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천은 모든 것이 드러나 있는 시대의 미끄러운 표면을 열고 들어간다. 두 손은 언제나 낯선 것을 찾고 있다.

김희천은 영상 작업으로 현실에서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는 세계를 조망해왔다. 기술 환경이 발달하면서 개인이 마주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첨단기술 그 자체를 활용해 표현하는 그의 작업은 동시대 인간 삶과 존재 형식을 탐구해왔기에 더욱 주목받았다. 제20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 후 첫 전시이자 김희천의 여섯 번째 개인전 <스터디>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고 있다. 공포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라간 신작은 고등학교 레슬링부를 배경으로 한다.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학생들이 사라진다는 설정과 우울증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던 선생이 야기하는 감각적 괴리와 혼란은 완전한 사라짐의 가능성을 물으며 실존적 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작품의 단초가 된 레슬링장에서 김희천을 만났다.

제20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 이후 에르메스 재단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했죠. 그 경험이 이번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처음에는 패션쇼를 보고 싶었어요. 패션위크에 가면 사람도 많고 인플루언서들이 수많은 콘텐츠를 올리잖아요. 직접 본다면 자연스럽게 저의 작업적 관심사와 연결되는 부분도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패션쇼보다 틈틈이 갔던 미술관이 인상적이었어요. 로댕 미술관에서 조각가 안토니 곰리 특별전과 로댕 상설전을 관람했는데 두 작가의 스터디 모델이 특히 재미있었어요. 작가가 작업을 완성 하기 위해 어떤 생각과 과정을 거쳤는지 스터디 모델에서 더 잘 보이더라고요. 건축과 재학 당시 스터디 모델을 많이 만들었거든요. 부지를 연구하면서 발견된 문제점을 가지고 ‘도시가 이런 식으로 작동하면 더 재밌을 텐데’ 하고 여러 게임 같은 것을 제안해요. 이를 바탕으로 형태를 만들어보는데 이 스터디 과정이 실제 작업보다 재밌었던 기억이 나요. 미술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더 재밌을까? 그래서 ‘스터디’를 주제어 삼아 작업을 생각하게 됐죠.

신작 <스터디>에서 처음으로 극영화 형식의 작업을 선보였죠.

형식적으로 안 해본 것을 해야 스터디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황이나 모습들을 내 눈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카메라든 휴대폰이든 가지고 나가 그것을 찍어보면서 작업을 구체화시키는 편이거든요. 예를 들어 <탱크>(2019)는 잠수부가 수중촬영하는 것을 꼭 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죠. 촬영을 안 해보면 결국 내 머릿속에서 그려낸 그림밖에 못 그리니까요. 그러다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고 언젠가는 마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멀리 갈 일을 깊게 가는 식으로 상황에 따라 방향을 바꾸기도 해요. 이와는 반대로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극영화 형태가 제일 좋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스터디>는 자살을 결심한 고등학교 레슬링부 코치 ‘찬종’에게 레슬링부 학생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찬종의 내면을 따라가는 공포영화입니다. 레슬링 도중 나와 겨루던 상대가 사라진다는 설정의 착안 과정이 궁금해요.

챗 GPT에게 레슬링과 관련된 공포영화 시나리오 5개를 쓰라고 했는데, 선수들이 사라진다는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대부분 통속적이긴 했지만 이 부분에서 선수들이 사라지면 남은 상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됐어요. 요즘 청년들이 뭘 안 하려 하고 자꾸 포기하려 한다는 이야기들을 하잖아요. 체육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학생이 경기를 포기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그런데 막상 어른으로써 고등학생들이 경기를 포기한다는 가정을 하는 게 좀 고약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닌데 왜 그런 가정을 해서 그들이 포기한다는 이미지를 드러내야 하지? 동료 작가들과 이런 논의를 나누던 중 실제 그런 사례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육상경기에서 (2020년 KBS배 전국육상대회 여자고등부 1,600m 계주 결승전) 한 선수가 너무 뛰어나 나머지 선수들이 모두 기권하고 혼자 뛰었다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5팀 중 2팀만 뛰었는데 기권하지 않은 한 팀은 2등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는지 뛰다가 1분 만에 포기했어요. 1등 혼자 완주한 거죠. 이 일화가 황당하고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육상은 자기와의 싸움이라 경쟁이 아닌 기록 스포츠인데, 이것을 너무 경쟁 스포츠로 생각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코멘트가 있더군요. 그런데 레슬링은 그야말로 경쟁 스포츠잖아요. 레슬링 하는 친구들을 대상으로 해볼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고, 자의적이 아닌 미스터리에 의해 사라진다면 재밌겠다 싶었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 내러티브에서 잘 다룬 것 같지는 않아요.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공포영화가 옛날만큼 무섭게 작동하기 어려워진 것 같다는 말을 했죠. 영화에서 그 사라짐이나 그림자, 때로는 실종자의 윤곽으로 느껴지는 것을 어떤 이미지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도리어 그렇지 않았어요. 정확하게 이것이 무엇인지 정하지 않았거든요. 그냥 공포영화의 시각적 클리셰로 암시만 주려 했어요. 없으면 작동하지 않지만 있을 때 그것 때문에 무서울 필요는 없는. 학생들이 사라졌고, 학생의 어머니가 나타나서 아들의 상대들이 사라지고 아들도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 사라진 학생이 누군지, 실제 하긴 하는지 선생은 모르겠는 채로 계속 그 학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죠. 실제로 사라진 것은 다른 학생들이고요. 전반적인 분위기나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무서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스터디> 투-채널 비디오, HD (16 :10 ), 5.1 채널 오디오, 40분, 에르메스 재단 제작 지원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스터디> (2024, 스틸 이미지) © 김희천, 에르메스 재단 제공
<스터디> (2024, 스틸 이미지) © 김희천, 에르메스 재단 제공

주인공이 시달리는 환청은 내내 관객을 자극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암전된 채 소리만 흘러나옵니다. 눈을 감고 들으니 순간 내가 사라지고 그 소리를 따라 이동하게 됐어요.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내가 여기에 있음을, 나의 현장성을 더욱 감각하게 했습니다.

규모나 예산도 그렇지만 미술과 영화는 작동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양한 구성을 짜고 들어갔어요. 고도로 시각화할 수 있는 환경에서 공포영화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극단적으로 안 보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코치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뒤에 아주 얕게 깔려 있어요. 소위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장면이 소리로 먼저 나오고 그게 반복되는데, 반복됨 자체를 캐릭터가 알고 있고 이 때문에 공포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관객들도 이 반복을 깨닫는 순간 내가 들었던 소리가 시각화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어떤 식으로 시각화 될 것인지 호기심을 유발하며 시간차를 줄 수 있는 장치로 연출했어요. 하다 보니 약간 유치하게 느껴져서 많이 줄였어요. 어쨌든 대부분의 공포영화들은 소리가 먼저 다가오면서 시작하잖아요. ‘쿵’ 소리가 나면 뭐지? 하면서 시작되니까 그것을 아주 극대화해서 많은 소리들이 확 나버린 후 내가 그 소리들의 정체를 서서히 알아가는 캐릭터라면 좋겠다 싶었어요. 사운드로 관객도 똑같이 체험할 수 있으니까요.

‘내 목소리가 먼저 오면 나는 나로써 그 목소리를 듣는다’라는 진술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군요.

네. 이 부분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복도에서 발생한 소리를 듣고 나면 정확히 어디인지, 어떤 소리인지는 찾아가봐야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찾아간다고 해서 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죠. 소리의 정체를 모르면 공포감은 사라지기 어렵고요. 소리가 먼저 오는 것이고,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그 소리가 사라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캐릭터의 진술처럼 자기의 삶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사라지기 어려울 테죠. 그런데 사라지고 싶고 주위의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며 인생의 많은 부분을 소거시키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가 들린다면, 또 그것이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소리라면 이 사람이 딜레마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극 중 몸이 사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머리만 남아 레슬링을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신체는 ‘내가 나를 벗어날 수 없음’이 강요되는 장소이기도 하죠. 신체의 어떤 지점이 작업적 흥미로 이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근래 제 자신에게 흥미를 많이 잃었어요. 기술 환경이 저의 많은 것들을 대신해주고 있는데 그게 너무 설득력 있는 거예요. 음악을 ‘디깅한다’며 찾아들었는데 이젠 디깅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남들이 모르는 것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는데 요즘은 그런 게 정말 없고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 있는 것 같아요. 기술들이 제 삶의 반경을 굉장히 안전하게 구축해주죠.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스포티파이에서 추천해주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요.(웃음) 여전히 취향 좋은 친구들에게 추천 받고는 하지만. 이렇게 나를 다 아는 것 같은데, 사실 내가 나를 안다는 표현이 진짜 오만하고 위험하게 들리잖아요. 어떻게 실제로 자기 자신을 알겠어요. 기술이 파악한 내 모습에 내가 설득된 것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아요. 시간도 그래요. 예전 같으면 과거가 내 기억 속에 있으니까 사실과 다르기도 하고 추상화된 부분도 있는데, 지난 과거는 사진에 다 나와 있고 어디에 갔었는지 구글이 맵으로 정리해주죠. 스스로 기억을 재정립하려는 마음이 없어지면서 미래도 지금 내가 입력하고 있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성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거기서 유일하게 벗어나는 것이 신체인 것 같아요. 제가 엄청난 몸치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어떤 동작을 하라고 해서 하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고 하고, 그렇다면 내가 지금 무슨 동작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신체를 잘 아는 엘리트 선수라면, 운동을 위해 신체를 리뷰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궁금해서 신체와 관련된 작업을 몇 개 했어요. 파워 리프팅하는 선수들에 대한 VR 작업(<사랑과 영혼>, 2021)이 그랬죠. 보통 운동할 때 거울을 보며 하잖아요. 그러면 마음은 안정되는데 거울 보느라 고개 각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자세가 안 좋아질 수 있대요. 그래서 보통은 자신의 자세를 잘 볼 수 있는 특정한 각도를 찾아 그 각도에서 촬영하고 그걸 보고 스스로 피드백을 해서 촬영하기를 반복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거운 걸 드는 공간에는 거울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비디오 속에서 내 신체를 보는 것과 실제 내 신체의 감각은 어떻게 다른가에 초점을 맞춰 작업을 했어요. 더 좁게는 손에 중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요?

손이 꽤 많은 것들을 다루는 한 면이잖아요. 작년에 <게임 사회>라는 전시에 참여하면서 참고 문헌으로 하이디 래 쿨리의 이라는 논문을 읽었어요. 휴대폰을 꺼내드는 것이 습관이라고도 하지만 어떨 때는 손에 꼭 들어맞는 느낌 때문에 꺼내기도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손으로 휴대폰을 조작할 때 어쩌면 기계가 불러서 내가 손을 이용해 접속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어요. 강정석 작가가 쓴 글에서도 모든 앱들은 무언가를 입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고요. 휴대폰이 입력을 받아야 우리의 삶을 구성할 수 있잖아요. 가끔 나도 모르게 앱을 켰다가 딱히 할 게 없어서 다시 휴대폰을 넣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때 이 기계가 ‘fit’이라는 상황을 만들어서 감각적으로 내 손과 기계가 연결된다는 느낌, 그리고 이 기계가 나를 불러서 조작시켰다는 느낌을 준다고 생각해보면 손에 더욱 흥미가 가요.

이번 작품도 평소에 레슬링을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재로 가져오게 됐다고요.

항상 올림픽 종목 스포츠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랜 체계가 있어서 파고들 만한 구석이 있을 거라 생각했죠. 파란 도복이 예뻐서 유도를 배운 적이 있는데 친구가 레슬링을 배우고 있다길래 함께 간 게 시작이었어요. 레슬링은 미국 사람들이 즐겨 입을 것 같은 수더분한 체육복을 입고 하는데 레슬링화가 너무 예쁜 거예요. 약간 부츠처럼 생겼고 복싱화보다 위가 짧아요. 레슬링화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말이 된다, 이 운동을 하자.

충분한 이유네요. 찍어 두고 뺀 장면들이 아주 많다고 들었어요. 마지막까지 넣을지 말지 고민했던 장면은 무엇인가요?

코치로 분한 이찬종 배우가 대회 매트 앞 심판석에 앉아 쉬는 듯이 고개를 뒤로 확 꺾고 있는 장면이 있어요. 머리가 길어서 귀신같기도 하고 얼굴이 반지르르해서 예뻤거든요. 매트에서는 한 학생이 어떻게든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고 있고요. 이 장면을 잘 활용하고 싶었는데 넣을 곳이 없어서 빠진 게 아쉬웠죠.


<스터디> (2024, 스틸 이미지) © 김희천, 에르메스 재단 제공

편집과 배열할 때 어떤 기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보통 첫 장면과 제목이 먼저 나오거든요. 타이틀을 만들어서 얹어 놓으면 이미 작업 같으니까 계속 만들어나갈 힘이 생기는데 이번 작업은 첫 장면이 너무 안 나와서 고통스러웠어요. 중간부터 찍기도 했고요. 보통이라면 어느 정도 배열을 해놓고 화면의 리듬으로 편집을 많이 하는데, 이번에는 그것보다 내러티브가 앞서야 되니까 그 고민이 많았어요. 서사를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배치는 해놓고 중간중간 돌아가면서 디테일하게 만들었죠. 극영화는 신 단위로 정보 전달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구성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숏 별로 찍어놓고 연결을 시켜야 하니 촬영이 정말 오래 걸리더라고요.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한 장면을 몇 시간 동안 찍기도 했어요. 처음 하는 방식이라 재밌었지만 경제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조금 했고.

원래 하던 작업은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는 쪽에 가까운 데 반해 영화는 오랜 문법이 있고 그것을 따라가는 게 오히려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서 거의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웃음)그런 건 줄 전혀 몰라서… 어려웠어요. 예상대로 안 되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도 했고요.

매번 시도하는 방식과 의도와는 무관하게 내 작품이 언제나 향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기본적으로 정해진 결과물로 향해가는 것을 피하려고 해요. 예전에 사람들이 내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어요. 의미가 있나? 기술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나만큼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이런 생각과 달리, 또 작업에 비해 좋은 평을 얻곤 했어요. 재밌는 부분이 있나 봐요. 그런데 그 해석이나 평들이 내가 하고자 하는 핵심에서 빗나가 있었거든요.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작업들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들이 실제로 사회에서 그대로 일어나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하는 작업들도 생겼어요. 그런 것을 보면 제 작업은 아직 규명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설명해보려는 시도들인 것 같아요. 내용이든, 형식이든, 작업 방식에서든. 이것이 유일하고 일관된 저의 방향인 듯해요.

작업이 의도와 다르게 읽힐 때 작업이 가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생기기도 하고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다들 말하듯 저 역시 작업을 내놓는 순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당연히 의도와 다르게 볼 수 있는데 너무 못 알아듣는다 싶을 땐 속상하기도 해요. 내가 못 만들었을까봐. 내가 잘하는 건 새로운 사회 속에서의 기술 환경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재밌는 작업을 만드는 게 아닐까. 그것도 나름의 재능이고 좋은 일인데 그럴 거면 그것을 더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게 맞나? 난 그런 것을 하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내가 하고 싶은 건 사람들이 아직 부를 단어가 없어서 이름 부르지 못하는 것을 작업으로 만들어 간접 체험하거나 감상하게 만드는 건데 이미 어디서 읽은 글을 바탕으로 제 작업을 해석하려 하면 슬퍼요. 제 작업을 설명할 때 ‘가상’과 ‘현실’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2018년부터는 그렇게 설명할 수많은 없는 작업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작업을 하면 그 중 60%만 아는 것 같고 나머지는 저도 모르게 한 것들이 많아요. 나중에 봤을 때 ‘와, 진짜 좋은 작업이었구나’ 혹은 ‘약간 유치했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작업자로서의 즐거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