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에서 낯선 가능성을 발견하고, 하나의 답에 머무르지 않은 채
자신의 표현 언어를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네 명의 젊은 작가.
영상, 퍼포먼스, 회화, 사진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질문을 품고 열린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지금.


박민하 PARK MIN HA
인간이 직접 보거나 감각할 수 없는 세계를 이미지로 불러내는 일은 작가 박민하의 작업을 관통하는 화두다. 영상을 주 매체 삼아 화성 이미지와 공룡 화석, 생성형 AI의 잠재 공간, 카메라옵스큐라의 역사 등 다양한 소재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그는 미디어 기술과 과학적 재현이 우리의 감각 세계를 형성하는 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탄탄한 리서치에 기반해 점차 가설적인 픽션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미지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지식과 인식의 체계를 뒤흔드는 작가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확장되는 중이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사랑의 기원>에서 <타임 패러독스>가 상영되고 있죠. 서울 시립미술관 소장품이 된 이후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한번 관람객과 만나게 됐는데, 작품을 다시 선보이게 된 소회가 어떤가요?
이 작품은 박물관이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시간, 인간이 존재하기 전의 세계를 어떻게 재현하고 보존하며 다시 현재로 불러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흥미롭게도 지금 열리는 전시에서는 작품 자체가 미술관 수장고에 보존되어 있다가 전시장으로 다시 불려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를린 자연사박물관과 2년여간 협업해 완성한 작업이라고요. 재앙 이후 박물관학이 사라진 세계, 인간이 부재한 선사시대와 멸종 동물을 어떻게 재현하고 역사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입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요?
처음에는 자연사박물관 자체에 관심이 있어 작업을 시작했다가, 고고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브라키오사우루스의 꼬리뼈 ‘MBR 19’를 작품의 중심으로 가져오게 됐어요. 작업의 시작부터 특정한 공룡 뼈나 탄자니아의 식민지 역사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고요. 이 꼬리뼈가 지나온 시간을 따라가다 보니 탄자니아에서 발굴되어 베를린으로 옮겨진 과정과 그 안에 얽힌 식민지의 역사까지 알게 됐어요. 조사 과정에서 마치 이 존재가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꼈고, 그래서 꼬리뼈가 내레이션을 통해 직접 자신의 여정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제작하게 됐어요. 처음부터 이야기의 전개 방식을 정해 놓았다기보다 리서치 과정에서 발견한 역사적 재료들이 작업의 방향을 만들어 간 셈이죠.
아날로그 필름으로 직접 촬영한 푸티지와 3D 데이터처럼 성격이 각기 다른 매체를 한 작품 안에 병치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화석에는 시간이 물리적 흔적으로 남아 있고, 아날로그 필름 역시 빛이 닿은 흔적이 물리적으로 남는 매체잖아요. 그래서 화석과 고고학자들을 꼭 필름으로 촬영하고 싶었어요. 한편으로는 과거에는 박물관에서 뼈나 화석을 복원할 때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 매체를 이용했다면, 지금은 3D 스캔을 통해 아카이빙하기도 하잖아요. 박물관이 시간을 구원하고 고고학이 사라진 시간을 부활시키는 일이라 본다면, 서로 다른 시대를 상징하는 매체인 필름과 3D가 한데 뒤섞이는 세계관을 상상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렇게 필름과 3D라는 서로 다른 시대의 매체가 뒤섞이는 방식 자체가 일종의 ‘미디어의 시간 여행’처럼 다가와 흥미롭게 느껴졌고요. 제가 아날로그적 세계관과 디지털 세계관이 공존하던 때에 자란 세대다 보니 여러 매체가 섞여 있는 상태가 잘 맞는 것 같기도 해요.


눈이 내리지 않는 도시의 눈부터 군사기지와 감시 카메라, 화성, 공룡 화석, 최근에는 AI의 잠재 공간까지,작품에서 다루는 소재는 무척 다양하지만 그 안에 일관된 주제 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현재까지의 작업을 관통하는 관심사가 있다면요?
작업마다 소재나 맥락은 저마다 다르지만, 시각성과 프레이밍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해왔다고 생각해요. 결국 전부 ‘본다’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죠. 한편으로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만들거나, 아주 멀리 있어 닿기 어려운 대상을 어떤 기계나 장치를 통해 소환하는 일에 일관되게 관심이 있어요. <잡을 수 없는 눈 이야기>에서는 눈이 내리지 않는 LA에서 영화 특수효과로 쓰이는 눈을 포착하고, <쉐도우 플래닛>에서는 직접 가볼 수 없는 행성의 이미지를 다루는 식으로요. 현존하지 않는 것들을 매체를 통해 불러내는 ‘마술적인 순간’을 다시 고찰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탄탄한 리서치와 실제 자료를 토대로 하면서도 결국 픽션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작업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픽션을 구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 있나요?
제게 중요한 건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을 법한’ 픽션인가 하는 점이에요. 리서치가 그 개연성을 지탱해주고요. 예를 들어 <쉐도우 플래닛>은 화성의 먼지 폭풍 때문에 실제로 촬영이 중단되는 현상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나사(NASA)에서는 이런 먼지 폭풍을 ‘더스트 데블(Dust Devil)’이라고 부르는데, 굉장히 의인화된 표현이잖아요. 저는 그걸 토대로 먼지 폭풍이 어쩌면 화성의 원주민 같은 존재일 수도 있고, 인간의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고 싶지 않아 자기 자신을 어둠 속에 숨기는 건 아닐까 상상하며 각색해나갔어요. 이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자료와 현상에서 출발해 가능할 법한 픽션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즐겨 써요.
그렇게 개연성 있는 픽션을 통해 궁극적으로 질문하고 싶은 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도 했나요?
픽션은 제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기보다 현실을 확장하거나 비평하기 위한 도구예요. 리서치를 바탕으로 픽션을 쓰면서 현실에서 비평하고 싶은 부분을 작품에 드러내거나, 그 프레임을 좀 더 확장해보는 거죠. 그중에서도 일관되게 관심을 가져온 건 우리의 감각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무언가를 본다는 건 결국 세계관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과거의 영화에는 거의 백인 배우들만 등장했다면, 지금은 다양성을 고려한 캐스팅이 이뤄지잖아요. 결국 어떤 이미지를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는 일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거죠. 저는 이런 이미지의 정치학에 관심이 있어요. 이미지가 어떤 정치적 프레임과 교차하고 있는지를 보고, 이미 주어진 매끈한 결괏값을 따라가기보다 작업을 통해 그 이미지의 과정들을 한번 정지시켜 들여다보려 해요.


최근작 <유령 해부학>에서는 생성형 AI의 잠재 공간을 시각적으로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인공지능의 시각 체계를 탐구하죠. 어느 영역에서든 AI가 창작의 도구이자 주제로서 활발하게 다뤄지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AI를 작업 안에 끌어들이고 싶었나요?
제게 AI는 효율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창작 도구라기보다 그 내부를 파헤치고 해부해보고 싶은 대상이에요. AI 역시 우리가 무언가를 보게 해주는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장 첨단의 장치로서 그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죠. <유령 해부학> 역시 표면적으로는 AI를 다루지만 AI가 만들어 낸 결과물보다 그것이 뿌리내린 이미지의 토양을 들 여다보는 작업이에요. 우리가 보는 결괏값 아래에는 AI가 학습한 수많은 데이터가 있고, AI가 기반하고 있 는 데이터베이스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죠. 그래서 마치 사람의 몸을 CT로 스캔하듯이 AI의 잠재 공간을 들여다보고, 프로그래머와 협업해 일종의 포렌식처럼 평소에는 가시화되지 않는 데이터를 직접 꺼내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시각화 하게 된 거예요.
작품에 등장하는 생성형 AI ‘노아’를 인간의 형상으로 구현하게 된 계기도 있을 듯해요.
챗GPT 같은 거대 언어 모델을 사용하다 보면 기계인 데도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느낌을 받잖아요. 말을 걸거나 마치 감정적으로도 우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굴기도 하고요. 실제로 인간적인 경험을 하거나 신체를 가진 것도 아니고, 많은 데이터를 학습해서 계산된 값을 내놓는 것뿐인데 마치 인간을 재현하는 듯한 거예요.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서 AI를 형상화한다면 아주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AI 생성형 이미지로 만들지 않고 3D로 직접 구현했고요.
생성형 AI를 활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의도적으로 3D 를 택한 거네요.
맞아요. 생성형 AI로 이미지를 만들면 결국 평면적인 이미지로 출력되지만, 3D로 만들면 가상의 공간 안에서도 마치 조각처럼 하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잖아요. 조금 덕후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엄밀히 생각하면 생성형 AI가 어떤 형상을 갖는다면 평면적 이미지보다는 3D 아바타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리얼리티를 살리고 싶어 3D 스튜디오와 협업해 노아의 캐릭터를 직접 만들게 된 거고요.

그간의 작업을 살펴보면 작가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자연스레 궁금해집니다. <타임 패러독스>의 공룡이나 <유령 해부학>의 노아처럼 작품에 비인간 존재에 목소리를 자주 부여하는 한편,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비판과 애정이 공존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바라보지 않고 좀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편이에요. 시스템이라는 건 인류 역사에 발전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제한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측면에는 비평적으로 접근하게 되고, 반대로 인간이 가진 근원적 판타지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이에요. 우리는 우주처럼 아주 멀리 있는 세계나 이미 사라진 공룡을 굳이 보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잖아요. 이 지구 안에서도 할 일이 많은데 말이죠.(웃음) 그렇게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고 싶어 하고, 닿을 수 없는 존재에 다가가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작업해나가고 있어요.
올해 ‘MARIE NEXT’ 작가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9월 3일에 열리는 <마리끌레르 아트 데이&나잇>에서는 주요 작품을 한자리에서 선보이고 관객과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예정되어 있죠.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어떤 기대를 품고 있나요?
영상 작업은 상영이나 전시가 끝나면 한동안 외장하드 속에 잠들어 있게 되는데, 이번 선정이 그 작품들을 다시 꺼내어 지금의 관객과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 무엇보다 반가워요.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든 작품들이 한 공간에 놓이는 것도 작가에게 흔치 않은 경험이고요. 작품들을 나란히 두고 보면 제작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연결선들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 발견을 관객과 함께 경험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기대가 돼요.
작품을 마주한 관객에게 끝내 어떤 경험이 남기를 바라나요?
특정한 방향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제 작업이 열린 질문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작업을 보면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볼 수 있는 구석이 생긴다면, 일종의 구멍 같은 게 생긴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