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퀴어의 삶이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멋진 선배도, 오래도록 애써 이어온 소중한 공간도 있다. 그러니 함께 힘을 내서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퀴어든 퀴어가 아니든, 살다 보면바깥의 존재들에게 기대게 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니까.”

영화 <홈그라운드>의 권아람 감독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전용 바 ‘레스보스’에는 여전히 명우형(윤김명우)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호쾌하고 밝은 웃음을 띤 채, 그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권아람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홈그라운드>를 통해 지금껏 왜곡되고 지워져 온 레즈비언 공간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곳을 지키고 또 오가던 이들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혐오와 차별에 맞선 채 일상을 버티고 또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방법은 결국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것’이라는, 그 소중하고 자명한 사실이 영화 <홈그라운드>에 담겨 있다.  

샤넬 다방, 신촌공원, 레스보스 등 한국의 레즈비언에게 ‘홈그라운드’가 되어주었던 공간을 되짚는다. 이 영화의 시작점은 무엇인가.

<홈그라운드>를 만들기 전 <퀴어의 방>이라는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집과 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퀴어의 삶을 다뤘는데, 영화를 만들고 난 이후 이들이 집 밖에선 어떤 공간에 머물러 왔는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퀴어는 시대를 막론하고 전용 공간이나 업소에서 동료를 만나 왔더라. 그런데 그 중에는 외부의 시선이나 개입에 의해 문을 닫게 된 곳이 많았다. 예를 들어 1974년에 문을 연 명동의 샤넬 다방은 풍기 문란과 퇴폐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2년 만에 폐업했다. 신촌공원은 2000년대 초반 10대 레즈비언이 놀이터처럼 이용하던 곳이었는데, 이곳을 몰래 촬영한 장면이 TV에 방송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은 아웃팅이라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지 않나. 이들이 왜 모여서 시간을 보냈고 그 공간들에는 어떤 기억과 마음이 얽혀있는지, 동시대를 살고 있는 퀴어들의 이야기를 통해 돌아보고자 했다

 

영화는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를 운영 중인 명우형(윤김명우)을 중심에 둔다. 그를 영화 안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레즈비언 공간사를 다룸과 동시에 이곳을 오가고 또 지켜온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명우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도 수년 전에 친구들과 레스보스에 간 적이 있다. 단골이 아닌데도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직접 만든 나물 반찬을 서비스 안주로 내어주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는 2000년대 초반에 커밍아웃을 한 이후 여러 장소를 경험하며 많은 이들의 친구이자 멘토로 살아온 분이다. 이 사람 자체가 영화가 담고자 하는 이야기와 커다란 접점이 있었기에, 그의 삶을 따라가 보았다.

 

 

영화 <홈그라운드> 스틸컷

 

윤김명우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새롭게 발견하거나 배운 것도 있나?

처음에는 명우형이 왜 레스보스를 계속 운영하려고 하는지 의문이었다. 이곳을 유지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많아 보였다. 스스로 건강하고 여유가 있어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지 않나 싶어 걱정도 되었다. 힘들 때면 욕을 하고 또 눈물을 흘리더라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어느 순간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명우형은 그저 평범한 개인 아닌가. 활동가로 전면에 나서 살아오지도 않았고, 그에게 레스보스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명우형을 바라보며 ‘평범한 개인이 이 사회를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가게 운영이 어려워지자 다른 식당에서 일을 하거나, 나이가 든 몸을 바라보며 쓸쓸해하던 그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명우형은 유쾌하고 호탕한 모습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보여 왔다. 하지만 난 그 이면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손님들이 한바탕 놀고 떠나버리면 가게가 텅 빌 텐데, 그 공간을 정리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명우형의 마음은 어떨까 싶었다. 70대를 바라보는 레즈비언이자 1인 가구로 사는 삶이 녹록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구석구석 몸이 아플 것이고 간혹 깊은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지금껏 걸어온 길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다가도 가끔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도 있었을 테고 말이다. 그가 품고 있는 솔직한 고민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싶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관객에게 슬픔을 떠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명우형 특유의 호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며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있다면, <홈그라운드>가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농담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건 모두 자신의 삶이 어느 정도 어렵고 힘들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함께 울다 웃고, 결국 힘을 얻어 문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작업했다.

 

영화 <홈그라운드> 스틸컷

 

코로나 시기의 이태원과 故 변희수 하사의 죽음이 있던 시기까지 다루고 있다. 이때 영화를 계속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고 들었다. 어떤 마음을 가진 채 다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나.

여러모로 힘든 시기였다. 변희수 하사뿐만 아니라 퀴어 커뮤니티 내의 여러 사람이 죽음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계속 죽는데 영화는 만들어서 뭐 하나’ 싶었다.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레스보스에서 촬영을 이어가고 있는데 어느 날 가게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안도했다. 그때 이 장소와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명우형이 포기하지 않고 레스보스를 계속 운영해 온 마음 덕분에 나도 이 영화를 끝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

 

영화 <홈그라운드> 스틸컷

퀴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시간과 공간을 영화 안에 불러내는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때론 퀴어의 삶이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멋진 선배도, 오래도록 애써 이어온 소중한 공간도 있다. 그러니 함께 힘을 내서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퀴어든 퀴어가 아니든, 살다 보면 내 바깥의 존재들에게 기대게 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니까. 한국 사회에서 퀴어들이 어떻게 서로의 곁을 내주었는지, 어떤 공간을 형성하고 문화를 만들었는지 살펴보며 자신의 주변을 되돌아보고 타인의 힘을 다시금 믿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겐 그럴 힘이 없을 때도 있으니까. 그럴 땐 나의 안식처를 찾아보거나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며 다시금 나아갈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 <홈그라운드>가 관객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고 존재하길 바라나?

한 평론가 분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퀴어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해준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또 영화제에서 만난 한 관객 분은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찾아온 영화관이 자신에게 또 다른 퀴어 공간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영화 <홈그라운드>가 어딘가에 모여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이 영화 그리고 이 영화가 상영될 공간이 누군가에게 연결과 연대의 감각을 전해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