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란

쓸모 없어진 단추, 실, 핀을 활용한 설치 작업으로 주목받았고
천연 엄색한 한지로 한지 단추를 개발해
고유의 시그니처를 완성했다.
매화, 독수리, 기와 등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들을 작품에 담아낸다.

황란 한국 미술 키아프 작가 한지

황란, ‘The Red Wind’, 나무 패널에 단추, 비즈, 핀, 110×140cm, 2022

황란 한국 미술 키아프 작가 한지

황란, ‘Beyond the Wind…’, 나무 패널에 단추, 비즈, 핀, 240×120cm, 2021

황란 한국 미술 키아프 작가 한지

황란, ‘잊혀진 물의 치유(Healing oblivious aqua)’, 플렉시글라스에 한지 단추, 비즈, 핀, 300×173cm, 2023

 

요즘 작가님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1997년 뉴욕에서 유학한 후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벽에 설치하는 작품을 주로 만들어왔고, 최근에는 이동 가능한 패널까지 작업 영역을 확장했어요. 귀국할 때면 파주출판도시 작업실에서 어시스턴트들과 매일 작업하고 있어요.

패션 회사에서 일하다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고요. 작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유학 시절에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뉴욕 38번가에 있는 패션 회사에서 자수 도안을 그리는 일을 했어요. 어느 날 회사 한구석에 버려진 단추와 실 더미를 발견했는데, 그게 마치 제 자신처럼 느껴지더군요. 당시 맨해튼 미드타운에 자리한 프리 마켓에서 상인들이 1달러에 팔던 실뭉치나 5달러에 팔던 단추 무더기들이 문득 재료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스튜디오 벽에 단추와 핀, 실을 소재로 한 실험을 시작했고, 그렇게 지금의 스타일이 완성될 수 있었지요.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제가 좋아하는 알렉산더 맥퀸 같은 디자이너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비즈와 단추를 비롯한 재료가 한 작품에 얼마나 쓰이는지 헤아려본 적이 있나요? 벽에 설치하는 작품은 작업 도중에 재료가 추가되는 경우가 많아 그 수를 세기 어렵습니다. 다만 스케치 이후에 그래픽 작업과 레이저 타공을 하는 과정에서는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수천 개에서 수만 개를 오갑니다.

단추를 어떤 방식으로 작업에 활용해왔나요? 지금은 어디서 재료를 구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초기에는 버려진 단추를 그대로 쓰거나, 그 위에 스프레이를 뿌려 재사용했어요. 20년 전에는 의류 부자재를 판매하는 뉴욕 패션 디스트릭트에서 재료를 구했는데, 지금은 거의 한국에서 조달합니다. 제일 많이 쓰는 못 형태의 핀은 줄곧 유럽에 있는 오래된 광산 근교에서 주문하고요. 한지 단추를 만들 땐 색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한지 공장에서 천연 염색한 한지를 직접 고릅니다. 이를 여러 겹 겹친 후 코팅과 타공 작업을 거치죠.

한지 단추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한지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2006년 뉴스를 보던 중, 파리에서 열린 한지 페스티벌 현장에 비가 내렸지만 우리 전통 한지로 만든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당시 단추로 작업하며 한국적인 재료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터라 그때부터 한지 연구에 돌입했지요. 한지는 화학 반응의 영향을 쉽게 받지 않고, 세월이 지날수록 결이 더 고와지고, 수명도 길다는 점에 매료되었어요. 이후 한지 단추를 디자인하고 제작하기 시작했고요. 한지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크게 건조판에서 바로 나온 생지와 이를 가공한 숙지로 나뉩니다. 컬러 단추는 생지를, 흰 단추는 숙지를 사용하고 있어요.

한지를 활용하는 한국 작가로서 경험한 의미 있는 순간도 있나요? 한지에 인쇄한 <팔만대장경>에서 영감을 받아 한글 자모음 단추를 만든 적이 있어요. 덕분에 2015년 유네스코 파리 본부에서 전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한국 작가로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작품에 매화, 나무, 독수리 그리고 기와도 자주 보입니다.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작품 속 기와지붕은 부모님과 절에 다닌 기억에서 비롯되었어요. 서예와 사군자 그리기가 취미이셨던 아버지 곁에 있다 보니 매화가 친근하고 익숙해졌죠. 찰나를 상징하는 매화, 화려한 비상의 순간이 인상적인 독수리,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봉황에 천착하는 이유는 뉴욕에서 9·11 테러를 겪으면서 죽음과 환생, 왜곡된 삶의 현상에 눈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이 주제들은 작품의 겉에 드러나는 물리적 상징인 셈이군요. 궁극적으로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미국 태생의 작가 T. S 엘리엇이 “인격과 감정을 가진 사람만이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의 의미를 안다”라는 말을 남겼죠. 저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아름다움과 공포, 자유와 구속 등 다양한 이분법적 메시지에 관심이 많아요. 매화를 통해서는 극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지만 이내 지는 그 속성을, 궁궐 이미지에는 화려함 이면의 헛된 욕망과 허상, 권력의 무상함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작가나 작품에 대한 글로벌 갤러리들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실감하고 있나요? 한국에는 오래전부터 훌륭한 작가들이 많았는데, 최근 높아진 K-팝에 대한 관심이 이제야 우리 문화예술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해 9월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전시가 열린다고 하더군요. 이 또한 흥분되고 멋진 일입니다.

해외에서 진행한 전시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2004년 롱아일랜드 대학 내 허친스 갤러리(Hutchins Gallery)에서 19m 길이의 벽 양쪽에 ‘부처 시리즈’ 작업을 했어요. 한쪽에는 실과 핀을, 반대쪽에는 단추와 핀을 사용해 작품을 완성한 후 전시가 끝남과 동시에 해체했습니다. 이와 같은 무모한 도전을 기반으로 여태껏 설치 작업을 지속하고, 다양한 시도도 해온 것 같아요. 또 싱가포르의 에르메스 재단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매화 시리즈’에 영상 을 매핑하는 작업을 했는데, 전시를 본 아시아 문명 박물관(ACM; Asian Civilisations Museum)의 큐레이터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 시대 유물전에 제 작품을 초대했습니다. 조선 시대 평민의 전통 혼례식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죠. 제 작품이 컬렉팅됐던 경험도 기억에 남습니다. 2012년 뉴욕 첼시에서 진행한 전시에서는 휘트니 미술관 관장이 작품을 구매했고, 브루클린 미술관 관장이 마이애미 아트 페어에서 제 작품을 눈여겨본 것을 계기로 브루클린 미술관에 제 작품이 소장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 다뤄보고 싶은 재료나 소재가 있나요? 주거 공간이 현대적으로 변화하며 전통 자개 공예로 만든 가구가 대량 폐기되거나 해외로 헐값에 팔려 나간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를 매화 시리즈와 접목할 수 있는 작품을 몇 년간 구상해왔어요. 아직 실험 단계이지만, 꾸준히 진행 중입니다.

올해 키아프 서울에서는 어떤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요? 더불어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전시나 프로젝트가 있나요? 키아프 서울에는 하이브리드 생명체를 실로 표현한 설치 작품과 한지로 만든 매화 시리즈를 출품합니다. 또 올해 9월 1일부터 열리는 청주 공예 비엔날레에 참여하고, 부산의 ‘아시안 아트 웍스(AAW; Asian Art Works)’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에요. 내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공식 그룹전, 뉴욕의 레일라 핼러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등도 앞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