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혁신 이후. 202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이끄는 정한석 집행위원장과 한국 영화 섹션에 새롭게 임명된 정지혜 프로그래머의 시선은 확장을 향해 있다. 보다 풍성하게, 보다 정확하게.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빛나는 순간을 위해 가장 오래, 맹렬히 분투하는 두 사람을 만나 애정을 품은 영화제의 면면에 대해 물었다.

올해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를 맡으며 부산국제영화제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 직책이 맡겨진 순간,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간 필자나 모더레이터, 심사위원 등으로 인연을 맺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 애정을 품어온 터라 그만큼 기쁘면서도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습니다. 다만 그 책임감이 버겁고 힘들게 느껴지진 않아요.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유의 설렘과 즐거움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서울독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남도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해온 입장에서 부산국제영화제는 형태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달리 보이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크게 보이는 건 규모와 형식인 것 같아요. 이는 아주 선명한 조건이자 그 자체로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조직의 규모는 물론이고, 아우르는 영화의 범주도 지금까지 일해온 영화제 중 가장 크고 방대합니다.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대중영화부터 작은 규모의 영화―내적 힘이 작은 게 아니라, 제작 규모가 작은―까지 모두 부산국제영화제라는 이름 안으로 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프로그래머로서는 더 다양한 영화를 보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라 생각해요. 그 점이 제게 큰 자극을 줍니다.
프로그래머로서 상영작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세운 기준이나 기조는 무엇이었나요?
분명한 기준을 세워 적용하기보다 보다 유연하게 작품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작품은 꼭 하나 포함하겠다거나 이 배우가 나온 건 해야겠다는 조건을 두지 않은 거죠.
전제를 두지 않고 작품의 면면을 살피려고 한 거겠죠?
맞아요. 새로운 영화는 쉼 없이 등장하고, 산업의 동향도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앞서서 틀을 만들지 않고, 그 흐름을 잘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기계적으로 안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균형을 맞출 수 있겠다 싶었고요. 결국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신 관객들이 어떤 작품을 보더라도 올해의 흐름 안에서 중요한 영화를 봤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올해 가장 눈에 띄는 한국 영화는 아무래도 경쟁 부문에 선정된 3편의 작품입니다.
선정된 3편 중 2편이 감독 데뷔작이고, 다른 하나는 두 번째 장편이라는 점에서 올해 경쟁 부문의 한국 영화는 놀라운 신예들의 등장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를 관객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담당 프로그래머로서 무척 기대됩니다. 한 편씩 잘 소개하고 싶은데요.(웃음) 우선 <그날의 태주>는 비범한 감독의 출현이라고 자랑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임하연 감독은 데뷔작임에도 서사를 축조해가는 능력이 탁월하고, 촬영이나 음악이나 컷의 운용 등 모든 부분에서 굉장히 높은 완성도를 이뤄냈습니다. 다음으로는 염규복 감독의 데뷔작 <긴긴밤>이 있습니다. 독자층이 두터운 장편 동화 <긴긴밤>을 애니메이션영화로 완성해냈는데, 원작이 지닌 강력한 에너지를 아주 잘 캐치해 영화로 옮긴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코뿔소와 펭귄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묵직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정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면도>가 있습니다. 한국 장르영화의 새로운 길을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이한 매력이 있어요. 심리, 공포, 미스터리 장르가 뒤범벅돼 만들어내는 쾌감이 상당합니다. 이렇게 저마다 색이 다른 3편의 경쟁작이 모두 한국 영화라는 것이 올해 저의 자랑입니다. 아, 너무 마음껏 자랑했나요?(웃음)
말씀하시는 얼굴에서 애정이 듬뿍 느껴집니다.(웃음)
경쟁 부문에 선정된 작품 외에도 다양하게 포진한 모든 한국 작품이 하나하나 소중하고 애틋합니다.
조금 더 자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관객이 놓치지 않고 봐줬으면 하는 작품이나 프로그램을 소개한다면요?
비전–한국 섹션에선 앞으로 극장가를 더 풍성하게 만들 빛나는 작품들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습니다. 온 스크린 섹션에는 저마다 개성 강한 작품들이 포진해 있고, 거장의 신작 또한 보다 빨리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올해는 특별기획 프로그램 <아름다운 시절, 안성기>를 통해 ‘한국 영화 안에서의 안성기, 안성기를 통해 바라보는 한국 영화’라는 주제로 한국 영화사에 남긴 안성기 배우의 선명한 발자취를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으니 부디 관심을 기울여주시기 바라요.
부산에 꽤 오래 있어야겠어요.(웃음)
꼭 다 보고 가셔야 합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오는 관객들은 체류 일정을 넉넉히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올해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더불어 앞으로 이어질 여정에서 잘 이어가고자 하는, 혹은 새롭게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로서 맞은 첫해인 만큼, 지난 30년간 부산국제영화제가 잘 이룬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 섹션을 풍성하게 만드는 기획으로 영화제를 잘 마치는 것이 지금 저에게 주어진 가장 큰 미션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후엔 당장 뭔가 큰 것을 바꾸기보다는 작지만 알차게, 내실 있는 기획을 더해나가고 싶고요. 그래서 영화제가 열리는 내내 관객의 목소리를 잘 경청하려 해요.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인에게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관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관객의 힘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 앞으로 나아갈 힘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의 관객이 보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것, 바라는 모든 것을 영화제 내내 잘 듣고 다음을 고민해보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제를 잘 마치는 것’은 곧 보다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올해의 성취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그렇죠. 모든 한국 작품의 티켓이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싶고, 매일 매회 매 상영관이 꽉 찼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중요하고 분명한 바람입니다.(웃음) 그래서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선 분들이 어떤 의미로든 피드백을 많이 남겨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상이 성과의 전부는 아니지만, 경쟁 부문에 선정된 작품의 수상 소식도 듣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해외든 국내든 또 다른 곳에서 상영 기회를 얻길 바라고요. 부산을 시작으로 여정을 떠난 작품들이 거대하고 의미 있는 순환을 만드는 것이 제가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