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달>

이상일, 2023

유진목

시인

시집 <연애의 책> <식물원>, 산문집 <슬픔을 아는 사람> 등을 펴냈다.
2015년까지 영화 현장에서 활동하며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했고, 지금은 1인 프로덕션 ‘목년사’에서
단편 극영화와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있다.

 

행복에 대해 쓰라면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행복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는 일이 행복하지 않나? 그렇다. 나는 사는 일이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면 행복하고 싶나?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행복을 좋아한다. 행복은 사는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해준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니다. 살아보면 좋은 게 좋다. 정말로 그렇다.

<유랑의 달>은 좋을 게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의 이 말들이 영화를 보게 할 것인지 외면하게 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의 취향은 다채롭고, 나는 그중에서 비극을 좋아한다. 나는 비극이 아닌 이야기를 보는 게 힘이 든다. 오직 비극만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스민다.

행복을 원하는 건강한 사람들이 마침내 행복을 맞이하는 이야기에 감응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살면서 원하지 않는 것은 행복을 원하는 상태다. 그냥 사는 것만 해도 힘든데 행복하기까지 바란다면 나는 돌아버릴 게 분명하다. 온갖 기이한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돌아버리지 않는 일은 행복보다 중요하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건강함이다.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고통을 한껏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나는 꽤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

비극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닌 특유의 강인함을 이제부터 아름다움이라 칭하겠다. <유랑의 달>은 좋을 게 없는 사람들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의 틈새에서 돌아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비극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잔잔하게 돌아버린 채로 살다가 끝내 미쳐버리는 이야기다. 미쳐버린 나머지 자신이 타인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게 되어버리는 세상을 집요하게 증명해 보이는 이야기다.

비극을 감당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타인을 해치지 않는 것.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좋은 시간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 그리하여 자신도 타인도 안전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렇다. 아름다운 비극은 좋을 게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이야기다. <유랑의 달>이 정말로 그렇다. 밤하늘의 달처럼 어둡게 빛난다.

 

 

<절해고도>

김미영, 2023

진명현

무브먼트 대표

독립영화의 배급과 마케팅을 주로 하고,
감독과 배우를 대상으로
에이전시 역할을 하는 스튜디오
‘무브먼트(MOVement)’를 운영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원할 때 촛불을 켠다. 생일을 맞은 이에게는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의 안녕을 축하하고, 다가올 다음 순간을 축복하기 위해 기꺼이 촛불을 켜고 함께한다. 세상을 떠난 이 앞에서 당신을 기억하리라 다짐하며 두 눈을 감고, 흔들리는 촛불을 마음속에 담는다. 수많은 이들이 나라의 평안을 기도하며 두 손으로 감쌌던 거리의 촛불들, 누군가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하기 위해 켜졌던 어두운 방 안의 촛불들을 기억한다. 생의 무수한 절망 앞에서 기어코 눈앞에 작은 불을 밝힐 때, 그렇게 두려움의 실체와 감춰진 불안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때, 나는 안도했고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영화 <절해고도>에는 케이크마저 녹여버릴 정도로 촛불들이 거세게 타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둡고 고요한 어느 밤, 산속의 바람에 촛불들이 흔들리며 타오른다. 쉬이 꺼지지 않는다. 한 남자 앞에, 세 남녀의 한복판에 있던 그 촛불들. 마치 환상처럼 보이는 그 장면에서 남자는 홀로 남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촛불을 앞에 두고 읊조린다. 나는 영화 속 그 장면에서 두 눈이 뜨거워졌다. 내 눈앞에 촛불이 켜진 것도 아닌데 스크린 너머로 초가 타는 냄새가, 초가 태우는 외로움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아 코를 킁킁거렸다. 극 중 배우 박종환이 연기하는 ‘윤철’은 꺼지지 않은 촛불 장면이 지나간 뒤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생에서 원해서 얻게 된 것이 뭐가 있었을까. 원해서 얻으면 기쁨이 더 컸던가? 지금의 나도 내가 되려고 해서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영화 <절해고도>를 통해 몇 년 만에 다시 영화의 생일을 만들어주는 일, 정확히는 배급과 홍보, 마케팅을 통해 영화의 개봉을 준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영화 개봉일은 영화를 만든 이와 영화를 보는 이가 스크린이라는 얇고 네모난 벽을 두고 서로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날이다. 만든 이와 보는 이의 각기 다른 설렘과 긴장이 극장이라는 공간을 가득히 채운다. 마침내 극장 안의 모든 불이 꺼지고 그 얇고 네모난 벽에만 불이 켜진다. 마치 촛불처럼.

누군가에게 한 편의 영화, 나아가 그 영화 속 어떤 장면은 생각보다 더 크고 환하게 남는다. 누군가의 정성과 성심이 만들어낸 순간이 다른 이에게도 닿을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나는 <절해고도> 속 그 장면 덕에 용기를 냈다. 인생이라는 갈림길에서 용기를 낸다는 것, 막막하기만 한 파도를 타볼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은 다 순간의 믿음에서 시작됐다. 영화 속 윤철은 인생의 파고를 겪은 이다. 사랑했고, 실패했고, 세상을 떠돌았고, 홀로 남았다. 기뻐해야 할 순간을 종종 놓쳤고, 마음껏 슬퍼할 명분을 스스로에게 제때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되었다.

나는 자주 나를 모르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윤철처럼 내가 원해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고, 인생에서 내가 원해서 된 것이 뭐가 있는지, 원해서 얻은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도 가늠하지 못한다. 다만 나를 둘러싼 사람들, 나라는 초에 불을 켜주던 사람들의 마음이 밝힌 시야가 되레 나를 보게 해줬음을 알고, 그렇다고 믿는다. 그 귀한 마음들 덕에 내가 꺼질 때마다 다시 타올랐다고 생각한다. 초는 언젠가는 사라지는, 마치 절화처럼 유한한 아름다움을 지녔기에 나는 그것들을 사랑해왔다. 영원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주는 미더움이 내게는 적당히 편안해서 더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종종 사라지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다 꺼지고, 다 시들어도 남아 있을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촛불이 되었던 순간들에 대해서. 눈앞의 선명함을 잃는다 해도 여전히 반짝일 것들을 잊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