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그저 A에서 B로 가는 문제인 경우는 드물다.”

 

정지돈 작가의 신작 소설집은 움직임 자체와 그것의 구체적인 경험이 함의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탐구한다. 그의 글은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방향 지시등은 꺼둔 상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첫 장을 펼쳤을 때 이 여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지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책장을 덮은 후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존재, 움직임의 방식, 그 속도와 리듬을 새로이 감각하게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제목에 관한 질문을 이미 숱하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만큼 제목이 주는 첫인상이 강렬하다. 그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긴 한다. 그래도 사람들이 예상보다 놀라진 않은 듯하다. 너무 어려워하거나 화를 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작가 앞이라 티를 덜 내는 건지. 심지어 정지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도 있어 흥미로웠다.

우선 길이부터 파격적이다. 요즘은 뭐든 준말로 만드는 세상인데. 그러잖아도 친구들이랑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웃음) 그런 거 잘 만드는 분들 센스가 참 대단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땅거미’라고 한다.

동명의 단편 제목을 작품집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몇 가지 공통 테마는 있다. ‘샌디에이고’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지명이 주는 먼 곳의 느낌. 이동 수단인 ‘운전’. 그리고 ‘소형 디지털 녹음기’, ‘구술’,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이라는 것은 파편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다. 이 모든 요소를 소설에서 찾을 수 있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아일린 마일스(Eileen Myles)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구절을 그대로 딴 것이다.

언제부턴가 정지돈 작가에게는 ‘틀을 깨는’, ‘실험적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듯하다. 이런 표현에 동의하나? 동의하지 않는다.(웃음) 실험이라는 말 자체가 참 어렵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평론가들조차 실험이라는 걸 진짜 좋아하는지, 실험적인 소설이 나타나길 바라기는 하는지, 또 실험이 뜻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이런 것들. 누군가는 내 작품이 너무 실험적이어서 싫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는 건 진짜 실험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작 나 자신은 내 작품이 아주 낯설다거나 새로운 것 같지 않다.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이상한 실험이 예술계에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사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배경이 미국일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파리가 등장한다. 그렇게 짐작하는 게 당연하다. 보통은 소설 주제나 내용을 소개하거나 인과적인 설명에 들어맞는 제목을 짓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나는 소설의 제목을 정할 때 보통 작품과 약간 거리를 둔다. 작품과 제목 사이에 어떤 여백, 틈이 존재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 상관이 없는 건 아니고 뭔가 맞는 듯 자꾸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완전히 들어맞지 않음으로써 계속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느낌이 좋아서 언제나 그런 제목이 찾아
오길 바란다.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은 발표 지면이나 시기가 서로 다르다. 애초에 어떤 완결성을 염두에 두고 연작 형태로 작업했나? 그런 건 아니다. 첫 작품을 쓸 때쯤 ‘모빌리티’라는 학문에 관해 알게 되었고, 흥미로운 테마로 다가왔다. 그래서 단편을 하나 썼는데 모빌리티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작품을 쓰면서 등장인물의 이름을 전작과 똑같이 해보면 어떨까 싶었고. 그런데 한 편씩 읽어보면 주인공의 이름은 같아도 어딘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모빌리티에 대해 다양하게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써보자 했더니 네 작품 정도가 나왔다.

2019년부터 2022년 사이에 발표한 작품을 한 권으로 엮었다. 딱 팬데믹과 겹치는 기간이다. 나는 원래 책을 낸 뒤에 감상적으로 뒤돌아보는 편은 아니다. 네 편 중 첫 소설인 <땅거미>가 2018년에서 2019년 사이에 쓴 작품인데, 그다지 먼 과거가 아님에도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다. 2년이라는 시간이 뭉텅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마블 영화에 나오는 타노스의 블립처럼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온 느낌이랄까. 존재나 감각이 달라진 듯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이후에 쓴 것을 보면 기분이 약간 이상하다.

격리와 단절이 일상화되었던 코로나19 기간에 모빌리티라는 주제에 집중했다는 사실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정말 그랬다. 일차적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답답함이 컸을 것이다. 당연시하던 행동을 못 하게 되니 소중함을 알게 된 거다. 물리적 이동도 그렇지만 국제 정세 또한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둥 국수주의가 득세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이동이라는 것이 사실은 정치적 문제라는 점과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새삼 깨달았다.

모빌리티의 어떤 점을 소설로 표현해보고 싶었나?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동이 우리 삶에서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우리는 보통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동이 우리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는 이동과 움직임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요소일 수 있다고 여겨졌고, 그것을 감각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 같았다. 가령 역사적으로 수렵과 채집에서 정착 형태로 바뀌면서 인류의 생활 방식이나 사회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 일상에서도 자동차 소유 여부에 따라 생활 반경이나 즐겨 찾는 장소가 달라진다. 즉, 움직임의 감각이 변하면 도시와 문화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결국 세계를 보는 눈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는 픽션이라는 것이 논픽션, 그러니까 사실 바깥에 있다고 믿지 않는다.”

 

소설 외에 안은별 문화연구자의 덧붙임과 두 사람의 대화를 포함한 구성도 눈에 띈다. 내가 지닌 모빌리티에 대한 생각을 소설에 아무리 녹여냈어도, 얼마간은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에서 모빌리티가 무엇이라고 설명하는 건 아니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분명하게 감을 잡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이런 부분을 채워주는 개념이 담긴 글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은별 씨에게 부탁했다. 특히 모빌리티는 분과 학문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극소수의 연구자만 다룬다. 이 기회에 우리나라에도 알려지면 좋겠다 싶기도 했고, 내가 원래 다양한 구성의 읽을거리가 있는 책을 선호한다.

작품에서는 보니 브렘저, 파울 셰어바르트, 클로드 카엉, 로버트 발로우 등 낯선 예술가들을 호명하고 새롭게 조명한다. 이 중 보니 브렘저의 이야기 속 유튜브 영상을 실제로 찾아보니 내가 읽은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이 더 와닿았다. 빈칸을 채운 작가의 상상력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이다. 원래의 무언가가 있고, 그걸 좀 다르게 상상해보는 거다. 사실 모든 것은 다 어디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갑자기 내면에서 튀어나온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보통 작가들은 어딘가에서 자극받아 글을 쓰면 그 부분을 감추거나 버리지만 나는 그런 걸 드러내는 게 아주 좋다. 한데 그걸 전부 ‘인용’이라고 해버리면 인용이라는 단어의 힘이 너무 세서 곧장 논픽션이라는 장르와 연결하는 착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논픽션이니까 꼼꼼하게 보고 그대로 써야 한다고 여기는 거다. 만약 브렘저 관련 영상을 보다가 어느 순간 쓰고 싶다는 느낌이 확 오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보지 않는다. 꼼꼼히 보면 원래의 것을 벗어나는 내용을 쓸 수가 없다. 경험이라는 게 마냥 좋은 것 같지만, 경험의 문제는 그 이후에 다른 상상을 잘 못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입만 보면, 영감을 받은 상태에서 멈추면, 그 뒤를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픽션을 쓰는 방식도 아니고, 논픽션을 쓰는 방법도 아니다. 그 사이에 내 방법이 있다.

어쩐지 함께 실린 작가 에세이인 <시계 반대 방향으로> 역시 소설의 일부처럼 읽힌다. 물론 소설과 에세이를 쓸 때는 확실히 조금 다른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에세이 영화(essay film)’라고 말하는 장르를 좋아하고, 소위 수필이라고 말하는 것과 소설에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문화적으로 나눠놓았을 뿐. 알고 보면 우리의 인지나 감각 자체가 다 픽션 아닌가. 감각기관이 세계를 받아들일 때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카메라조차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어떤 기술적 한계 안에서 아주 작은 왜곡일지언정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바로 그 왜곡이 픽션인 셈이다.

작년에 발표한 장편 《···스크롤!》에서도 그렇고, 소설에서 흔히 보기 힘든 참고 문헌을 성실하게 밝힌다. 정지돈에게 참고 문헌이란? 일종의 다리다. 사실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도 자주 이야기하지만, 나는 픽션이라는 것이 논픽션, 그러니까 사실 바깥에 있다고 믿지 않는다. 결국 사실은 허구 위에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처럼 사실과 거짓, 픽션과 논픽션을 가른다. 참고 문헌을 통해 나는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거다. 사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가 못 보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

<내부순환>에서 “소설은 꿈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탐색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정지돈 작가가 탐색하는 꿈의 경로가 궁금해졌다. 소설 속 맥락에 비춰 설명하자면, 그 꿈들이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아래에 언제나 있는, 우리가 이루지 못한, 슬쩍 나타났다가 사라진 이런 가능성의 연합이라고 할까. 소설이 그런 것을 다시 부상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있고, 지금도 존재하고, 그 위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책에는 없는 ‘작가의 말’을 청해도 될까? 다양한 이동 수단을 경험해보자. 그리고 다양한 경로를 탐색했으면 좋겠다. 나는 시간이 넉넉한 날에는 일부러 목적지에 닿기 한 정거장 전에 내린다. 그리고 지도 앱을 켜고 어디로 어떻게 걸으면 재밌을지 살핀다. 그러다 보면 평소 갈 일이 없는 길을 걷게 되고, 늘 지내던 도시에서도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부디 많이 걸으며 발견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