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혁신 이후. 202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이끄는 정한석 집행위원장과 한국 영화 섹션에 새롭게 임명된 정지혜 프로그래머의 시선은 확장을 향해 있다. 보다 풍성하게, 보다 정확하게.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빛나는 순간을 위해 가장 오래, 맹렬히 분투하는 두 사람을 만나 애정을 품은 영화제의 면면에 대해 물었다.

재킷과 셔츠 모두 Fendi.

부산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서 맞이하는 두 번째 해입니다. 개막까지 한 달여(인터뷰 시점 기준으로) 남은 지금은 어떤 시간을 보내는 중인가요?

개막에 인접한 시기의 하루는 일주일과 같다고 할 정도로, 저를 비롯한 영화제 팀 모두가 매일 엄청난 밀도로 개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새롭게 결정되고 변동되는 사항이 많아서, 오늘 아침에도 몇 가지 회의를 하고 왔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면 또 다른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요.(웃음)

작년 취임 직후 한 인터뷰에서 “내년에는 제게 5개월이 아니라 12개월이 주어진다는 것. 이 점이 아주 기쁩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12개월의 시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어떤 마음이 드는지요?

얼마 전 우연히 당시 인터뷰를 다시 보게 됐는데, 그 부분에서 말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물론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습니다. 당시엔 온전히 1년이 주어진다면, 더 큰 비전을 세우고, 그 안에서 보다 긍정적인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이를 수행해왔습니다. 다만 그 말을 할 때에는 프로그래밍을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에 앞선 일들이 산재해 있더군요. 집행위원장을 맡은 뒤에 거쳐야 하는 행정적인 문제들의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이는 제가 잘 알고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습하고 실행하는 데 5개월 정도는 보낸 것 같아요. 다행히 제가 가진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환경에 적응이 빠르다는 점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결과적으로 12개월이 주어진 덕분에 올해는 보다 새롭고 풍성하게 영화제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앞으로 꾸려갈 부산국제영화제를 생각하며 가장 중심에 둔 건 무엇이었나요?
제일 중요한 건 작년에 신설한 경쟁 부문의 안착이었습니다. 제30회를 기점으로 영화제가 대단히 큰 모험을 감행한 것이기 때문에, 경쟁 부문이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되고 알려지고 수용될 것인가 하는 부분이 큰 관건이거든요.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올해 A-리스트 영화제로 포함된다든지―국제영화제작자연맹(FIAPF)이 개편한 국제영화제 인증 체계에서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 최고 등급인 ‘A-리스트’로 공식 선정되었다.― 경쟁 부문 대상 수상작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국제장편영화상 출품작 자격을 얻는 등 낭보가 들려왔습니다.

A-리스트 발표 소식을 들은 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전 세계에서 칸, 베니스,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포함해 단 17개 영화제만 붙는 ‘A-리스트’라는 수식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요.

최종 결정이 났을 때 챗GPT에 ‘국제영화제’라고 명명한 것이 몇 개나 있는지 물은 적이 있는데, 대략 계산하면 1년에 수천 개 정도 된답니다. 사실 처음에는 17개면 흔히 말하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보다 많은 수니까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국제영화제 수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나서 정량적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사실 그 소식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해당 연맹의 주요 담당자들과 미팅하는 자리에서 조금 이르게 알게 되었어요. 당시 우리 영화제의 어떤 부분을 놓고 평가했느냐고 물었고, 지난 2년간 낳은 결과, 그러니까 2024년과 제30회를 맞아 변화를 추구한 2025년에 이룬 성과에 대한 결론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가 염원한 경쟁 부문 안착을 포함해 영화제의 긍정적인 부분이 보다 넓은 세계에서 공감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지난 9월 7일에는 영화와 영상 콘텐츠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국제회의 ‘뤼미에르 정상회담(Lumie‵re Summit)’에 박광수 이사장님이 참여해 영화제의 확장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도 가졌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직 세부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를 계기로 주요 국제영화제와 협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계속해 세계 영화계 안에서 영화제는 무엇을 해야 될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러한 낭보들은 부산국제영화제의 근본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꽤 오랫동안 영화제에 관한 표현 중 다소 부정확하다고 생각해온 말이 있습니다. ‘단순히 상영을 넘어’, 이는 틀린 말입니다. 상영은 단순한 것이 아니며, 영화제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영화제를 왜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영화가 상영되고, 관객이 그것을 본다는 것, 그 요점 안에서 모든 것을 확장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를 중심으로 놓고 조금씩 차곡차곡 영화제를 채워나간 것이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산업적 도약도 이뤄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신 영화제의 기본이자 중심인, 상영작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경쟁 부문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올해 경쟁 부문에 선정된 작품의 라인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요?

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경쟁 부문을 선정하는 과정은 간단합니다. 그저 아주 단순한 기본만 지키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아시아 작품을 선택한다’. 이를 전제로 출품작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이에 따라 작품을 추려나갔습니다. 이 과정을 거쳤기에 올해 경쟁 부문에 선정된 작품 13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연히 작품성입니다. 이 작품들이 올해 아시아의 빛나는 수작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아시아 각국 스타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의 비중이 늘어난 것도 주목할 점입니다. 이처럼 동시대 아시아의 수작이자 화제작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기계적인 안배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섹션을 작년에 처음 신설할 때부터 강조한, 기존의 거장 감독과 재능 있는 신예 감독들이 함께 어깨를 겨루는 플랫폼으로서 그 면모가 올해 더욱 두드러집니다. 예컨대, <빵과 책>의 마지드 마지디처럼 전설적인 감독의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날의 태주>의 임하연 감독처럼 빛나는 신인 감독의 작품도 있습니다. 한편 경쟁 부문에서도 올해 영화제의 큰 특징 중 하나인 애니메이션 작품의 약진을 보여주는데요, 경쟁 부문 신설 두 해째에 염규복 감독의 애니메이션 <긴긴밤>이 경쟁 부문에 선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작품을 보면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부산을 찾는 감독과 배우의 면면도 작년 못지않게 화려합니다.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된 양자경부터 신작 <내일은 이름이 있다>의 이자벨 위페르, <멜랑콜리아> 특별상영으로 찾는 샤를로트 갱스부르까지, 관객을 설레게 하는 배우들의 이름이 연이어 공개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마릴린 먼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영화 <플레시 임팩트>로 매기 질렌할 배우 겸 감독이, 영화 <그래비티>의 상영과 마스터 클래스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처음으로 내한할 예정입니다. 이 외에도 차이밍량 감독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허안화 감독, <천국의 아이들>을 만든 마지드 마지디 감독,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린타로 감독 등 저명한 해외 감독들 또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물론 관객이 사랑하는 국내 감독과 배우 라인업도 작년에 이어 역대급이라 언급될 정도로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입니다. ‘액터스 하우스’에 김고은, 김민하, 류승룡, 신민아, 이민호, 주지훈 배우가, 문화계 명사들이 자신의 영화적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 작품을 선정해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까르뜨 블랑슈’에는 김지운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 그리고 해외 게스트로 판빙빙 배우가 함께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역대급을 경신하는 라인업입니다.

지난해를 경신하는 성취를 이 루고 싶었고, 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건 사실입니다.(웃음)

한편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과거와 미래를 조명하는 특별전 <일본 애니메이션 특별전: 광기의 걸작, 전율의 기대작 12+1> 또한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영화제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영화계에서, 또 대중 사이에서 빠르게 변하는 첨단을 놓치지 않는 겁니다. 이를 기민하게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보았을 때 작년 중국과 일본의 흥행 1위 작품이 모두 애니메이션이라는 지점이 보였습니다. 또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을 소재로 전 세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성지이자 전통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들여다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럼 어떻게 들여다볼 것인가,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광기 어린 걸작들을 한번 보자. 단, 한국에서 거의 상영되지 않은 작품들, 그중에서도 오리지널 극장용 작품에 한정해보자, 이런 식으로 여러 제약을 걸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관객이 평소에 접하기 어려웠던 희소성 있는 고전 작품 한 묶음을 꾸렸고요. 또 한편으로는 아직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신작을 한 묶음으로 구성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외에도 프로그래머들이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각 섹션에 애니메이션 작품이 골고루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경쟁 부문에도, 비전에도, 단편, 월드까지 다 퍼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이라는 거대한 지금의 흐름을 특별전과 각 섹션을 통해 감지할 수 있을 거라 자부합니다.

작년 취임 후 집행위원장으로서 꿈꾸는 변화에 대해 ‘확장’이라는 표현을 하 셨습니다. 또 이를 한 해로 끝내지 않고 더 공고하게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계 획이자 바람도 전했는데요. 이를 위해 올해 어떤 일들을 도모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아마 ‘정확한 확장’이라 표현했을 겁니다. 그럼 확장이 정확해지려면? 관객이 보기에 편해야 한다는 답이 나옵니다. 냉정하게 그간 부산 국제영화제의 과오를 몇 가지 살펴보았을 때, 관객에게 많은 불편을 드 린 것이 예매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초에 관객서비스실을 별 도로 신설하고, 그 안에 티켓시스템팀을 만들었습니다. 그 팀이 올해 초부터 티켓 예매와 관련한 많은 규정을 정비했고, 시스템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올해 영화제 기간에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대형관 중심으로 기존 1일 4회에서 1일 5회로 상영 횟수를 늘리기로 했 습니다. 관객이 제일 많은 날에 작품을 더 볼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과감하게 한 회씩 더 추가한 것입니다. 이렇듯 관람 기회를 보다 편하고 넓게 확장한 것이 올해의 주요한 개선 사항입니다.

약 한 달 뒤면 지난 1년간 준비한 영화제가 관객과 만나게 됩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어떻게 펼쳐지고, 마무리되길 바라나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많은 관객이 저희가 준비한 영화제의 면면을 잘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사실 영화제라는 것이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리 화려하지만은 않습니다. 제가 집행위원장으로서 새롭게 보게 된 면인데, 정말 전 직원이 헌신하며 일을 합니다. 영화제란 게 그래야만 완성될 수 있는 어떤 불가사의한 모델이거든요. 그래서 모두의 헌신이 담긴 영화제가 정량적으로든 정성적으로든 계속 긍정적인 평가들을 성취해나가면 좋겠다는 또 하나의 바람이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영화제를 꾸리는 입장에서 이를 온전히 즐기기는 어려우리라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이 순간만큼은 즐거웠다,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을 꼽는다면요? 위원장이 된 이후 부산국제영화제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인가요?

영화제 집행위원장끼리 모여서 농담조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영화제는 남의 영화제라고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다른 영화제에 가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거든요. 그 재미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찾아보라면…(웃음) 한참 고민하고서야 몇 장면이 떠오르긴 하네요. 작년 경쟁 부문 심사위원 중 한 분인 코고나다 감독이 수상작 확정 이후 장률 감독을 깊이 존경하고 이번 작품이 너무 좋았다며 애정을 드러내어, 사무실에서 두 분을 만나게 해드렸어요. 그 자리에서 코고나다 감독이 장률 감독에게 당신의 영화가 지닌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미국의 영화 관계자나 저널리스트에게 알리고 싶다며 다른 작품들도 보여줄 수 있냐고 했어요. 심사위원으로, 그러니까 일로써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엄청난 자극을 받는 작품을 만나고, 이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리고 당시 코고나다 감독이 장률 감독의 <루오무의 황혼>을 보고 자신의 차기작에 큰 영감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 작품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합니다. 이렇듯 뛰어난 두 예술가가 서로 교감하는 순간을 우리가 만들어주었다는 것, 그리고 이를 목도한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또 배우에서 연출가로 변신한 서기가 첫 장편 연출작으로 감독상을 받았을 때, 그 쟁쟁한 배우가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즐거웠습니다. 사실 집행위원장 입장에서 10일간의 레이스는 정말 내내 달린다고 할 정도로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간중간 오픈 시네마 작품을 상영 중인 야외 상영관을 지나면서, 멀리 있어서 화면은 안 보이는데 사운드가 들릴 때, 그게 그렇게 애틋하게 느껴져요. 영화의 사운드와 야외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소리가 뒤섞여 들릴 때면, ‘아, 이 순간을 위해 우리가 그간 분투해왔구나, 잘했네, 됐다’ 이런 느낌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