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엘비
CHOILB
<오리엔테이션>, <CC>, <독립음악>까지 3개의 정규 앨범을 내며 본인만의 영역을 구축해온 래퍼.
섬세한 묘사와 입체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직접 겪고 느낀 이야기를 음악 안에 솔직하게 담아낸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난 완벽하지 않아요
난 항상 그래왔듯
완벽하지 않아
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말이야
만들다 만 관계들이
자꾸만 쌓여가
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서인 걸 알아
#1. 난 완벽하지 않아요 정규 2집 의 가사를 어떻게 썼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첫사랑과 헤어진 과거의 내가 몸에 들어와 작사를 끝내놓으면, 현재의 내가 녹음해서 곡을 완성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이 몰입하고 아파하면서 만들었다.
<CC>에서 가장 먼저 작업한 곡은 ‘난 완벽하지 않아요’다. 어떤 식으로 시작할지 고민하다 예전에 강박에 대해 끄적여두었던 글을 읽게 되었다. 난 어릴 때부터 여러 면에서 강박이 있었는데, 가장 심했던 건 ‘처음’에 대한 강박이었다. 예를 들어 공책을 샀다면 첫 장은 무조건 완벽하게 써야 했다. 글씨는 예뻐야 하고 그림에는 느낌이 있어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페이지를 뜯어버렸다. 남은 장수가 짝수인지 홀수인지 세었고, 홀수라면 짝수로 맞추기 위해 또 한 장을 뜯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리는 식으로 공책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럼 그때부터 너덜너덜해진 공책을 아무렇게나 막 쓰게 되는 거다.
인생에도 완벽하고 싶던 ‘시작’의 순간이 많았다. 그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사랑이었다. 한때 ‘첫사랑을 만나서 헤어지지 않고 완벽하게 사랑한 뒤 결혼해야지’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남중 남고를 다니다가 대학교에 들어와 이성에 눈을 떴고, 첫눈에 반한 사람과 첫 연애를 시작했다. ‘완벽한’ 사랑을 하려 했으나 처음이라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 상대방도 내 마음과 같기를 바라면서 그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집착하기도 했다. 그렇게 실수를 반복하다 결국 그 애와 헤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책 첫 장을 찢어버리는 것처럼 ‘얘는 내 첫사랑이 아니었어, 더 오래 만나는 사람이 첫사랑이야’라고 자꾸만 자기 합리화를 했다. 다음 연애 때도 완벽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사랑의 의미를 가볍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공책은 뜯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인생에서 오래 남는 기억들은 사실 그렇지 않다. 완벽하지 못한 나를 감당하지 못해 아무렇게나 막 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는 꼭 이 모습을 음악으로 남겨야겠다고 메모를 해뒀다.
이 곡을 시작으로 홀린 듯 의 작업을 마쳤다. 완벽하지 못한 내 모습이 앨범에 담겨 어느 정도 후련했다. 사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 내겐 처음이라 느껴질 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강박을 가질 만한 일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 가끔 이 노래를 들으면 내가 완벽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완벽함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럼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2. 신입생환영회! 술, 담배는 내게 성인이 되기 전에 하면 안 되는 일종의 금기 같은 것이었다. ‘술은 아빠한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행을 갔을 때 이모부가 권하는 맥주 한 잔마저 끝까지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된 후 대학교에 들어와 신입생 환영회에 참여했고 동기, 선배들을 따라 뒤풀이까지 함께했다.
“신입생 환영회를 왔지! 내가 대학생이 된 건 맞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감자탕집에 테이블 하나당 선배 한 명이 있고, 그 옆에는 후배 여러 명이 앉아 있었다. 그럼 선배가 능숙하게 술을 시켰다. 선배들은 후배 없이 따로 앉아 있기도 했는데, 신입생의 시선에서 그 자리는 엄청나게 엄숙한, 높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 같았다. 마치 G20 정상회담 같았달까. 저기 앉으면 나도 어른처럼 보이려나.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됐다고 느낀 최초의 순간은 내 앞에 술잔이 놓인 때였다.
선배가 후배들에게 한 잔씩 술을 따라주다가 내 차례가 온 순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첫 술은 아빠와 마셔야 하는데. 하지만 “아빠한테 배우기로 했어요” 하고 거절하면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과대표 선배가 건배사를 제안하고 다 같이 잔을 들었을 때도 머릿속으로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잔을 들고 있는 주위의 풍경은 어린 시절 매체에서 보던 어른들의 모습 같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빈 잔 내려놓고 생각했지 어른들이 하는 크~가 맛있어서는 아니겠지” 처음 술을 입에 댄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른들은 이걸 왜 좋다고 크~ 하면서 마시지?’ 하는 의문이었다. 술은 생각보다 쓰고 맛이 없었다. ‘첫 술은 아빠한테 배워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술잔은 자꾸만 채워졌고 그럼 나는 계속 비워냈다. 그렇게 꽤 많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실수록 정신이 몽롱해지고 붕 뜬 것 같았다. ‘이게 취하는 느낌이구나’ 하고 신기해했던 그날의 경험은 10년 넘게 지난 지금도 내게 선명히 남아 있다. 나는 3차까지 따라갔고, 주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술을 마셨다. 결국 만취한 채 화장실에서 선배에게 발견된 후 부모님이 데리러 오는 결말로 신입생 환영회는 끝이 났다. 그렇게 대학교 생활이 시작됐다. 눈 깜짝할 새에 1년이 흘렀고 신입생을 맞이하는 선배가 됐다.
“안녕? 난 12학번 최재성이라고 해. 선배님은 오글거리니까 형이라고 해. 대학 생활 별거 없어. 인사만 잘하면 되지. 그러면 선배들은 너를 예뻐해줄 테니” 작년에 선배들이 테이블에서 말한 내용을 그대로 읊는 내가 웃겼다. 앉아 있는 신입생들도 작년의 나처럼 지금의 내 모습을 어른이라 생각하려나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교 안의 작은 사회가 왜 그리 넓어 보였을지 모르겠다. 선배들은 또 왜 이리 멋있어 보였는지. 정말 별거 없는데. 당시의 내가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기에 ‘신입생환영회!’는 내게 소중한 곡이다.
#3. 구름구름, 기회비용 앞서 말했듯 술, 담배는 내게 금기시되는 존재였다. 술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에 댔지만 담배만큼은 절대 피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CC(캠퍼스 커플)였던 나의 첫 연애가 끝나고 처음 겪어보는 이별에 정신을 못 차릴 때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기 형들을 편의점에서 만나 조언을 구했다. 이 아픔을 극복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때 한 명이 너무 힘들면 이거라도 피워보라며 담배를 건넸다. 그때가 내가 처음 담배를 태운 순간이다.
‘구름구름’의 시작이 된 그림이 하나 있다. 담배 연기가 만화 말풍선처럼 뿜어져 나오는 그림이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첫사랑이 생각났다. 그 애는 담배 냄새를 끔찍이 싫어했는데,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더더욱 싫어하겠지 싶었다.
‘구름구름’의 가사는 “내 주윌 떠다니는 구름들을 보며 생각해. 최재성 이 새끼는 정말 올 때까지 와버렸구나. 엄마가 나를 보면 뭐라 할지. 어머 세상에 재성아 술도 모자라서 담배까지 배워 왔구나”로 시작해 “내 주윌 떠다니는 구름들을 보며 생각해. 최재성 이 새끼는 정말 올 때까지 와버렸구나. 너가 이런 날 보면 뭐라 할지. 어머 세상에 재성아 너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구나. 아, 그렇구나”로 끝난다.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는 죄책감, 담배를 싫어했던 첫사랑에게 느낀 죄책감이 내게 동시에 있었던 것처럼.
금연 앱을 통해 그 애와 헤어진 뒤 여태까지 피운 담뱃값을 계산해보았다. 저렴한 롤렉스 시계 하나 값이었다. 걔를 만나지 않았다면 헤어진 뒤 담배를 피우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럼 나는 롤렉스를 하나 살 수 있었을까? 그런데 걔랑 헤어지지 않았다면 이 앨범이 나오지 않았겠지. 그럼 어떤 게 더 이득일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계속 물음을 던지며 합리화를 반복했다. 평행 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앞으로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첫사랑을 시작하기 전 과거의 나를 만나러 가서, 얘랑 만나서 헤어지면 결국 넌 이런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 말해주는 상상을 많이 했다. 이젠 담배를 피울 때 첫사랑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좀 달라져 있을까? 그냥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