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형벌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밖에 없더라고요.”
자신과 언어의 불완전함을 끌어안은 채
종이 위로 나아갈 시인 박참새의 시작.

박참새 시인 마리끌레르 2024년 2월호 화보 및 인터뷰
박참새 시인 마리끌레르 2024년 2월호 화보 및 인터뷰

제4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과 첫 시집 <정신머리> 출간을 축하하며 대화를 시작하고 싶어요.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기쁘기보다는 힘들고 무서웠어요. 수상 소식을 들은 이후 시상식 전까지 매일 울었거든요. 이 상이 지닌 무게가 절 압도했나 봐요. 첫 시집을 내는 건데 앞으로 시를 쓰면서 이 정도의 충격을 계속 줄 수 있을까 싶었죠. 이게 내 마지막이면 어떡하지 싶고요.

의심과 불안에 반해 “왜 시를 쓰느냐 묻는다면 ‘내 깡패 되려고 그렇소’라고 답하겠다”는 패기 넘치는 수상 소감으로 화제가 되었어요.

왜 화제가 되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원래는 고마운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식으로 수상 소감을 준비했어요. 수많은 사람에게 빚지고 그들의 희생과 돌봄 아래 시를 썼거든요. 그저 제가 시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는 것, 그렇게 탄생한 시들이 좋은 기회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음을 돌려 말하고 싶었어요.

<정신머리>에 수록된 시를 살펴보면 글씨의 크기나 굵기를 달리하거나 텍스트를 활용해 이미지를 만드는 등 언어를 시각적으로 활용하기도 해요. 휴대폰 메모장에 적힌 내용을 캡처해 넣고, 시 사이에 사진을 삽입하기도 했죠.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혀줬을 뿐이에요. 독자에게 불안한 느낌을 전하고 싶을 땐 글자를 과하게 굵게 만들어 압박감을 주고, 가독성을 낮추고 위태로운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땐 글자가 떨리는 듯한 효과를 줬어요. 이게 유별난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만약 제가 1920년대에 태어났다면 타자기만 썼을 테지만, 지금은 모두가 컴퓨터를 사용하잖아요. 처음에 손으로 쓴다 해도 모니터 위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고요. 그때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다른 방법을 찾아요.

“너는 너만의 말로 지은 말의 집에서 홀로 살 것이다. 너는 갇히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상태로, 탈출도 방생도 못 한 채로, 이동도 거주도 불편한 상황을 자초하며, 아름다우며 기괴한 말의 집에서, 그것에 의지하고 외면당하며, 그곳에서, 홀로 살 것이다.” 수록된 시 ‘건축’을 읽으며 말하고 싶다는 욕망이 언어의 불완전성과 부딪히고 있다고 느꼈어요.

맞아요. 그 모순적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했어요. 내가 느끼는 바를 말로 완벽히 표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죠. 대화를 한 뒤 너무 많은 말을 했다거나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가 많잖아요. 무수한 오해와 불필요한 이해관계가 생겨나고요. 언어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형벌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슬프게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밖에 없더라고요.(웃음) 그림이나 영화 등 운용할 수 있는 제2의 언어가 없으니, 최선을 다해서 언어를 의심하고 또 배반하고 때로는 그것에 의지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고 느꼈죠.

그것이 시인이 시를 쓰게 하는 주요한 감정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언어를 믿으면서도 의심하기에 시를 써요. 시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언어를 다룰 수 있는 가장 넓은 문학적 영토라고 느끼거든요.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배우잖아요. 그렇기에 언어는 가장 무의식적인 매체가 아닐까 싶어요. 내 마음을 잘 전달하고 싶어서 불필요한 미문을 만들기도 하고, “내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건 저게 아닌데, 왜 이런 걸 썼지?” 싶은 순간도 많으니까요.

“모국어였던 것 같다/ 다시/ 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이방인이었다” ‘국어’라는 시의 일부분이 생각나요. 언어에 대한 믿음과 의심은 어디에서 발현되는 걸까요?

지금껏 제가 읽은 책들의 영향이 있어요. 모국어를 배반한 작가들이 몇몇 있잖아요. 예를 들어 사뮈엘 베케트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망명이나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해서요. 제2의 언어로 쓴 글을 다시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하기도 했고요. 제대로 의심하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건가 싶었어요. 순수한 의미의 모방 심리가 들기도 했고요.

영어로 먼저 시를 쓴 뒤 챗 GPT를 활용해 한국어로 번역하고, 또 본인이 직접 의역한 버전을 함께 담은 시 ‘Defense’도 떠올라요.

모국어를 배반하고 싶다는 생각에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제2의 언어로 써본 건데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언어만 바뀐 거지 저라는 사람은 똑같잖아요. 하고 싶은 말이나 그 안에 담긴 본질은 같은데, 영어로 쓰니까 직설적이고 순수해지더라고요. 아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웃음) 제가 의역한 부분에 ‘trans. Estelle M. Buck’이라고 적었는데, 그건 애너그램(문자의 배열을 바꾸어 새로운 단어나 문장을 만드는 놀이)을 활용해 베케트의 이름을 새롭게 만든 거예요.

사뮈엘 베케트뿐 아니라 프란츠 카프카, 파울 첼란, 김종삼 등 다양한 문학적 레퍼런스가 등장해요. 시에 다양한 인용이 담긴 이유는 무엇이에요?

더 이상 순수한 창작이란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리는 매 순간 수많은 정보를 접하잖아요. 당장 휴대폰만 켜도 지금이 몇 시고 누가 연락을 했는지 알 수 있어요. 이때 어떤 인지적 편향이 생기고, 이것을 바탕으로 결정하고 또 선택하게 되죠. 저 또한 보고 듣고 읽어온 것들이 있으니, 무언가를 쓴다 면 그건 누군가와 함께 만든 것이라 생각해요. 사랑하는 작가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면서 살아왔으니까요. 내가 습득한 어떤 영혼의 파편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무언가가 되었다고도 느껴요. 그것들이 제 안에 뒤섞여 있어 가끔은 잘 깨닫지 못하지만, 확실히 표현하고 싶은 구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인용했어요.

<정신머리> 속 화자들은 비속어를 거침없이 내뱉고, 삶의 부침과 죽음에 대한 갈망을 토로하기도 해요. 통상적으로 금기시하는 것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시에 드러내는 데 주저함은 없었나요?

주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제 밑바닥을 보이는 게 창피하지 않아요. 오히려 가끔 의심해요. “뭐지? 이거 <트루먼 쇼>인가? 왜 나 혼자 구리지? 어떻게 다들 아름답고 매끈하고 유연하지?” 싶은 거죠.(웃음) 적어도 시에서만큼은 나를 완벽한 양 꾸미고 싶지 않아요. 수상 소식을 듣기 직전에 제 스승님이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진실로 숭고해 보일 때가 있는데, 참새 시인을 보면서 가끔 그런 걸 느낀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말할 수 없이 기뻤고요.

깊은 곳을 내보이며 시를 쓰는 일이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다가오기도 하나요?

그렇죠. 저는 소심하고 생활 반경도 좁아요. 큰일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삭이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시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아예 가짜로 쓸 수도 있고요. 아주 깊은 곳을 개방 할 수 있는 동시에 나로부터 가장 멀리 달아날 수 있는 거죠. 간혹 거짓말로 쓴 시를 두고 “너무 다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땐 오히려 웃겨요. 제 시에 화자로 ‘나’가 많이 등장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박참새라는 개인은 아니니까요. 모든 시의 화자가 시인은 아니지만, 동시에 시인이 없다면 시는 시작될 수 없겠죠. 시 합평을 하다 보면 “너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알고 싶지 않다. 자아를 축소해라”라는 말이 자주 나와요. 물론 그게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내가 아니라면 어디서 이야기가 시작되나요? 전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것 같아요.

시를 쓰면서 붙잡으려 했던 믿음도 있어요?

(긴 침묵) 저요. 절 붙잡고 싶었어요. 스스로를 못 미더워하고 싫어하니까요. 늘 아슬아슬하게 팔랑거리며 살고 명료함을 지니지 못했어요. 시에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고요. 상을 받고 무서웠던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앞으로 눈치를 볼까봐였어요. 의도한 거지만 전 이제 제도권이 만든 울타리에 들어왔어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저를 속이거나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로.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요?

일기를 써요. 최근에는 김수영 문학상 수상의 여파로 거의 쓰지 못했지만요. 그래도 그런 저를 외면하려고 하진 않아요. 그게 제가 거짓말 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인 듯해요. 일기를 쓸 때도 모두 가짜고 괜찮을 것이라 말하지 않고 왜 무서웠는지를 적어요. 그런 것들이 저를 연약하게 만드는 동시에 가장 단단하게 만들어요. 상처가 나면 그땐 아파도 새살이 돋으면 더 튼튼해지는 것처럼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결국 시를 통해 무엇을 얻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시란 무엇일까 막연히 생각하지만 알면 또 무슨 재미일까 싶어요. 모르니까 발버둥 치면서 쓰는 것 같고요. 음… 결국 모르는 채로 계속 나아가는 것, 그 자체를 시에서 얻고 있는 듯해요.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주어지는 동력 같은 것이 있다고 느끼고요.

모르는 채로 나아가면서 계속 시를 조물락대는 것이겠죠? 맞아요. 맞아.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