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 혹은 아시아 여성을
어떻게 보여줘야겠다는 의도로 카메라를 든 적이 없다.
10여 년간 가족과 친구, 지인, 그리고 서울이라는 도시의 면 면을 찍어온 사진을 모아 사진집 을 발간했다. 어떤 의도로 기획한 책인지 궁금하다. 뒷이야기가 있다. 사실 이 사진집은 한 브랜드와 협업하며 시작한 프 로젝트였는데, 완성 단계에서 무산되었다. 책에 실리지 못 하고 부유하게 될 작업물을 두고 고민하다 결국 개인 작업 의 형태로 사진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목이 <Almost Something>인가? ‘무언가가 될 수 있었던, 거의 될 뻔한’이라는 의미로. 어떤 이에게는 아직 무엇(something)이 될 수 없다? 아직은 닿을 수 없는?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가 다시 사진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은 제목이다. 이 사진들이 수신을 거부당한 러브레터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약간 자조적인 의미를 담기는 했다.(웃음)
완성된 책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나? 나는 사진 한 장 한 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 아니어서 꼭 사진집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브랜드의 제안이 없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작업인데, 막상 만들고 보니 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과 결이 달라서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고. 앞으로 이런 작업을 더 많이 해야겠다는 동력도 얻었다.
사진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반응 또한 궁금하다. 대부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웃음) 대중에 노출되는 것 자체를 신경 쓰는 친구도 있고, 부모님은 진짜로 책에 실리는 컷이 맞는지 의아해했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대가 없이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거나 예쁘게 찍어주겠다는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지 않고, 책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뒤 이에 상응하는 모델료를 지불하고 촬영했다. 다만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긴 했다. 잘 모르겠다, 한국 사람들이 완벽하게 갖추지 않은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데 약간 거부감을 느끼지 않나 싶다.
한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이야기하며 ‘상처 입기 쉬운’, ‘취약한’이라는 의미의 ‘vulnerable’이라는 형용사를 썼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뭔가 스스로 취약하다고 여기는 부분, 예를 들어 유약한 모습이나 정돈되지 않은 모습 혹은 자신의 내면을 공개하는 데 두려움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사실이 조금 슬펐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그대로도 나무랄 데 없는데 굳이 자신을 검열할 필요가 있나 싶었던 거다. 지금 이 사진집이 런던, 파리, 뉴욕, 도쿄 등 여러 나라의 도시에서 발간되었는데, 나는 이를 염두에 두고 한국 혹은 아시아 여성을 어떻게 보여줘야겠다는 의도로 카메라를 든 적이 없다. 누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뿐더러, 그 시선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 말은 완벽히 계획되지 않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의 사진을 추구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그렇다. 나는 패션 사진을 찍을 때도 여지를 많이 남기는 편이다. 이 작업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현장의 분위기가, 그 외의 어떤 것이든 사진에 참여할 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내 예상을 벗어나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의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취약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열어두고 촬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진가가 된 것도 계획한 일이 아니라고 들었다. 이 역시 자연스럽게 흘러온 것이라고.(웃음) 런던에 살게 된 것도 사실 어쩌다 보니.(웃음)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갔고, 1년을 예정하고 간 건데 생각보다 체류가 길어지면서 결국 졸업까지 하게 됐다. 졸업 작품으로 매거진을 만들게 됐는데, 거기에 넣을 사진을 찍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사진 찍는 걸 재미있어 하기는 했지만 사진가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좀 신기하다.
사진의 어떤 점에 매료된 건가? 학교의 한 클래스에서 흑백사진을 필름으로 찍고 현상하는 과정을 배웠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현상하는 과정도, 나온 작업물을 보는 것도, 그게 모여서 기록이 되는 것도 좋았다. 그즈음부터 한국에 갈 때마다 필름 카메라로 가족과 친구들을 찍기 시작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 일에 스며들었다.
사진가이자 발행인으로 발간한 매거진 <A Nice Magazine>을 찾아서 봤다. 패션지를 표방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패션지와 사뭇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형식을 파괴했다고 할까? 내가 반골 기질이 좀 있다. 서점에 가면 수많은 매거진이 있는데, 그런 걸 하나 더 만든다고 고착화된 구조가 바뀔까 싶었고, 같은 형태를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형식 파괴에 초점을 맞췄다. 정확히는 패션지가 아니라 패션지에 대한 코멘트를 매거진으로 엮은 형태라 생각하면 된다. 제목도 약간 비꼬는 의미로 지었다. 나이스한 매거진 중 하나라는 뜻으로.
사진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이후 <i-D> <보그> <데이즈드> <리에디션> 등의 매거진과 구찌, 미우미우, 마크 제이콥스 등 브랜드의 화보와 캠페인 작업을 주로 해왔다. 지난해 3월에는 해리 스타일스의 앨범 커버 작업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고. 그간 유럽과 미주 등지에서 주목받는 아시아 여성 사진가를 보기 힘들었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시류를 잘 탄 것 같다. 내가 사진을 시작하던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최근 몇 년간 어떤 작업에서든 다양성이 대두하면서 나와 같은 아시아 아티스트도 많은 기회를 얻은 것 같다. 다만 이 흐름이 근본적인 변화인지 아니면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어쨌든 아예 기회가 열리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지 않나 싶다.
본인의 작업물을 인종이나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바라본다는 것을 체감한 적도 있나? 거의 없다. 내 이름은 문한나이 고, 영어로 쓰면 Hanna Moon이다. 그래서 이름만 들으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아니면 혼혈인지 모호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점이 좋다. 나를 잘 모른 채로 작업물을 보고 나중에야 ‘네가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게 더 흥미롭고, 그러기를 바란다. 한국인, 여성, 레즈비언 등이 나의 정체성이고 그걸 숨길 생각은 없지만, 이런 사실을 앞세워 일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Almost Something> 마지막 페이지의 글에 ‘한나 문은 그녀의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를 설명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내 사진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한국인으로서, 런던에 사는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담아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한국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는 작업을 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나의 배경이 우선시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래서 나부터라도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매거진도 계속 발간할 예정인가?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던 <A Nice Magazine>을 2권까지 발간했다. 3권을 만들고 있기는 한데, 한 5년째 진행 중이다.(웃음) 담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하나씩 채워가는 형태라 굉장히 오래 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