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베네치아에서 왔어요
입춘이 지났어도 추위는 쉽사리 물러가지 않는다. 마음은 봄인데 날씨는 아직 겨울인 이런 계절엔 완벽하게 중립적인 뉘앙스의 회색 옷이 딱이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가장 아끼는 바레나(Barena) 니트 코트를 꺼내 입어야 할 때. 그러고 보니 이 생소한 브랜드를 처음 발견한 것도 딱 요맘때던가. 3월에 코트를 사다니 스스로도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평생 싫증내지 않고 잘 입을 거라는 본능적 예감을 믿었다. 다행히 지난 3년간 나는 이 코트를 애매한 계절마다 닳도록 입으며 충분히 본전을 뽑았다. 어깨 패드나 심을 넣지 않아 가볍고 실루엣이 부드러운 언컨스트럭티드(unconstructed) 재킷은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친근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어 입을 때마다 조금씩 더 좋아진다.
그런데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나 말고 한 명 더 있다. 바로 남편이다. 내 코트를 볼 때마다 마치 처음 보는양 “이건 뭐야? 어디서 샀어?”를 반복하며 앞섶을 만지작거리는데, 이건 분명 자기도 하나 갖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다. “사주고는 싶은데 아마 쉽지 않을걸. 이건 베네치아에서 왔거든.” 나는 짐짓 거들먹거리며 안쪽에 있는 주홍색의 라벨을 확인시킨다. 양손에 노를 쥐고 곤돌라를 몰고 가는 뱃사공의 실루엣. 그렇다. 바레나는 특이하게도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진 브랜드다. 이탈리아에는 밀라노나 로마, 피렌체 등 쟁쟁한 패션 도시가 너무 많아서 베네치아는 감히 거기 낄 재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55년 된 이 브랜드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진달까. 그러니까 내가 이 코트를 그토록 아끼고 즐겨 입는 데는 ‘베네치아 프리미엄’도 분명 한몫하는 것이다.
‘안알랴줌’이라는 태그가 한때 유행했었다. 좋은 것을 공유하는 게 SNS지만 안 알려진 좋은 건 혼자만 즐기고 싶은 심리도 있다. 내 경우엔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로컬 브랜드가 딱 그렇다. 파리나 뉴욕이나 밀라노의 유명 메이커야 누구든 알고 좋아하겠지만, 그보다 변방에 있으면서 특별한 지역색을 갖고 있는 브랜드를 만나면 나는 그걸 혼자만 알고 싶고, 개인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어진다. 예를 들면 발리의 ‘바이더시(By the Sea)’가 그랬다. 인도네시아 패션이 별게 있겠나 싶지만, 부유한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인지 수영복과 리넨 셔츠는 아주 세련되고 퀄리티도 좋았다. 빌브레퀸(Vilebrequin)의 고향이기도 한 생트로페에는 빌브레퀸 말고도 ‘케이자크(K. Jacques)’라는 다른 실력자도 있다. 브리지트 바르도나 피카소 같은 유명인사도 남프랑스에선 여기 샌들을 신고 다녔다는 전설을 보유한 생트로페의 터줏대감이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는 서부의 활기찬 분위기에 맞는 훌륭한 스포츠웨어 브랜드 에이서(Aether)를 발견했는데, 기능적이고 미니멀하며 무엇보다 실루엣이 날렵한 것이 강점인 브랜드다. 특히 레깅스는 지금껏 입어본 것 중 착용감이 압도적으로 훌륭해서 여러 벌 사 오지 않은 걸 후회할 정도였다.
친구들이 룰루레몬의 레깅스를 얘기하면, 나는 더 좋은 게 있더라는 얘기를 해줄까 말까 망설이곤 한다. 에이서와 케이자크와 바이더시와 바레나의 팬으로서 그 브랜드가 앞으로도 잘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어그나 세인트 제임스처럼 흔해지는 건 결단코 싫기 때문이다. 못된 소리 같지만, 진짜 좋은 것은 안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만 은밀히 즐겼으면 좋겠다. 바레나는 그냥 베네치아에서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레나를 사기 위해 베네치아로 여행 갈 핑계가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