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가 급변하는 건 사실이지만, 결국 화이트 셔츠를 능가하는 아이템을 발견하긴 힘들죠. 어떤 룩과 매치해도 안전한, 금고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별도의 컬렉션을 선보일 만큼 화이트 셔츠에 깊은 애정을 보이는 캐롤리나 헤레라의 말처럼 화이트 셔츠는 ‘유행을 타지 않는(timeless)’ 아이콘이자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2016 S/S 시즌 디자이너들은 이 변함없이 고고한(!) 아이템에 해체주의적 요소를 조합해 또 하나의 신선한 트렌드를 탄생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레이블은 후드바이에어. 2006년 로고 플레이를 앞세운 화이트 티셔츠로 붐을 일으킨 디자이너 셰인 올리버의 다음 타깃은 명백히 화이트 셔츠였다. 물론, 타고난 탕아가 평범함을 거부한 것은 당연지사. 인비테이션에서부터 명시한 ‘충격요법(Galvanize)’은 어깨선을 과감히 커팅한 오프숄더 라인과 가슴 바로 아래까지 댕강 잘라낸 크롭트 컷 화이트 셔츠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프로엔자 스쿨러는 또 어떤가. 이 레이블의 천재 디자이너 듀오는 쿠바의 화려한 전통 의상을 세련되게 풀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화이트 셔츠를 선택했는데, 한 매체에서 ‘축복받은 해체주의(Blissful Deconstruction)’라고 명시할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오려낸 컷아웃을 앞세웠다. “화이트 셔츠가 섹시해지는 건 시간문제죠.” 잭 맥콜로가 한 말처럼 쇼에 등장한 셔츠는 단순히 셔츠라고 하기엔 너무나 예뻤고, 러플, 아일릿 레이스 등 정교한 디테일까지 더해져 잠잠하던 구매욕을 불끈 솟게 만들었다.
한편, 화이트 셔츠에 대한 편견을 단번에 뒤집을 만큼 쇼킹한 쇼도 있었으니, 바로 파리의 대세 자크뮈스다. 디자이너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가 연신 강조한 해체와 재조합을 거친 화이트 셔츠라니! 맨발에 남성용 화이트 셔츠만 달랑 걸친 아이가 초대형 공을 굴리며 시작된 쇼엔 화이트 셔츠 끝자락을 동글게 매듭지은 랩 원피스부터 한쪽 소매를 과감히 잘라 비대칭 실루엣을 이룬 셔츠, 화이트 셔츠의 떼어낸 소매를 한쪽에 묶은 테일러드 재킷 등 드라마틱(!)하게 셔츠를 재구성한 아이템이 속속 등장했다.
오리고 붙이는 작업만큼이나 눈에 많이 띈 디테일은 바로 르네상스 요소를 더한 벌룬 소매. 자일스는 허리선을 강조한 러플 장식 반소매 셔츠와 오프숄더 셔츠를 변형한 드레스를 선보였으며 펜디는 풍성한 벌룬 소매 셔츠를, MM6는 커다란 리본 타이와 한껏 부풀린 소매로 포인트를 준 셔츠를 선보였다.
다채로운 실루엣으로 변형된 화이트 셔츠를 연출하는 방법 또한 흥미롭다. 국내 브랜드 렉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지연은 셔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스타일링하기로 유명한데, 2016 S/S 시즌 로맨틱한 오프숄더 셔츠를 랩스커트로 연출하거나 셔츠 위에 뷔스티에 톱을 레이어드하는 데 꽂혔다. “컬렉션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이템이 셔츠예요. 버튼을 몇 개 풀지, 소매를 롤업할지 말지, 셔츠 밑단을 꺼내 입을지 말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거든요.” 평소 남성복 화이트 셔츠를 미니 원피스처럼 입거나 다양한 실루엣의 셔츠에 데님을 매치해 위트 있는 룩을 즐기는 린드라 메딘의 스트리트 스타일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혹자는 ‘클래식’이란 이름 아래 똑떨어지는 핏을 앞세운 화이트 셔츠가 백미라지만, 개인적으론 디자이너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더한 셔츠의 진화가 반갑기만 하다. 화이트 셔츠의 제2막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