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는 시류에 휩쓸려 나도 잠깐씩 새벽잠을 설치며 윔블던 테니스 경기를 본다. 열네 살 때 초급 레슨을 받다가 얼굴로 날아오는 공에 질끈 눈을 감아버린 뒤로 테니스와는 담을 쌓았고 기껏해야 조코비치나 샤라포바의 이름밖에 모르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관람하기에 참 멋진 스포츠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다른 메이저 대회는 무심히 넘기다가 유독 윔블던 시즌에만 반짝 눈이 빛나는 걸 보면, 내 관심의 초점은 솔직히 염불보단 잿밥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잿밥이란, 오직 윔블던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와 스타일을 말한다.
1877년부터 3세기에 걸쳐 1백39년째 이어지고 있는 윔블던은 전통의 가치를 무엇보다 우선하여 내세우는 대회다. 슈퍼볼이나 월드컵처럼 상혼에 물들어 자극적인 볼거리와 노골적인 광고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여타 스포츠 경기와 달리, 이곳에서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후원사의 로고는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4대 메이저 경기 중 유일하게 많은 관리 비용이 요구되는 잔디 코트의 전통을 일부러 유지하며, 여자 선수를 호명할 때는 꼭 ‘Ms.’나 ‘Mrs.’를 붙여 숙녀를 극진히 우대하는 영국 신사의 정중한 느낌을 물씬 풍긴다. 심판과 볼보이 등 경기를 운영하는 스태프는 모두 랄프 로렌이 디자인한 멋진 유니폼을 입고 있으며, 관람석으로 눈을 돌리면 점잖게 차려입은 안나 윈투어나 베컴 부부 같은 유명인사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뿐인가, 운이 좋으면 당신은 로열패밀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는 행운까지 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윔블던 경기를 보는 건, 출전하는 선수들에게는 악명이 높은 드레스 코드, 바로 ‘올 화이트’의 엄격한 룰 때문이다.
사실 ‘선수는 흰색만 착용할 수 있다’는 윔블던의 깐깐하고 보수적인 규칙은 참가하는 선수나 그를 후원하는 기업으로부터 종종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앤드리 애거시는 18세이던 1988년부터 3년간이나 출장을 거부해 화제를 모았지만 세계 최고 스타의 압력에도 윔블던의 견고한 벽은 뚫리지 않았다. 결국 백기를 든 애거시는 1991년에는 얌전한 흰옷을 입고 나타났지만, 들끓는 반항심을 여실히 보여주듯 샛노란 고글을 착용했다. 2013년 로저 페더러는 규칙대로 완벽한 흰색 복장을 준수했지만 뛸 때 보니까 테니스화 바닥이 오렌지색이더라며 한 경기 만에 퇴짜를 맞았는데, 공교롭게도 그해에는 2회전 만에 탈락하는 불운까지 겪었다. 그때는 물론 심판이 너무하다는 생각을 나도 잠깐 했다. 하지만 욕을 먹더라도 규칙은 규칙이라는 주최 측의 고집불통 덕에 윔블던 특유의 정체성이 지켜질 수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렇다. 테니스 코트는 원래 흰옷을 입고 들어가야 하는 장소였다. 20세기 초반에 찍은 오래된 사진이나 영상 자료를 보면 남자나 여자나 선수들은 모두 흰색 옷을 점잖게 차려입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가 ‘테니스 화이트’를 주창했으며 왜 꼭 흰색이었냐고 묻는다면 답은 애매하다. 더운 낮 시간에 햇빛을 차단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기능적 측면에서 해석하는 설도 있지만, 그렇다면 오늘날 치열해진 프로의 세계에서 검은색을 포함한 다양한 색상의 선수복이 존재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귀족 사회에서 사교의 일환으로 시작된 테니스의 탄생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을 던지고 받는 원시적인 놀이를 경기 규칙과 득점 방식을 갖춘 ‘테니스’라는 스포츠로 발전시킨 것은 산업화와 제국주의를 향해 숨 가쁘게 팽창해가던 영국 사회였다. 전통의 귀족들과 새롭게 부를 축적한 상공업자, 그리고 정복 시대에 한창 각광받던 해군 장교 등이 자신들을 노동자 계급과 차별화하려 했던 가시적인 증표가 바로 여가 시간에 입는 흰옷이었다. 한 번만 입어도 더러워지는 옷, 세탁에 많은 주의가 필요한 옷은 농부나 직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으니, 당연히 흰옷은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여름 휴양지 패션에서 유독 흰색이 지배적이었듯, 유산계급의 문화였던 테니스에서도 자연스럽게 흰옷을 입는 게 관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은 테니스가 좀 더 대중화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테니스 코트에 조금이나마 컬러가 스며들기 시작한 건 탄생한 지 1백 년이 훌쩍 지난 1970년대의 일이니까.
상류층의 놀이로 시작했기 때문인지, 테니스는 태생부터 매우 패셔너블한 스포츠였다. 흰색의 한계 안에 있었으면서도 테니스 웨어가 20세기 스포츠웨어, 나아가 패션 전체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끌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1920년대의 스타플레이어이던 르네 라코스테가 처음으로 만들어 입었던 테니스 셔츠는 선풍적 인기를 끌며 곧바로 폴로 선수와 골프 선수에게 전파되었으니, 테니스 셔츠와 폴로 셔츠, 그리고 골프 셔츠는 겉모습이 꼭 닮은 사촌간으로, 후일 랄프 로렌의 브랜드 ‘폴로’로 집대성되는 아메리칸 스포츠웨어의 기초 문법이 이때 다져졌다 할 수 있다. 여자의 경우 수전 랭글런이라는 걸출한 선수와 쿠튀르 디자이너 장 파투가 결탁해 이루어낸 활약이 두드러진다. 오렌지색 헤드밴드에 활동적이면서도 우아한 주름치마를 입은 랭글런은 그야말로 코트 위를 붕붕 날아다니며 자유와 모더니티를 향한 여성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저격했다. 랭글런의 스타일은 코르셋과 드레스의 감옥으로부터 여자들이 완전히 해방되기까지의 긴 과정 중 가장 선봉에 있었던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격식은 지켜져야 하는 전통일까, 아니면 파괴해야 할 인습일까? 나는 테니스가 그 전통에 걸맞게 아주 품위 있는 스포츠로 지켜지기를 바라지만, 내가 좋아했던 스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같이 규칙대로 옷 입기를 거부한 형식의 파괴자들이었다. 특히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는 머리칼에 종종 땀에 흠뻑 젖은 맨가슴을 드러내며 거칠게 포효하던 20대의 앤드리 애거시가 그랬다. 그의 실력은 ‘넘사벽’ 라이벌 피트 샘프라스에 가려져 사실상 2인자에 가까웠지만, 대중(특히 소녀들)의 애정은 늘 반듯한 모범생 같은 샘프라스보다는 잘생기고 끼도 많던 애거시를 향해 있었다. 그는 스타일에도 관심이 많았고, 시선을 사로잡는 방법도 잘 아는 프로였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물 빠진 데님 반바지 안에 형광색 라이크라 속바지를 입는, 패션이라 부르기에도 해괴한 스타일로 경기장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애거시가 그러는 것은 참아준다고 해도, 이때부터 테니스 코트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라이크라와 테크노 컬러의 결합은 정말 보기에 끔찍했다.
신소재는 분명 인류의 기록 달성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스포츠보다 스타일을 훨씬 좋아하는 내 허영을 솔직히 드러내놓고 말하자면, 폴리우레탄의 발명은 그야말로 개탄을 금할 길 없는 유감스러운 사고다. 스판덱스가 없던 시절에 선수들이 겪었을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관중의 입장으로만 말하자면 그 시절이 훨씬 보기에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다양성과 변화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흰색만이 정답일 수 없고 보수적인 스타일만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오늘날 세리나 윌리엄스 같은 세계 최고의 선수가 우승컵을 들어 올릴 때, 요란하고 괴상한 커팅과, 아름답지 않고 다만 과도할 뿐인 노출과, 현란한 형광 무지갯빛이 결합된 최악의 유니폼에 의례적인 찬사를 늘어놓는 신문 기사는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다. 에어로빅 스타일이라면 지난 10여 년 동안 피로감이 쌓일 만큼 충분히 봐왔으니, 누군가는 솔직하게 ‘이제 그만’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사람은 늘 미래를 보며 살아야 하지만, 때로는 과거 속에 가장 좋은 것이 이미 있을 수도 있다. 스포츠웨어에 관해서라면, 내 취향은 확실히 레트로 마니아에 가깝다. 무조건 먼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위대한 개츠비>의 우아함, <세브린느>의 발랄함, <애니 홀>의 세련미 중 아주 작은 일부라도 코트로 돌아올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윔블던의 복장 규정을 누가 정하는지 몰라도, 그는 아마 나와 비슷한 취향과 소망을 지닌 사람이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