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과 부산, 인도와 베트남 등 세계 각국의 도시를 여행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기록해온 작가 최혜지. 회화의 전형을 벗어난 일상 속 재료로 그려낸 <LIFE> 연작은 작품 앞에 서 있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대입해보게 만든다. 그는 지난 달 파리에서 열린 개인전 <LIFE-BUSAN>을 통해 부산 곳곳의 정취를 담은 작품 열 점을 선보였다. 전시를 마치고 어김없이 새로운 여행을 떠날 준비 중인 그와 서면으로 대화를 나눴다.

 

 

지난달 프랑스 파리에서 개인전 <LIFE-BUSAN>을 선보였다. 전시를 마무리한 소회가 궁금하다. 현재 소속되어 있는 갤러리 PBG와 부산시가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홍보를 위해 함께 기획한 전시였기에 엑스포 본부가 있는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됐다. 해외 관객들이 한국의 의미 있는 도시인 부산을 궁금해하고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고민하며 작업했는데, 주재료인 시멘트 자체가 가진 힘이 강하다 보니 부산 지역의 생동감이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진 것 같다. 가족 단위로 방문해 아이들과 함께 전시를 즐기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일상과 내 작품이 어우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부산을 배경으로 작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부산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다. 한국 전쟁 당시 피란수도였기에 남쪽으로 물밀듯 휩쓸려 내려온 피난민들이 터전을 잡았던,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도시다. 부산을 생각하면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간마을이 생각나는데, 그 밀도를 감각하며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가 아직 많다고 느낀다.

부산 곳곳을 여행하며 자주 찾게 된 공간이 있나? 광안리 바다 앞에 거처를 마련해 두 달 정도 머물렀는데, 첫 달에는 자갈치 시장에 자주 들렀다. 시장 특유의 풍경을 워낙 좋아하는데 저녁 시간대 자갈치 시장은 더없이 운치 있다. 둘째 달에는 본격적인 자료 조사를 위해 얼마 후면 사라질 곳들을 찾아다녔다. 완월동이나 범일동과 같은 재개발 지역, 사람들이 모두 떠났거나 떠나지는 못한 채 숨죽이고 있는 곳들을 주로 다녔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과 인도 곳곳을 여행하며 포착한 장면들을 ‘LIFE’ 연작으로 엮어왔다. 여행할 도시를 선정하는 당신만의 기준이 있나? 오래 전부터 고수해온 방식인데, 시기마다 당시에 관심 있던 키워드로부터 출발해 여행지를 정하는 편이다. 스리랑카를 다녀왔을 무렵에는 ‘유적’, ‘기차’, ‘초록’과 같은 단어에 관심이 있었고, ‘노랑’, ‘햇빛’, ‘바다’가 키워드였을 때는 그리스를 여행했다.

시멘트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다양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을 그리는 작업 주제와 재료 사이에도 어떠한 연결점이 있을 듯하다. 산책을 하다 문득 시멘트가 현대인의 차가운 자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 태어나 집, 학교, 회사를 거쳐 다시 병원으로 가는 동안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감싸고 있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차갑고,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하게 굳는 시멘트의 속성 자체만으로도 현대인의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붓 대신 나무젓가락을 뾰족하게 깎아 사용하는 등 시멘트를 덧바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역시 인상적이다. 일반적인 회화 작업용 도구 대신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도구를 택한 계기가 있나? 물감과 붓을 활용해 그림 그리는 일은 평생 해온 일이라 내게는 가장 익숙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내게 익숙한 방법으로 누군가의 ‘일상’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한 작업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점을 바꾸어 내가 아닌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도구나 재료를 사용하면 그 자체로 관객들과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다. 도구들 중에는 본래 주방에서 사용하는 것들이 많은데, 주방이 여러 재료를 활용해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공간이라 자연스럽게 영감을 얻는 것 같다.

 

 

최근에는 어떤 도시를 여행했나? 여행하며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 최근 개인전 준비를 위해 베트남에 다녀왔다. 8년 전 이 나라를 여행하며 보았던 이미지에서 출발해 거리 위의 다양한 장면들을 담고자 했고 예상대로 도심에서는 좋은 장면들을 충분히 담을 수 있었다. 여행을 온 김에 이곳 어부들의 삶도 사진으로 담고 싶어 슬리핑 버스를 타고 긴 시간 이동해 어촌 마을을 찾아 갔는데, 당시 파도가 강한 탓에 일터에 나온 어부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쓰레기로 뒤덮인 해변을 목격했고 그때 본 장면이 종이를 활용해 선보일 다음 작업의 영감이 됐다.

종이라는 재료가 지닌 어떤 특성에 주목했나? 시멘트와 마찬가지로 종이 역시 현대인의 일상에 가까운 재료이면서 비인간 생명체의 삶과도 연결된 재료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 지점을 활용해 인간뿐만 아니라 더 넓은 범주의 삶을 담아내는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일상을 주제로 삼다 보면 순간의 감상을 기록하는 것이 작업을 위한 중요한 루틴 중 하나일 거라 짐작한다. 특정한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자주 활용하는 방법이 있나? 가능한 기록을 많이 해두려 하는 편인데, 사진으로 남겨 두기도 하고 메모장을 십분 활용해 하루 동안 보고 겪은 장면들에 대한 감상을 수시로 적어두곤 한다. 길가에서 스치듯 들려오는 대화에 짧은 상상을 덧붙여 두기도 한다. 그렇게 채집한 기록이 쌓이면 카테고리 별로 분류를 해두고 필요에 따라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평범한 하루를 잘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는 인터뷰를 인상 깊게 봤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생명력과 돌봄의 의지를 발견하는 힘이 당신에게 있다고 느껴진다. 그 힘은 어디서 발현됐다고 보나? 작가로 활동하기 전 8년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러 ‘삶’들을 잘 들여다봐야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에서 직장 생활을 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 그때 교단에서 만난 수많은 삶들이 여전히 작가로서 내 시선이 가닿는 방향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개개인의 삶만큼이나 ‘공존’이나 ‘공동체’라는 단어 역시 당신의 작업이 조명하는 화두인 듯하다. 학부시절 졸업 전시에도 ‘공존’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출품하는 등 공존이라는 단어는 내 오랜 화두다. 공존을 위한 시스템에 대해 늘 생각하는데, 시스템을 만드는 주체 역시 개인이기에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돌보며 힘을 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이 오롯이 서 있는 삶이라면 공존을 위한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테니 말이다. 작업의 주제를 ‘삶’이라는 거대한 키워드로 설정한 이유 역시 앞으로 시도할 모든 실험들을 궁극적으로는 삶과 생명, 그리고 공존이라는 단어로 풀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내년 1월 파리 시떼 레지던시(Cité internationale des arts)에 3개월 간 머무를 예정이다. 애초 올해 1월에 떠나는 일정이었지만 종이를 재료로 한 새로운 작업을 풀어보고자 해서 준비의 시간을 가진 뒤 내년에 떠나게 됐다. 레지던시 근처에 자리한 유서 깊은 종이 공방에 자주 들를 예정이고, 프랑스의 소도시 곳곳을 여행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