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 수

2000
미술가

서양화를 전공하며 회화를 기반으로 조각, 판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지난해 아트 페어 ‘더프리뷰 성수’에 최연소 작가로 함께했고, 디스위켄드룸의 그룹전 <와일드 번치> 등에 참여한 바 있다. 수많은 단어보다 하나의 이미지가 지닌 힘이 클 때가 있다는 믿음, 어떤 것에도 규정되지 않으려는 태도로 미술과 함께하는 삶을 이어가는 중이다.

“혹여 작업을 그만두는 날이 오더라도 미술과 동떨어진 삶을 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미 미술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미술을 처음 마주한 순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기 때문에 TV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즐겨 보시던 방송이 자주 나왔다. 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TV 대신 동화책을 보며 곤충 삽화 같은 걸 따라 그리곤 했다. 당시 그림을 재미있게 그린 경험이 시각물을 다루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시작의 동력 미대 진학 후 다방면으로 진로를 고민했다. 사진과 디자인도 생각해봤는데, 공동 작업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이끌어갈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 작가의 길을 택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개인 작업을 아카이빙하고, 친구들과 꾸린 전시를 홍보하다 보니 공식적인 전시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SNS 상의 수많은 작품 사진 중에는 직접 감상하고 싶거나 작가의 다른 작업이 궁금해지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않나.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내 작품에도 그런 지점이 있던 게 아닐까 싶다.

확장된 회화 회화가 다른 매체를 만나 상호작용할 때 작품이 보다 풍부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페인팅에 오브제를 붙이거나, 설치를 곁들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이를테면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린 그룹전을 통해 선보인 ‘낮과 밤의 부랑자’는 구름 모양의 나무판에 홈을 길게 판 뒤 새와 별 모형을 배치한 작품이다. 이미지가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대에 관객이 직접 작품을 구성할 수 있으면 흥미로울 것 같아 새와 별이 홈을 따라 움직이는 형태로 제작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최근 사적인 주제를 긴 호흡으로 끌고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사적 공간이 침범당한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은 안전을 위해 택배를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받기도 하지 않나. 가장 편안해야 하는 공간임에도 타인의 껍데기를 빌리는 아이러니에 초점을 맞춘 시리즈가 될 것이다.

미술의 매력 나는 단순한 성향을 지닌 사람인데, 영감을 하나의 작품으로 발전시키다 보면 고민을 많이 해야 하지 않나. 그 시간이 내 일상의 여백을 채워주는 것 같아 작업하는 게 재미있다. 완성작이 공개되었을 때, 내가 작업하며 품었던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며 다채롭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미술의 매력이다.

요즘의 화두 작품의 시각적 이미지와 메시지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 둘 중 하나에 치중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럴 때면 아직 미술가로서 준비가 덜 됐구나 싶다. 지금은 적합한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매체를 시도하며 작업을 많이 쌓고, 이를 면밀히 관찰하는 게 첫 번째 목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의 시각적 맥락으로 정돈되어 관객에게 어렵지 않게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키려는 태도 ‘나는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라며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으려 한다. 작가로서 안정기에 접어들면 내 작업이 하나로 고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시대의 변화를 계속 받아들이며 나아가려 한다. 이와 동시에 시대를 떠나 언제 봐도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기도 하다. 아이러니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이야기 안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나의 다음 원대한 꿈은 없다. 작업하다가 쉴 때 강아지랑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 만들어 먹고, 틈틈이 운동하는 현재 생활에 무척 만족한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 쌓일수록, 어릴 때보다 그림 그리는 일이 더욱 재미있다. 좋아서 하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 혹여 작업을 그만두는 날이 오더라도 미술과 동떨어진 삶을 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미 미술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