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가을, 부산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세계가 이토록 다채롭고 아름다운 건 각자의 자리에서 온 마음을 다해 분투하는 프로그래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올해도 오직 ‘좋은 영화’만을 생각하며 선별한 2백47편의 공식 선정작과 69편의 커뮤니티비프 상영작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채운다. 7인의 프로그래머가 깊은 고심 끝에 이 중 눈여겨봐야 할 작품을 추천했다. 이 작품이 관객과 만나 일으킬 빛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World Cinema
서승희 프로그래머
플래시 포워드 섹션은 비아시아권 감독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소개하는 섹션으로, 해마다 신예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이 포진한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변화다. 올해 선보이는 유럽 영화 8편 모두 주옥같지만, 그중에서도 3편을 특별히 눈여겨보기 바란다. 에마뉘엘 마르 감독의 <노트르 살뤼>는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 각본상 수상작이고, <블랙 볼>은 같은 부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리스 여성 감독의 <조의 하루: 페드라 챕터>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아티나 라힐 창가리로 이어지는 현대 그리스 작가주의영화 계보에 등장한 새로운 감성을 품은 수작으로, 개인적으로 강력히 추천하는 작품이다.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관객과의 대화(GV)다. 내가 선정한 영화와 먼 길을 찾아와주신 감독님, 그리고 부산의 관객이 영화를 본 후 서로 마주하는 시간—직접 진행할 때든 다른 분의 GV를 지켜볼 때든—그 영화를 처음 본 순간부터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올해는 유럽에서만 20명이 넘는 감독들이 부산을 찾는다. 그만큼 행복한 순간이 많을 것 같다.

브루노 뒤몽의 <붉은 바위에 아이들이 있다>
프랑스 남부 한 지방의 붉은 절벽에서 지중해로 뛰어내리는 예닐곱 살 아이들의 시선과 대사를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 사랑과 질투와 폭력이 뒤섞인 통과의례를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밀도로 포착해낸 점이 인상적인 작품.

세라 아놀드의 <짐승이 너무 많아>
거대한 멧돼지 떼와 실종된 농장주라는 기이한 설정을 우울증에 시달리는 코르시카 출신 경찰과 신경쇠약 직전의 심리학자가 공조수사로 풀어가게 하면서, 농민과 지주의 갈등이라는 사회적 층위와 코언 형제 식 광기 어린 유머를 동시에 밀어붙이는 데뷔작다운 패기와 엉뚱함이 돋보인다.

마르코 베키스의 <백 투 부에노스아이레스>
군사독재하 아르헨티나의 고문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30년 만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증언대에 선 아드리아노 지안니니의 눈빛만으로 생존자의 죄책감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강렬한 연기와 뛰어난 연출이 돋보인다.

산드라 볼너의 <에브리타임>
엄마와 어린 딸, 한 청년이 테네리페로 미뤄둔 여행을 떠나는 서사 안에 죽음이라는 주제를 겹겹이 숨겨둔 채, 거대한 건물을 6분간 유영하는 롱테이크로 존재와 상실의 감각을 담아낸 걸작이다.

마린 아틀랑의 <라 그라디바>
폼페이 유적 앞에서 프랑스 고등학생들의 욕망과 절망이 뒤섞인 내면을 좇으며, 칸 비평가 주간 대상 수상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는 정교한 연출로 올해 가장 놀라운 발견작이다.
Wide Angle
강소원 프로그래머
올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세대교체다.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크게 눈에 띈다. 특히 한국과 아시아 다큐멘터리 경쟁에서 소개하는 여성 감독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영화에 주목하길. 세이폴라 사마디안 감독의 <온 더 로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상영과 더불어 씨네 클래스 ‘세이폴라 사마디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촬영감독이자 친구로 함께한 30년’을 준비했다. 긴 세월 누구보다 키아로스타미 가까이에 있었던 세이폴라 사마디안 감독이 그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두근대는 가슴으로 기다리고 있다.

이승준 <지금 얘기해도 돼요?>
다큐멘터리 전체 라인업에서 가장 먼저 선정한 작품. 보자마자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 없는 소재인데, 어떻게 이런 소재를 다룬 감독이 이제껏 없었을까 싶게 만드는 영화다. 설득이나 주장, 혹은 계몽을 의도하지 않고 10대 소녀들 곁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다큐멘터리스트의 태도가 무척 귀하다. 이승준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역대 최고.

세이폴라 사마디안 <온 더 로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자동차를 타고 이란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사람과 풍경의 우연한 만남을 포착한 로드무비. 주인공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다. 그가 위대한 작가주의 영화감독임은 잘 알지만 이토록 엉뚱한 장난꾸러기일 줄이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되는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영화. 난 이미 이 영화를 세 번 보았다. 볼 때마다 새록새록 그 아름다움에 눈이 맑아지고 심신이 안정된다.

윤주영 <소리그물>
처음에는 재개발을 앞둔 동네를 다룬 소재인가 했다가 곧 ‘그게 아니네!’와 ‘이게 뭐지?’ 사이를 오가다가 어느새 날카롭게 포커싱되는 영화. 차츰 깊어지고 생소해지고 심란해지는, 자아 성찰의 기록. 용감하고 도전적인 이 영화 앞에서 사적인 호오는 사소해진다.

페가 아항가라니 <리허설 포 레볼루션>
어떤 삶은 그 자체로 영화가 된다. 비극적 현실이라는 콘텍스트가 강력한 개인의 드라마와 만나면 그 다큐멘터리는 무적이 된다. 어떤 영화도 이런 영화를 이기기 쉽지 않다. <리허설 포 레볼루션>이 그런 영화다. 다큐멘터리의 힘을 실감하게 하는 뜨거운 영화로 칸영화제 황금눈상을 수상했다.

임선애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예술가를 다룬 영화의 공식을 깨뜨린 예술가를 위한 영화. 90대에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점에 먼저 놀라고 예술가 연하지 않는 예술가가여서 더 마음이 가고, 삶과 예술을 자연스럽게 일치시켜가는 그 태도에 경의를 느꼈다. 김윤신의 타임라인에 자신의 나이를 포개보는 임선애 감독의 섬세한 시선이 영화의 유니크한 무드를 만들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