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과 나이가 불분명한 아크네 광고.

성별과 나이가 불분명한 아크네 광고.

멀티숍 어라운드 더 코너의 이미지 리뉴얼 작업을 하면서 밴드 혁오를 처음 만났다. 홍대의 인디 록 밴드로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던 그들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홍대 인디 록 밴드의 패션 공식을 완전히 깬 옷차림으로 촬영장에 나타났다. 푸른빛이 도는 삭발에 귀와 인중엔 피어싱을 하고, 온몸에 귀여운 타투를 새긴 채 꼼데가르송과 슈프림의 협업으로 탄생한 코치 점퍼를 입은 리더 오혁이 풍기는 분위기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다국적’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까? 인디, 스케이트 컬처, 힙합, 스트리트 스타일, 동양적이고 영적인 무드, 1990년대 예술학교 학생 같은 느낌이 모두 뒤섞여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는 록 밴드의 리더이자 ‘베이스크림’이라는 힙합 크루이기도 하다.) 뉴욕에서 오래 산 동양 소년 같기도 하고, 얼핏 일본 스트리트 신의 남자아이 같기도 하고, 베를린의 쿨한 타투이스트나 스케이터 같다가도 사회주의국가에서 자란 듯한 생경한 컬러가 곳곳에 묻어 있는 다국적인 이미지를 가진 청춘.

불과 2~3년 전만 해도 유스 컬처의 상징은 삐딱하게 쓴 누에라 캡과 미국의 힙합적인 태도로 대변되는 듯했다. 예상이 가능했다. 공식이 있었다고 할까? 그러나 요즘 가장 핫하다는 클럽 ‘헨즈’에 들어선 순간, 나는 유스의 흐름은 또 다른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클럽 안엔 반듯하게 쓴 슈프림의 캠프캡, 90년대 압구정 로데오거리나 강남역 주변에서나 볼 법한 폴로 캡을 쓴 삭발의 남자아이들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쿨 키즈들에겐 그들만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게 마련이다. ‘그걸 해야’ 우리 신으로 들어올 수 있어, 하는 듯한 무언의 경고? 아무튼 작고 동그란 피어싱과 ‘무섭지 않은’ 타투는 마치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프리패스 카드처럼 보였다.

 

남자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고샤 루브친스키의 티셔츠나 챔피언의 스웨트셔츠, 라프 시몬스의 아디다스, 반스, 요란한 프린트의 슈프림 반팔 셔츠 같은 것들을 입고 있었는데, 올드 스쿨 풍에 펑크적인 느낌도 가미되어 있었다. 심지어 3백 달러가 훌쩍 넘는 베트멍의 티셔츠에 리바이스 501을 90년대 풍으로 입은 여자아이들도 목격되었다. 도대체 이 복잡하고 정의할 수 없는 이미지는 뭐지? 나는 DJ 플라스틱 키드가 트는 디스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청춘들을 보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명들을 하나씩 읊었다. 캘리포니아, 뉴욕, 90년대 강남역, 러시아, 압구정 로데오, 동베를린, 파리, 도쿄, 뉴웨이브 열기로 가득했던 80년대 이스트 런던! 지금 전 세계 패션(심지어 하이엔드 패션까지)을 흔들고 있는 이 멀티컬처럴 무드는 한반도의 뜨거운 유스 컬처에도 공평하게 안착한 것이다.

그런 다국적인 이미지들은 러시아의 패션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가 만드는 컬처 안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고샤 루브친스키를 지배하는 정신은 ‘스케이트’와 ‘로 테크’ 그리고 ‘러시안 스트리트 키즈’다. 그는 그 세 가지 패스워드로 오늘날 유스 컬처의 심장을 공략하고 있으며, 영원히 젊은 디자이너 레이 카와쿠보는 그의 모든 컬렉션을 후원하고 있다.

지난여름, 도쿄 긴자의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선보인 고샤 루브친스키와 반스의 협업 프로젝트는 지금 유스 컬처가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어떤 지표 같았다.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 죽 놓인 3대의 애플 아이맥 컴퓨터 안에선 고샤가 디자인한 반스 스케이트 슈즈를 신은 채 말없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스크바의 청춘들이 가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샤가 주장하는 이미지들은 언제나 의도적으로 로 테크 무드를 띠고 있다는 거다. 그 영상 역시 마치 가정용 캠코더로 촬영한 것 같았다. 80~90년대의 VHS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뿌옇고 다듬어지지 않은 화면의 질감. 마치 내가 내 친구들을 찍고, 내 친구들이 나를 찍어준 것 같은 지극히 개인적 기록처럼 보이는 영상들. 오랫동안 닫혀 있고 감춰져 있던 러시아 쿨 키즈들의 소년 시절(boyhood)이 ‘스케이트 컬처’를 통해 패션계의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새로운 관점의 ‘젠더리스’로 지금 가장 핫한 브랜드로 등극한 베트멍 역시 이 ‘로 테크’ 기법을 적극 활용한 필름을 선보였다. 아방가르드와 스트리트 무드,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베트멍의 옷들은 그런 질감의 영상 안에서 더 에로틱하게 보였다. 모호한 성적 에너지에서 폭발하는 에로티시즘! 이번 시즌 아크네 광고 캠페인 역시 국적, 성별, 나이가 모호한 이미지를 보여줬다. 아크네식 젠더리스란! 그 주인공은 아크네의 설립자 조니 요한슨의 아들 프라세 요한슨이다. 올해 나이 열한 살!

언제나 하이엔드 패션을 사랑했던 지드래곤 역시 최근 스케이트 컬처에 푹 빠진 듯 보인다. 오혁이 슈프림과 스투시, 아디다스와 협업한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팔라스(Palace), 퍼킹어썸(Fucking Awesome), 트래셔(Thrasher)를 입는다면, 지드래곤은 프렌치 스케이트 브랜드 비앙카 샹동(Bianca Chandon)을 입는다. 그들은 쿨한 유스 컬처를 대변하는 스케이트 브랜드를 대중 사이로 끌어들였다. 도대체 누가 <무한도전>에서 비앙카 샹동과 트래셔의 후드 티셔츠를 볼 것이라고 기대했을까.

70년대 풍 스케이트 컬처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비앙카 샹동의 디렉터 알렉스 올슨(Alex Olson)은 지금 스케이트 컬처에서 가장 멋진 이름이다. ‘LOVER’라고 쓰인 스웨트셔츠, 코치 재킷은 출시되자마자 모든 온라인 몰에서 품절되어 지금도 이베이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심지어 테리 리처드슨이 만든 매거진 <리처드슨>에서 출시한 레이블 ‘리처드슨’의 공공연한 팬이기도 하다. 리처드슨 역시 스케이트 컬처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며, 도버 스트리트 마켓, 슈프림 등에서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완판된 기록을 세웠다. 스트리트 룩에 관심이 있다면 아마도 한번쯤 R 로고가 크게 쓰인 리처드슨의 베이스볼 점퍼나 티셔츠를 입은 미즈하라 키코, 콜 모어, 김원중 같은 국내외 패션 피플의 룩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에르메스의 애니메이션 필름〈Hermes Mani-feste: a Man, a List, a Twist〉는 쿨한 소년들의 전유물이던 스케이트 컬처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였다. 우아한 에르메스 맨은 실크 타이를 매고 스케이트를 탄다. 고상한 프렌치 브랜드에게 그들이 동시대적임을 보여주는 방식은 바로 스케이트 컬처의 무드를 차용하는 것이었다.

10여 년 전 한 광고 에이전시의 아트 디렉터에게 ‘동시대적인’ 것의 의미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동시대적이라는 건 런던이나 바르샤바의 스튜디오에서 듣는 음악이 한국에서도 들리는 것, 그런데 그것이 낯설거나 이상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오혁에게 지금의 ‘유스’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엄청나게 쏟아지는 정보와 지식 사이에서 과부하에 걸린 세대’라고 답했다.

긴자의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애플 아이맥을 통해 스케이트를 타는 고샤의 모스크바 소년들을 보며, 나는 그들의 대답을 떠올렸다. 지금 전 세계 도시의 청춘들은 같은 플랫폼에 서서 엄청나게 쏟아지는 그림들을 함께 보고 있다. 과부하에 걸렸건 어떻건 그들은 비로소 ‘동시대적’이라는 형용사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세대다. 지금은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만 넣으면 전 세계를 볼 수 있는 시대니까. 다만 그것을 각자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로컬리즘이 해답이 되어줄 것이다.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모두 뒤섞였다. 그것이 오늘날의 유스다. “나는 언제나 국제적으로 말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러시안 악센트로요”라던 고샤 루브친스키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