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희

우원재 ‘Ransome’, 머드 더 스튜던트 ‘사랑은 유사과학’,
웨이브투어스 ‘sunny days’ 등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다.
기존 영상을 콜라주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파운드
푸티지 기법을 활용해 독자적인 비디오그래피를 구축해왔다.

 

우원재 – Ransome MV

머드 더 스튜던트 – 사랑은 유사과학 MV

 

뮤직비디오 연출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중학생 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 태엽 오렌지>를 보고 처음으로 영화와 영상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러다 영상디자인과에 진학해 여러 종류의 비디오를 접하고 또 만들다 보니 내게 와닿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뮤직비디오는 음악과 이미지를 활용해 다양한 걸 시도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라고 생각하는데, 이 과정이 재미있어서 만들고 있다.

싱어송라이터 다정의 라이브 영상과 데모곡 뮤직비디오 등 세 편의 영상을 통해 선보인 협업이 인상적이다. 다정은 많은 부분에서 나와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는 아티스트다. 음악적으로나 라이프스타일 면에서나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그의 음악에는 날것의 느낌이 배어 있지만 그럼에도 늘 핵심에는 중요한 말들을 품고 있다. 영상을 만들 때도 정제되지 않은 질감과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동시에 아티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형식을 취했다.

 

다정의 데모곡 ‘Just because you like my voice doesn’t mean you can use it to say something I don’t mean’(Demo)의 뮤직비디오는 오로지 ‘눈’의 조합으로만 완성했다. 이러한 연출이 다정의 곡과 어떻게 연결되나? 모아놓은
이미지들에는 힘이 있다. 이 데모곡을 들으면서는 다정의 눈을 마주한 채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전부 전달되는 그림을 상상했다. 누구든 이 곡의 화자가 될 수 있다 생각했기에 사람뿐 아니라 동물부터 로봇, 이모티콘의 눈까지 다양하게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인종이나 성별, 장애 유무, 성적 지향성에 한계를 두지 않고 고루 담고자 했다.

이 밖에도 머드 더 스튜던트,우원재 등 다양한 장르에서 뚜렷한 개성을 보이는 아티스트와 작업해온 점이 흥미롭다. 이들과 함께 작업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감사하게도 주로 우연한 소개로 협업이 이뤄지는 편이다. 인스타그램에 기록된 작업물을 보고 친구들이 이런 그림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주는 경우가 많다. 영상 연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우원재의 ‘JOB’ 뮤직비디오에 아트 디렉터로 참여하고, 프로듀서 김도언의 ‘Prophet’ 뮤직비디오에서는 스타일링을 맡았다. 현장에서 쌓은 이러한 경험이 모두 자양분이 된 것 같다.

우원재의 ‘Ransome’ 뮤직비디오에서는 다소 차갑고 정제된 분위기가 느껴진다. ‘Ransome’은 전반적으로 미니멀한 분위기일 뿐 아니라 곡을 구성하는 소스가 하나하나 잘 들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곡의 미세한 질감을 표현하기에는 영상 자체를 흑백으로 전환하는 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 복도식 아파트나 주차장, 긴 복도 같은 직선적인 로케이션을 활용해 조금은 인위적이고 딱딱한 분위기가 느껴지게끔 했다. 여기에 미생물을 현미경으로 확대한 듯한 그래픽 컷을 교차편집 해 자연의 근원과 생명력을 보여줌으로써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한 영상에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뮤직비디오에 직접 촬영한 영상이 아닌, 출처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영상도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영상을 발굴하는 방식이 있나? 맞다. 이를 파운드 푸티지라고 하는데, 누군가 촬영한 영상에 새로운 의도를 담아 재편집해 별개의 영상 작품을 만드는 기법이다. 직접 찍은 영상이 아니더라도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스톡 푸티지 중에 재미있는 것이 아주 많기 때문에 표현하고자 하는 맥락에 적합한 소스가 있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뮤직비디오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정리되면 스톡 푸티지를 구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관련 단어를 여러 개 넣어가며 집요하게 검색한다. 이 과정을 거쳐 원하는 이미지를 발견하거나 예상 밖에 기대 이상의 영상을 찾았을 때 느끼는 재미도 크다.

 

다정의 데모곡 뮤직비디오 속 푸티지.

 

뮤직비디오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전체를 아우르는 것.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라는 구절이 있다.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대상을 나란히 호명하는 이 문장처럼 양극단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개념을 영상에 담고 싶다.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보다 그때그때 주변 친구들이 해준 이야기나 개인적인 경험 등에서 두루두루 영감을 받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국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터라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고 여기게 된 것 같다.

뮤직비디오라는 장르가 지닌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뮤직비디오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르다. 패션과 사진, 일러스트 등 내가 관심을 가진 예술의 여러 모습을 다양한 형태로 조합해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평소에도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의 스타일링이나 타이포그래픽 등 비주얼에 관련된 부분을 폭넓게 디렉팅하는 편이다. 제안이 어떻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는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원하는 방향성이 있다면 항상 의견을 낸다. 그중에서도 그래픽은 언제나 잘 활용해보려 노력한다.

좋아하는 뮤직비디오 감독이 있나? 제임스 블레이크의 ‘Can’t Believe the Way We Flow’, 혁오의 ‘하늘나라’ 뮤직비디오를 제작한프랭크 레본(Frank Lebon), 그리고 라디오 헤드의 뮤직비디오와 보노보(Bonobo)의 ‘No Reason’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오스카 허드슨(Oscar Hudson) 감독을 좋아한다. 앞서 언급한 여러 분야의 예술을 조합하는 작업, 모아놓은 이미지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감독들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선보인 작품에서는 일상의 순간을 수집해온 이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하다. 평소 영감을 수집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 무엇이든 자세하게 뜯어보고 질감을 살피는 걸 좋아한다. 얼굴에 팬 주름이나 피부의 결부터 동물의 가죽과 털, 콘크리트의 표면까지 집요하게. 또 주변의 개성 강한 친구들에게서 수시로 영향을 받는다. 음악 취향만 보더라도 전자음악, 힙합, 포크, 테크노, K-팝 등 좋아하는 분야가 다 다르다. 불교 철학, 한국의 옛 문화, 물리학과 명상, 식물과 자연 등 저마다 관심사가 다른 친구들에게서 받는 영향이 비디오 작업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것 같다.

그렇게 수집한 요소를 모아 장면의 미학적인 면을 구성하는 과정은 어떤가? 그저 예쁘거나, 깔끔하거나, 단정하기만 한 이미지에서는 매력을 잘 못 느끼는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이상하고, 못생기고, 정리되지 않은 이미지를 다양하게 조합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결과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거다.(웃음)

앞으로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이야기나 이미지가 있나? 신체를 왜곡한 이미지를 시도하고 싶다. 사람의 얼굴 형상이지만 피부에 뿔이 달렸다거나, 피부에 특정한 그림이 각인되어 있다거나, 부분적으로 동물처럼 털이 붙어 있다거나. 사람과 동물, 또는 악마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형상이면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업 뮤직비디오에서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다.(웃음) 또 누군가의 시점으로만 진행되는 뮤직비디오도 만들어보고 싶다. 언젠가 자아라는 게 나의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아닌 그저 ‘시점’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크게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