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

수천, 수만 개의 한지 조각을 활용해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 작업을 한다.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담긴 색과 선으로
한민족의 정서와 철학을 전한다.

 

서정민 키아프 서울 한국 미술 한지 Kiaf

서정민, ‘선 6(Line 6)’, 캔버스 위에 한지, 200×200cm, 2023

서정민 키아프 서울 한국 미술 한지 Kiaf

서정민, ‘오래된 기억 8(The Old Memory 8)’, 캔버스 위에 한지, 140×140cm, 2021

서정민 키아프 서울 한국 미술 한지 Kiaf

서정민, ‘함성 17(Shout17)’, 캔버스 위에 한지, 150×150cm, 2019

서정민 키아프 서울 한국 미술 한지 Kiaf

서정민, ‘선들의 여행 84(Lines of Travel 84), 캔버스 위에 한지, 150×180cm, 2017

 

세상의 많은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수행을 하며 작업을 이어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떤 마음으로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작업할 때 ‘시작은 있어도 끝을 재촉하지 않는다’라는 묵언수행의 자세로 임해왔습니다. 요즘은 파주의 작업실에서 한지를 재료로 한 회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하루 평균 10~15시간 작업을 하고요. 휴식 시간에는 작업 구상을 하거나 명상을 합니다.

한지 조각을 사용해 작품을 만드시죠. 재료는 어떻게 구하는지, 보통 작품 하나에 몇 개의 한지 조각이 들어가는지 등 그 자세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기본 재료는 지인의 서실에서 서예가들이 유가와 도가 등 동양의 고전 명문과 서체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미완의 습작들입니다.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구입한 종이에 쓰여진 글들이죠. 그것들을 모아 말고, 자르고, 풀을 먹여 건조한 후 다시 일정한 크기로 토막 내고 쪼개 한지 조각을 만들지요. 이 과정은 선조들의 두루마리 문화에서 차용했습니다. 작품당 수천에서 수만 개의 한지 조각이 사용되고요.

한지 조각들을 캔버스 위에 ‘그린다’ 혹은 ‘심는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평면과 입체 중 무엇에 더 가까울까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지 조각을 캔버스 위에 쌓고 새기는 과정을 거치죠.

처음 한지 조각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초기에는 유화와 수채화로 구상 작업을 했어요. 그러다 한국 미술, ‘K-아트’라고 정의할 수 있는 회화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고, 그 정체성을 찾던 중 우연히 지인의 서실에 쌓인 서예가들의 습작을 보게 됐습니다. 저는 ‘우리 것’에 대한 의미를 ‘정서’로 규정했고요. 서예가들이 쓴 문구들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정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서예가들의 문구 중 유독 기억에 남는 단어나 문장이 있나요? 공자와 맹자가 추구한 유교 철학인 ‘인의예지신’이나 ‘충효사상’입니다. 제아무리 현대화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사회적 통념은 유교 사상과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지요.

한지라는 소재는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가요? 전통 재료인 만큼, 작업을 하며 발견한 한국이나 한국인을 대표할 만한 특성이 있을까요? 닥나무 껍질을 벗겨서 물에 불린 후 두들겨 만드는 한지는 섬유질이 풍부한데 촉감이 부드러운 동시에 질기고, 시각적으로는 은은하고 섬세한 감성을 품고 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반도에 자리한 한국이 과거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겪고 이겨내면서 오천 년의 역사를 지켜온 민족성이 한지의 특성과 닮았다고 느낍니다.

수천, 수만 개의 한지 조각이 캔버스 위에 빚어내는 선(線)과 물결도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선은 제 작품의 근간으로, 땀과 시간을 연료 삼아 캔버스 위에 드러납니다. 조선 시대를 비롯한 한국 근현대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선은 화려하지도, 왜곡되지도 않은 소박미와 여백 속에 절제되어 흘러내리는 곡선미가 특징이지요. 이는 곧 한민족의 정서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에는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나요? 회화의 시작은 선 긋기로 출발합니다. 어떤 작품이든 선은 항상 그 시작의 기획자가 되지요. 제가 추구하는 선은 태초에 신이 세상을 열 때 처음 빛을 내린 지점, 즉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원초적인 선입니다. 인위적이거나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무위의 선으로 노자 철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그은 선을 따라 한지 조각을 심기보다, 심으면서 드러나는 선에 보다 집중합니다.

선의 방향이나 색은 어떻게 정하나요? 색은 저마다 갖고 있는 시각적 온도와 고유의 의미가 있지요. 붉은색이 뜨겁고 정열적이라면 파란색은 차갑고 시원하며, 노란색은 따뜻하고 확장되어 보이는 등 색이 갖고 있는 고유의 온도를 회화적 의미로 부여하기도 하고, 작품에 따라 색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그 가치를 알아본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해외 컬렉터나 전시가 있나요? 주요 컬렉터들은 독일, 프랑스, 미국, 오스트리아, 튀르키예 등 여러 나라 걸쳐 고루 분포되어 있습니다. 유럽을 비롯한 해외 컬렉터들은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유명세나 작가의 명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오직 작품과 작품성 그리고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투자를 목적으로 작품을 구매하기 때문이지요.

최근 몇 년간 한국 미술 시장에 대한 글로벌 갤러리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죠. 아주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분위기로 촉발될 선의의 경쟁과 열정이 한국 예술과 그 시장을 더욱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기대되기도 하고요.

키아프 서울은 예술 애호가나 컬렉터는 물론, 작가들에게도 예술을 기념하는 축제의 장이지요. 맞습니다. 동시에 예술의 가늠자로써 매년 변화하는 국내외 미술의 실체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해를 거듭할수록 키아프 서울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높아진 위상만큼, 저를 비롯한 작가들이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길 바랍니다.

또 어떤 전시에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미국, 벨기에, 프랑스를 비롯해 2025년까지 해외 기획전들이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