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과 치료 그리고 희망

2023년 4월 3일 대치동 마약 음료 사건

지난해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대검찰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집계된 마약류 사범은 2만2백30명으로, 1990년대에 비해 5배 이상 증가했다. 마약이 암수범죄임을 생각할 때, 실제로 마약을 투약해본 이들의 수는 통계상 수치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중독생활센터에서 21년째 일하고 있지만, 그전에는 중학생 때부터 25년간 마약을 하며 중독자로 살아왔다. 부끄러운 인생이지만 이런 과거가 있기에 중독자들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46년간 마약과 맞닿은 삶을 살아온 내가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마약 근절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속과 처벌이 아닌 재활과 치료, 그리고 중독자들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는 것이다.

올 한 해 마약과 관련된 다양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중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청소년의 마약 문제다. 지난 4월 3일 대치동 한복판에서 일어난 마약 음료 사건만 돌이켜보아도 우리 일상 도처에 마약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알 수 있다. SNS가 활성화되고 텔레그램 같은 다크 웹이 보급된 이후 마약을 구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게다가 청소년기의 뇌는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 마약에 더욱 취약하다. 청소년 때 마약을 접한 경우 성인 이후 투약한 사람들보다 깊고 장기적으로 중독에 빠질 수 있다.

누구나 마약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지만, 치료나 재활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마약을 범죄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마약중독은 일종의 뇌 질환이기에 치료와 재활이 필수적이다. 마약중독자 수는 나날이 늘어가는 것에 반해 현재 법무부가 지정한 20개 병원 중 마약 전담 치료 시설을 갖춘 곳은 단 두 곳밖에 없다. 마약 전문 상담사도 현저히 부족하다. 마약을 한 번이라도 접한 사람들이 평생 중독자로 살게 둘 수는 없지 않나. 이들이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치료와 재활 지원 체계를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박영덕(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중독재활센터장) 

 

 

공적 애도의 힘

2023년 4월 16일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 고등학생 추락사

서울 강남의 한 건물 19층 옥상에 선 10대 소녀는 투신을 예고한 뒤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켰다. 수십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과정은 녹화된 영상으로 남았고, 이 장면은 SNS를 돌며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7월에는 신림동에서 일어난 칼부림이었다. 이번에도 영상은 어김없이 유포되었다. CCTV 원본은 영상 자체가 잔혹한 데다 2차 가해가 될 수 있어 최초 유포자가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틱톡에서는 검은 화면에 “공유도 하지 마세요. CCTV 영상 절대 보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경고인지 홍보인지 알기 어려운 형태로 횡행하고 있었다. 영상의 선정성과 잔혹성은 콘텐츠가 되어 관심을 끌었고, 대중과 미디어의 관심은 이 현상이 온라인 밈처럼 전염되는 데 기름을 부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적으로는 총 4백76건의 살인 예고 게시물이 올라와 2백35명이 검거됐고, 총 23명이 구속됐다.

날것의 영상이 윤리적이거나 전문적인 가이드라인 없이 돌아다니는 시대다. 타인의 고통은 디지털이라는 판에 올려진 뒤, 무한 복제와 무한 스크롤로 빼곡히 직조된 SNS 안을 떠돌아다니게 되어 있다. 일단 영상이 바이럴되고 나면, 언론 역시 이런 현상을 주제로 기사를 쓰며 영상을 확대재생산하곤 한다. 결과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영상과 마주치는 일이 필연에 가까운 것이다. 이 시대에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빅테크 기업들은 이를 장려하고 부추긴다. 인터넷 문법에 맞춰 더욱 파편화된 영상과 뉴스들이 원래의 맥락을 상실한 채 인터넷 안을 떠다닌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이태원 참사,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샌프란시스코 마약 거리의 영상 등 안타까운 죽음이나 극도의 고통이 때로 구경의 대상으로 끌어내려지는 일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선한 의지를 가진 개인조차 구경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워진 시대에 구경 이후를 말하는 것, 그리고 애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한 일일까? 댓글 창의 냉소적이고 비웃음 가득한 반응, 모자이크 처리가 안 된 채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고통스러운 영상을 보면, 죄책감을 느끼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끔찍한 구경 뒤로 눈을 돌려 우리의 응시를 조금 더 나은 일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죄책감과 무력감, 망설임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정면으로 대면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애도를 위해 당사자의 고통을 경청하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뒷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쓰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어보면 어떨까.

죽음의 변인에 사회의 오류가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공동체적 애도를 수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상실했는지 놓치기 쉬운 죽음들이다. 그래서 오늘도 슬픔의 정치성을 무시하지 않는 ‘공적 애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우리라는 단어나 연대라는 단어가 한물간 듯 여겨지는 시대에도, 공동체라는 개념이 매우 느슨해졌다는 걸 아는 채로도, 그런 상상이 여전히 유용하다고. 고통을 멈추는 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