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언제나 나아가는 이들의 것이었다.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사회의 모순과 차별과 억압에 처해졌고,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게 있음을 알고, 안다고 해서 순응하지 않는다. 여성은 ‘영화’라는 나아가는 이들의 예술 안에서조차 한 발 더 앞서 나아간다. 만약 여성의 영화, 여성의 이야기가 보편적이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여성의 시선이 우리 사회가 내포하는 관습과 질서 그너머, 미래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영화가 아직 오지않은 시간을 향하고 있음을 알 때, 거기서 우리는 본 적 없는 아름다움, 믿고 싶지 않은 슬픔, 성에 차지 않는 희망, 그래서 더욱 열렬해지는 이 세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미래의 시간은 어김없이 도착했다. 부산이 주목한 여성 감독의 영화를 만나보자.
먼저 성장, 우정, 예술 등 삶의 중요한 키워드를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그린 작품들이 눈에 띈다. <세기말의 사랑>은 남성 동료의 횡령을 눈감아 주다 감옥에 간 영미와 남편의 빚을 대신 갚겠다며 찾아온 유진이 함께 살게 되는 이야기로, <69세> 임선애 감독의 신작이다. 딸과 그의 동성 애인, 함께 살게 된 엄마를 그린 이미랑 감독의 <딸에 대하여>와 장애인 아들, 시체로 발견된 남편, ‘자유로운 여성’인 주인공 산드라의 이야기를 담은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는 돌봄이라는 ‘여성의 일’, 가족이라는 부대낌, 이성애 중심주의 속에 얽히고 설키는 여성들의 드라마이다. 김다민 감독의 공상 과학 코믹 판타지 <막걸리가 알려줄 거야>, <멜로가 체질> 공동 연출가 김혜영 감독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2010년대 초 하얼빈을 배경으로 한 10대 소녀의 다른 여성을 향한 낭만적 열정을 담은 겅즈한 감독의 <블루 송>, 그리스 유명 휴양지에서 벌어지는 요즘 10대의 ‘사건 사고’를 그린 몰리 매닝 워커감독의 <하우투해브섹스>, 시각 장애인 소녀의 사랑 찾기 여정을 따라가는 몰리 수리야 감독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지 않는 것들> 은 국가와 시대, 장애와 비장애를 불문하고 ‘소녀들의 성장기는 결코 얌전하지 않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다룬다. <나의 연기 워크샵>과 <파스카>를 만든 안선경 감독의 <이 영화의 끝에서>, 앙겔라 샤넬렉 감독의 <뮤직>, 사라 다우라타바디 감독의 <올빼미, 정원 그리고 작가>는 예술을 동반자로 택한 삶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이 포착한 곤경과 모순, 연대에는 인종과 국경, 시간대마저 초월하는 힘이 내포되어 있다.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최신작 <푸른 장벽>은 폴란드 국경 지대를 배경으로 난민과 인권 단체, 주민과 국경 수 비대의 다양한 시점으로 펼쳐진다. 마들렌 가빈 감독의 <비욘드 유토피아>는 북한에 남겨 두고 온 아들을 남한으로 데리고 오려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침묵>의 박수남 감독이 지난 50년간 촬영한 필름을 딸 박마의 감독의 시력에 의지해 디지털로 복원하며 강제징용, 원폭,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고 차별의 한가운데 서있던 재일 조선인 2세인 자신을 회고하는 다큐멘터리다. 일제 총동원령으로 영등포 방직공장에 강제로 끌려온 농촌 소녀들로부터 출발하는 김건희 감독의 <여공의 밤>은 가려지고 잊힌 것들의 1백 년에 걸친 흔적을 짚어간다. 하이오네 캄보르다 감독의 <호밀의 뿔>은 10대 소녀의 낙태를 도왔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1970년대 스페인 섬마을의 조산 사 마리아의 이야기다. 카우테르 벤 하니아 감독의 <포 도터스>는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하기 위해 가출한 두 딸을 둔 여성 올파의 이야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재연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이름도 대거 포진하고 있다. 누라 니아사리 감독의 <셰이다>에서 주연을 맡은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 히미는 <성스러운 거미>로 국내에 먼저 알려졌는데, 그 자신이 모국 이란의 젠더 폭력 피해자이며 증언자이기도 하다.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총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화제작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셀린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 <행복한 라짜로> 알리체 로바허 감독의 신작 <키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하나의 문법으로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여성 감독들은 오랜 친구처럼 반갑다. <팻 걸>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의 <라스트 썸머>, <심플 라이프> 허안화 감독의 <엘레지>가 그렇다. <카모메 식당>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신작은 사이비 종교에 빠진 50대 주인공 요리코의 이야기 <파문>이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여성 캐릭터들은 대 체로 ‘독특하다, 엉뚱하다’는 평을 들어왔으나 이젠 그런 인물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자기만의 고유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박한 행동으로 주변까지 변화시키는 여성 캐릭터를 뚝심 있게 그려온 그가 “나는 뭔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다”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