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가을, 부산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세계가 이토록 다채롭고 아름다운 건 각자의 자리에서 온 마음을 다해 분투하는 프로그래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올해도 오직 ‘좋은 영화’만을 생각하며 선별한 2백47편의 공식 선정작과 69편의 커뮤니티비프 상영작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채운다. 7인의 프로그래머가 깊은 고심 끝에 이 중 눈여겨봐야 할 작품을 추천했다. 이 작품이 관객과 만나 일으킬 빛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World & Asian Cinema

박가언 부집행위원장

올해 영미권은 거장들의 고전 서사 재해석과 메가 IP의 사활을 건 판세 재편이, 일본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하마구치 류스케 등 거장 감독들의 새로운 행보로 드러나는 만화를 기반으로 한 실사영화의 대형화와 글로벌 합작으로 키운 스케일이 눈에 띈다. 검증된 IP의 오직 극장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도입하는 극장성 극대화와 거장들의 작가주의적 정면돌파가 충돌하는 흥미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은 이제 장르를 넘어 모든 영화적 형식을 수용하는 가장 역동적인 언어로 진화했다.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자들의 도 전이 출품작의 양적 폭발과 질적 도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특별기획 프로그램, 포럼 비프 등을 통해 이 놀라운 확장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랜스 해머 <엄마의 바다>

치매를 앓는 노년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금기시된 화두를 대담하면서도 정갈하게 다루는 수작이다. 돌봄이라는 명목 아래 번져나가는 가족 간의 부채 의식과 실타래처럼 얽힌 감정의 골을 서늘하도록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조지아 오클리 <이성과 감성>

제인 오스틴이니까 ‘기승전 결혼’으로 끝날 것이라는 고전에 대한 통념을 과감히 뒤엎는 작품이다. 미혼 여성의 시선에서 당시 여성에게 강요되던 부조리한 사회제도를 서늘하게 응시하며, 클래식한 서사에 날카로운 리얼리티를 불어넣는다.

키어런 J 월시 <스킨타운>

최저기온이 30℃를 넘나드는 찜통더위를 버텨내며 수백 편에 달하는 출품작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무렵, ‘이렇게 재미있다고?’ 하며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든 작품이다. 영화제 초청을 확정 지은 후 에든버러 국제영화제 대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을 때, 프로그래머로서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짜릿함마저 느꼈다.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거침없는 에너지가 스크린 위에서 폭발하듯 분출된다. 날것의 거친 질감 속에 묵직한 인간적 연민이 깃들어 있어, 보는 내내 가슴을 끊임없이 두드린 작품이다.

하라다 마하 <아버지의 방>

영화감독으로서는 신인이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미술관 큐레이터로 쌓아온 이력이 작품 곳곳에 짙게 녹아 있어 감탄하며 관람했다. 예술과 삶, 그리고 부녀간의 지독하고도 숭고한 유대를 희미한 조도로 그려낸다. 기억과 기록이 공간이라는 캔버스 위에 겹쳐지며 자아내는 감정의 결이 무척 정밀한데, 여기에 아오이 유우의 차분하고 단단한 연기가 중심을 잡으며 가슴 먹먹한 울림을 더한다.

코고나다 <zi>

특유의 정갈하고 시적인 시선으로 홍콩 거리의 정서와 일상의 찰나를 정교하게 담아냈다. 게릴라 촬영으로 진행한 소품이지만, 그렇기에 코고나다의 독창적 미학과 여백의 아름다움이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Asian Cinema

박선영 프로그래머

올해 아시아에서는 주목할 신인 감독들과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주요 중견 감독이 대거 부산을 찾는다. 내가 담당한 중화권,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는 경쟁, 비전-아시아, 아시 아영화의 창까지 부산에서 전 세계 최초로 상영하는 월드 프리미어 영화가 많다. 특히 아시아의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비전-아시아와 올 한해 가장 뜨거운 아시아 영화들, 혹은 부산을 기점으로 더 뜨거워질 아시아 영화들을 소개하는 아시아영화의 창 섹션에서는, 작지만 소중하고 의미 있는 아시아 영화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아시아 영화의 허브’ 부산 에서 나만의 보석 같은 아시아 영화를 만나보길!

사힐 H. 샤 <빙판 위의 새들>

히말라야 산 밑, 유목민 부모를 기다리며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고 싶지만 스케이트를 살 돈도 없을 만큼 가난한데,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있고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 소녀는 오늘도 즐겁다. 아름다운 설경, 뛰어난 촬영, 순수한 어린이들, 그리고 마침내 꿈을 향해 한발 내딛는 발자국. 온 가족이 함께 울고 웃으며 볼 수 있는 감동과 웃음이 넘치는 사랑스러운 영화.

미셸 저우 <나의 사소하고도 큰 일들>

사랑하는 연인을 가족에게 소개하기가 이렇게 힘들 일인가. 홍콩의 신인 감독 미셸 저우는 가족과 연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춘의 초상을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하얼빈의 겨울 풍경 안에, 청춘의 고민과 성장을 아름답게 녹여냈다. 감독의 섬세한 디테일과 사려 깊은 태도가 큰 위로가 되는 영화.

보티르 압두라흐마노프 <힐롤>

아들로 키워진 힐롤. 스물셋이 되어서야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말이 많지 않고 감정 표현이 서툰 인물을 바짝 뒤쫓는 카메라를 따라가다 보면, 힐롤의 거친 듯 힘 있는 서사와 촬영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깨닫게 된다. 우즈베키스탄의 주목할 신인 감독의 탄생.

사히야 뱜바 <멈춰서다>

코로나19 초기, 광활한 몽골의 하늘길을 달려 도착한 어느 작은 마을. 외부인의 유입을 막기 위해 이미 봉쇄한 마을 앞에 한 트럭이 멈춰 섰다. 뭉게구름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들의 사소한 욕망과 집착. 블랙코미디에 로맨스를 한 스푼 얹었다.

뤼포쉰 <내 친구로 남아줄래?>

첫사랑을 시작할 무렵의 두 소년을 주인공으로, 비밀스러운 감정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한 계절을 그렸다. 아름다운 화면과 따뜻한 조명으로, 망설이고 조심스럽지만 때로 거칠고 강렬한 두 소년의 감정을 보듬는다.

Asian Cinema

박성호 프로그래머

작년부터 조금씩 느끼는 경향인데, 올해는 특히 ‘개인과 주변 환경의 대립’이라는 서사가 강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에 특정 사회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지 않아도 주인 공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미학적 완성도가 높아짐과 더불어 국경을 초월한 보편성을 띤 영화도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제목도 감독도 처음 들어보는 영화 한 편쯤은 골라보기를 권한다. 큰 기대 없이 들어간 극장에서 뜻밖의 인물과 감정을 만나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또한 해외 뉴스로 접하거나 여행하며 잠깐 스친 나라에서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종 피산다나쿤 <인헤릿>

충격적 도시 괴담 <셔터>, 대박 난 호러 코미디 <피막>과 더불어 나홍진 감독이 제작한 <랑종>에 이어 부산에서 공개되는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의 신작. 주연을 맡은 다위까 호네는 <쓸모 있는 귀신>때를 훨씬 능가하는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니 절대 놓치지 말 것.

응우옌푸엉마이 <우리, 파도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문자를 보내고 나서 이불킥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좋아하는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진 이 애니메이션영화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DJ 둥고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로 옮겼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니 그 감동이 배가된다. 칸영화제에서 상영 당시 극장 안에서 훌쩍이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어빈 한, 라울 가르시아 <바이올리니스트>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이 만나서 음악을 통해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지는 작품. 그러나 폭력적인 제국주의의 팽창에 시달리는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이라는 시대적 아픔이 주인공들의 운명에 너무나 가혹한 시련을 안긴다.

마지드 마지디 <빵과 책>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밥을 주고 공부를 이어가게 하려는 선생님의 고군분투를 응원하다가도 계속해 봉착하는 도덕적 딜레마를 생각하게 되는 작품.

아빈 벨라르미노 <리아>

온통 문신을 한 몸에 가죽옷을 두른 포크 펑크 음악가들이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낭만적일 정도로 서로를 돕고 정의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영화.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는 음악이 그저 거칠게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따스함과 연대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영화와 더불어 음악을 저항의 수단으로 택한 이들을 그린 또 한 편의 아시아 단편 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 <알파>역시 주목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