 잘 맞았다고 해서 다음 샷도 반드시 잘 맞느냐, 아니에요. 반대로 이번에 못 맞았다고 해서 다음에도 안 된다는 것도 아니고요. 결국은 18홀을 끝내봐야 아는 거라 저는 계속 과정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들뜰 이유도 없어요. 안 됐다고 그렇게 속상할 이유도, 아 물론 속상할 이유는 있지만, 또 과정에서 회복하는 거고요. 다음에 잘 맞춰야지, 그렇게 해석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은 제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큰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모두의 마음에 남겨야 할 말이네요.

올해 이렇게 될지 몰랐고, 내년엔 또 어떻게 될지 가봐야 아는 거예요. 모든 일이 그래요. 다 원점에서 출발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