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한국 작가가 유망한가? 누가 더 유명해질 것인가?” 초보 미술 애호가라면 갖고 있는 궁금증일 것이다.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간단한 답변은 “우리나라를 넘어 해외 갤러리에서 소개하는 한국 미술가를 살펴봐야 한다”라는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은 1960년 대부터 주목 받아왔지만, 21세기 이래 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등장하고 있어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먼저, 세계 빅 5 갤러리가 소개하는 한국 작가의 활약을 소개한다. 전속 작가 라인업으로 페로탕(Perrotin) 의 박서보, 이배, 심문섭, 페이스(Pace)의 이건용과 이우환, 가고시안(Gagosian)에 백남준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데이비드 즈위너(David Zwirner)는 전속 개념은 아니지만 뉴욕과 파리에서 윤형근 전시를 열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문섭은 2023년 봄에 페로 탕 홍콩에서 전시를 가졌고, 오는 11월 페로탕 파리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숯의 미술가 이배는 독일 만하임미술관의 그룹전 <1.5 DEGREES>에 참여 중이다. 지난 8월에는 이건용의 개인전 <달팽이 걸음>이 페이스 뉴욕에서 막을 내렸다.
올해 세계적 갤러리의 전속이 된 성능경, 최명영, 유예림, 제이디 차의 활약도 주목해야 한다. 리만 머핀 (Lehmann Maupin)의 성능경은 이건용, 심문섭과 같은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아방가르드 작가다. 키아프·프리즈 서울을 겨냥해 갤러리현대에서 전시를 시작했고, 내년 리만 머핀 뉴욕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2023년은 ‘실험미술 작가의 해’라 말해도 과 언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는 오는 9월 뉴욕 구겐 하임미술관으로 이어진다. 성능경, 심문섭, 이건용뿐 아니라 김구림, 이승택, 이강소 등 한국 전위미술 거 장 30여 명의 대표작을 전시한다. 2024년 2월에는 LA 해머미술관에서 이 전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단색화 작가 최명영은 알민 레쉬(Almine Rech) 갤러리 전속이 됐다. 이미 김창열, 하종현, 김민정이 활동 중인데, 최명영까지 합류해 자랑스럽다. 그는 9월 7일부터 알민 레쉬 파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젊은 여성 작가 두 명의 근황도 고무적이다. 20대 작가 유예림은 페레스 프로젝트 베를린에서 오는 11 월 개인전을 가지며, 한국계 캐나다 작가 제이디 차 (Zadie Za)는 타데우스 로팍 전속과 함께 스페이스K 서울에서 개인전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둘의 작품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 유예림 작가는 회화와 사물의 표면에 관심을 갖고 이국적 풍경에 중성적 인 물이 등장하는 회화를 선보인다. 반면에 제이디 차는 한국 설화와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에 집중한다. 그간 해외에서 주목받던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제 이디 차와 일맥상통하게 한국적 정서를 담은 작품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색화의 뒤를 이어 주목받는 실험미술도 마찬가지다. 블랙 작가 작품의 강세에서 알 수 있듯 민족과 국가 정체성을 내세운 그림이 해외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데, 한국 작가의 활약이 이런 경향과 관련이 있을까?
울산시립미술관 정필주 학예연구사도 이 의문에 동감한다. “민족과 국가 정체성을 강조하는 작업의 인기는 1970년대부터 있었다. 전통을 작품에 도입시켜 역사를 반전시키려는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그 이면에는 식민주의적 질서에 대한 반발과 반성이 자리한다. 민족과 국가를 강조한다는 것은 오리엔탈리즘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렵다. 문제는 민족과 국가 개념 자체가 서구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민족 개념이 서구에서 연구되었고, 이러한 개념이 담긴 작품을 구매한 것도 서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리엔탈리즘과 탈식민주의 개념이 서구적 시각 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지하고, 성찰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구의 시선을 배척 대상으로 보자는 의도는 아니고, 공존하고 교류하며 상생해야 한다는 것. 단색화와 실험미술을 포함한 한국 미술이 세계 속에서 성장하려면 연구를 통해 개념적, 철학적 어휘를 증폭시켜야 한다. 미국에서 열린 전위미술 단체전에 수차례 참여한 성능경 작가도 국제적 전시에 대해 기쁜 마음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현재의 열광에 안주하지 말고 한국 실험미술의 태동에 대해 탐구하 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이다. 한국 실험미술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지만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리만 머핀에는 성능경뿐 아니라 서도호, 이불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도쿄화랑의 박서보, 이진우, 김근태, 샹탈 크루젤(Chantal Crousel)과 디펜 던스(Dépendance)의 양혜규, 스프뤼트 마게르스 (Sprüth Magers)의 송현숙, 필라 코리아스(Pilar Corrias)의 구정아, 글래드스톤(Gladstone Gallery) 아니카 이(Anika Yi)의 이름도 기억해야 한다. 구정아는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돼 전시 준비에 돌입했고, 한국계 미국 작가 아니카 이 는 내년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 미술 열풍은 이어진다. 구겐하임미술관과 해머미술관뿐 아니라 10월부터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한국 작가 그룹전 이 시작된다. 우현수 부관장의 진두 지휘로 손동현, 신미경, 함경아, 정연두 등 작가 28명의 1989년 이후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갤러리, 미술관, 컬렉터로 이루어진 트라이앵글이 미술가를 후원해야 미술계가 발전할 수 있다. 미술관과 컬렉터는 작가를 지원하고, 갤러리는 미술관 전시를 도와서 작가를 성장시켜야 한다. 한국 작가도 K-팝스타처럼 유명해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