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 월드가 다시 열렸다. <러브레터>가 국내 관객을 만난 것이 1999년이니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월드’는 여전히 기다리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는 곳이다. 특유의 서정과 질감으로 수많은 창작자에게 영향을 끼친 시네아스트 이와이 슌지 감독 의 신작이자 제28회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 영화 <키리에의노래>. 세 남녀 의 엇갈린 동선과 겹쳐진 시선이 만들어내는, 이와이 슌지 월드의 또 하나의 시그니처로 기억될 이 작품은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서늘하고 따뜻하다. 관객이 이와이 슌지에게 기대하는 세계와 이와이 슌지가 새로이 찾아낸 세계가 익숙한 듯 낯설게 포개진다. ‘PIFF’ 시절을 기억 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오랜 친구이자 여전히 새로운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를 발굴하며 설 렘을 느끼는 현재진행형의 창작자 이와이 슌지 감독을 부산의 바다를 앞에 두고 만났다.

영화 <4월 이야기> 이후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뱀파이어> <립반윙클의 신부>까지 많은 작품으로 여러 차례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습니다. BIFF 이전 PIFF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을, 그야말로 ‘부산의 오랜친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팬데믹이 지난 후 부산을 다시 찾은 감회가 궁금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제1회 때부터 참석했습니다. ID 카드 번호까지 정확히 기억나요. 이후 저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왔고, 부산국제영화제도 제28회를 맞을 만큼 긴 시간동안 계속 발전해왔다는 사실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와 부산국제영화제는 동급생 같은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제 <키리에의 노래>의 공식적인 첫 상영을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감독판을 상영하고, 월드 프리미어로 작품을 공개하는 자리였습니다. 뮤지션이기도 한 아이나 디 엔드(Aina the End) 배우를 세계 영화계의 무대에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고요. 인연이 깊은 부산에서 신작의 첫 상영을 마친 소감은 어떤가요? 아이나 디 엔드 배우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그는 아주 재능 있는 사람입니다. 캐스팅 이전에는 그의 존재를 전혀 몰랐어요. 알고 보니 일본의 음악 팬에게 매우 인기있는 뮤지션이더군요. 우연히 그의 라이브 영상을 보고 대단히 매력적이라고 느껴 찾아보다 유명한 아티스트라는 걸 알았죠. <키리에의 노래>는 그의 재능이 중심이 되는 영화입니다. 그 재능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 을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아이나 디 엔드라는 아티스트를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제적으로 소개하게 되어 기뻤고, 한국 관객이 이 영화와 아이나 디 엔드라는 아티스트를 어떻게 보실지 기대돼 설렙니다.

팬데믹 이후 첫 방문입니다. 한국 관객을 직접 만난 건 꽤 오랜만이죠? <키리에의 노래>가 상영된 뒤 관객과의 대화(GV)를 위해 극장에 들어가니 관객들이 웃는 얼굴로 맞아줬습니 다. <4월 이야기>로 처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20년 정도 지났는데도 변함없이 환대해주는 관객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키리에의 노래>는 이른바 ‘이와이 슌지 월드’라고 불릴 만한 요소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감각적인 영상 그리고 배우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고 마주 보는 시선까지 이와이 슌지 감독의 팬들에게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이 이야기의 시작은 무엇이었고,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때 가장 고심한 부분은 어떤 점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제 영화 중 일본과 중국이 합작한 <라스트 레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소설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키리에의 노래> 로 완성되었어요. 소설 속 한 여자아이가 찍은 영화가 있는데, 그게 이 영화의 플롯이 되었어요. 시골에서 상경한 뮤지션과 그의 매니지먼트를 맡는 또 다른 여자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플롯이 마음에 들었고,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써나가는 동안 형태도 바꾸고, 아이나 디 엔드를 캐스팅하면서 이야기가 더 풍 부해졌습니다. 훌륭한 보컬리스트의 노래가 중점적으로 등장하는 만큼 이전의 이야기는 스 케일이 작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이듬해에 쓴 <나쓰키 모노카타리>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접목하자 <키리에의 노래>의 전체적인 윤곽이 만들어졌습니다. 소설에는 영화에 넣지 못한 에피소드도 있 고, 영화를 다 찍은 후 떠오른 내용을 쓴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잇코 상이 어떻게 잇코 상 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 이야기는 영화 촬영 후에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작업을 하고 있지 않아요, 언젠가 다시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지만요.

영화를 관람한 관객이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될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뮤지션에서 배우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아이나 디 엔드가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여러 차례 선보이는 버스킹 장면은 물론, 1인 2역을 소화하는 쉽지 않은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캐스팅하게 되었고,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눴는지, 그리고 아이나 디 엔드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다면 어떤 점일지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이나 디 엔드는 노래뿐 아니라 컨템퍼러리 댄스도 하는 등 재능이 많은 여 성입니다. 몸도 잘 쓰고 표현력도 훌륭해 연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어요. 어느 정도 그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히로세 스즈 배우와 함께 하는 연기도 자연스러 웠습니다. 두 사람은 평상시에도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사이 좋게 지내는 사이여서 그 모습이 연기할 때도 그대로 나온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아이나 디 엔드의 매력은 역시 노래 입니다.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저도 즐겼을 만큼 표현력이 빼어나죠. 관객들이 스크린을 통해 그만의 매력을 직접 느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매력이 많은 배우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는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가사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가사는 모두 아 이나 디 엔드가 썼나요? 혹시 감독님이 참여한 부분도 있는지요? 이야기와 연결되는 부분 중 한 곡 정도는 제가 초안을 썼어요. ‘혼자가 좋아’라는 곡입니다. 시나리오의 흐름과 연결 지어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나머지 곡은 대부분 아이나 디 엔드가 본인이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썼습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키리에’가 쓸 것 같은 가사를 생각해서 쓴 거죠.

아이나 디 엔드뿐 아니라 히로세 스즈의 새로운 모습, 마쓰무라 호쿠토의 감성적인 표정들, 구로키 하루가 주는 안정감이 절묘한 합을 만들어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세 배우에 대 한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저는 배우들에게 뭔가 요구하기보다는 캐릭터에 대한 각자의 상상이나 영감에 대해 일단 듣고, 그들의 연기를 본 뒤 연출을 풀어가는 타입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이 실제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최대한 담아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제가 하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현장에서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이 작품에서 세 배우 모두 자연스럽게 그 들이 거기에 있는 순간을 장면으로 만들어냈고, 그 덕분에 좋은 장면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대 일본 특유의 리얼 리티한 요소가 잘 살아 있고, 다양한 장소와 시간대를 넘나들며 구성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렵거나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집중하지 않으면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구성이죠. 이러한 비선형적 구조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앞서 말했듯 영화 속 소설에서 출발 한 이야기, 배우의 합류, 또 다른 소설과의 접점 등 각기 다른 이야기를 조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중 구조를 가진 작품이니까요. 이 다중 구조를 어떻게 겹쳐서 완성할지 마지막까지 저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편집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정리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관객 중에 아이나 디 엔드 배우가 언니와 동생, 1인 2역을 연기해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는 의견도 있었어요. 이 부분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요? 관객에게 어떤 부분이 다르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 영화를 보고 오해가 생긴다면 그 오해까지 작품에 포함되는 거죠. 저는 누군가가 본 감상이 그 작품을 완성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다른 사람의 영화나 음악을 오해한 채로 기억하다가 나중에 “아,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네” 하면서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고 있던 내용이 과연 의미가 없었나 생각해보면 그건 그것대로 독창적인 이야기가 되기도 하더군요. 관객들의 오해를 포함한 여러 가지 감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많은 관객이 이와이 슌지 감독 작품의 화면에서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특유의 질감을 느낍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하얀 눈이 주는 묘한 따뜻함, 밤 시간이 주는 서정적인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키리에의 노래>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분위기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촬영감독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합니다. 촬영은 언제나 빛과 나누는 대화라 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의식해서 하기보다는 매번 현장에 가서 어떻게 찍을지 모든 이들과 대화하며 만들어가죠. 마무리 작업에서는 아날로그적 부분에 대해 고민합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으면 예쁜 장면을 담을 수는 있지만, 자칫 개성 없는 영상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어 그레이 톤을 추가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며 촬영합니다.

2023년 한국 영화 시장에서 일본 작품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 즈메의 문단속>이 메가히트를 하며 큰 사랑을 받았죠. 애니메이션 작품의 활약에 이어 감독님의 작품이자 극영화인 <키리에의 노래>가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10월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 관객에게 신작을 선보이는 감회가 어떤지, 그리고 개봉관을 찾아 신작을 관람할 팬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특히 음악과 동시에 사운드와도 마주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 니다. 편집도 오래 걸렸지만, 가장 시간이 많이 소요된 작업은 오디오 부분이었습니다. 음악과 사운드 측면에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죠. 관객들이 <키리에의 노래>를 영화로 먼저 즐기 시고, 콘서트를 보는 마음으로 음악을 즐기듯 또 한 번 감상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