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인물 사진을 찍어왔으니 당연히 첫 개인전의 중심은 포트레이트일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32점의 꽃 사진을 전시한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래전부터 선물로 꽃을 받으면 버리지 못하고 빈 병에 꽂아두었다. 큰 통에 모아두기도 하고. 물에 꽂으면 활짝 피었다가 며칠 못 가서 시들어 결국 버리게 되는 과정이 싫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마르고 기울며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진으로 남기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생을 다해가는 이 꽃을 아름답게 부활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돌아가신 할머니를 염습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게 마치 다시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 일을 경험한 후 ‘아, 나도 꽃에 메이크업(염)을 해야겠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됐고, 이 시리즈를 이어가게 됐다.
단순히 꽃을 사진으로 찍는다기보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꽃에 투영한 결과라고 봐도 될까? 꽃을 찍는 게 목표는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선물로 나에게 왔고, 그걸 버리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잃는 감정을 겪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든 감정을 전이해 찍었을 뿐이지, 꽃 자체가 중요했던 건 아니다.
생과 사에 대한 사유는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처음 죽음이란 단어가 각인된 것 같다. 그때부터 내재되었던 무언가가 이후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주된 사유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진가가 되어 다양한 인물을 찍으면서 그 사유를 자연스레 작업에 투영한 것 같다. 어쩌면 이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작가가 창작물에 자신의 일부를 불어넣기 마련이니까. 이런 의미에서 살펴보면 이번 꽃 작업은 여전히 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미학적으로는 화려한 색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이 꽃에는 이런 색을 칠해야지’ 하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가장 화려하고 강한 색으로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핑크, 오렌지, 블루, 퍼플 등으로. 다른 모양, 다른 색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이니 보다 생기 있는 형태이기를 바랐다.
32점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이 뭔가? ‘#10’. 2003년 무렵에 받았으니까 20년 가까이 내 곁에 머무는 가장 오래된 꽃이다. 이번 작업을 풀어가는 첫 단추가 되는 사진이라는 점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꽃이다.
긴 시간 인물 사진을 찍어온 만큼 꽃을 찍을 때 인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존재했을 것 같다. 작업할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전시 추천사를 써준 정연심 교수가 ‘분명 꽃 사진인데 마치 사람을 찍은 것 같다, 왠지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고 썼더라. 그 말을 듣고 ‘내가 꽃을 사람처럼 바라봤구나’ 하고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30년 넘게 인물 사진을 찍었으니, 그 습관을 버릴 수 없었던 거다.
전시를 감상하는 관람객도 그 점을 인식하면 좋을까? 작가로서 바라는 관람 방식이 있다면?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에 공감한다. 전시장에 작품이 걸리기 직전까지는 나의 몫이지만, 전시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관람객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실은 전시 추천사나 작가 노트도 쓰지 않으려 했다. 온전히 관람객의 의도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 개인전이니 최소한의 가이드는 남겨두자는 주변 사람의 조언을 듣고 만들기는 했는데, 읽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촬영한 꽃들은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너무 오래되어 부서진 것을 제외하고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고민이 되는 게 전시가 시작되면 또 새롭게 받게 될 꽃들이다. 또 버리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축하의 의미로 쉽게 사 가던 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대답이다. 공지를 할까 싶다. 나를 위한 꽃을 딱 한 송이만 가져오는 거다.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그러면 나는 그걸 잘 보관했다가 10년 후에 이 작업을 다시 하는 거다. 윤회하듯 생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