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스타일 다이어리 #03 도쿄의 꽃청춘
무려 9년 만에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등한시한 곳이 일본이었다. 이번에 문득 결심을 하게 된 데는 6월 13일에 종료한 이세이 미야케 전시가 계기가 되었다. 훌륭한 전시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고, 한때 내가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했던 브랜드이니 이건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직 전시 하나만을 위해 여행을 계획하다니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1박 2일로 짧은 일정을 잡고 20만원대의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샀다. 짐은 얼마나 줄여야 하나 고민하다 아예 ‘없이 살기’에 도전해보기로 하고 에코백 하나만 달랑 어깨에 멘 채 현해탄을 건넜다. “수트케이트는 없습니까?”라고 물어보던 세관원의 그 놀란 표정이란! 짐이 없으니 만사가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장을 풀 필요도 없이 곧장 시내로 들어가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고 구경을 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급부상한 아오야마 ‘코뮌 246’에서 교환학생으로 일본을 방문한 스위스 아가씨 둘과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찾아간 곳은 아사쿠사에 새로 생긴 ‘분카(文化) 호스텔’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화제의 호스텔로 디자인이 예쁘다며 건축가 친구가 추천한 곳인데, 실제로 보니 꼭 어느 대학의 기숙사 같은 분위기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1층 로비에는 일본이 궁금해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청춘들이 이리저리 무리 지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야, 물 좋다!” 나도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한 젊음의 바이브를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다. 반면 위층의 침실과 샤워장은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써야 함에도 놀랍도록 청결하고 정숙한 무언의 규율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새하얀 침상과 이불이 마련된 조그만 나무 상자는 어릴 때 집 안 어딘가에 몰래 만들었던 나만의 비밀 기지와 비슷했다. 기대가 별로 없었는데 무척 깨끗하고 아늑하다. 단돈 3만원에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이런 취침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어릴 때 배낭여행을 못 다녀본 나는 패션 에디터가 되면서 샤넬의 초청으로 처음 도쿄에 왔었다. 분수에 맞지 않게 비즈니스 클래스를 탔고, 조금도 걷지 않고 늘 리무진을 탔으며, 전망 좋은 5성급 호텔에 머무르며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고 언제나 호화로운 부티크만을 돌아다녔다. 무전취식도 낭만이었을 20대를 그런 식으로 보내고 나니, 솔직히 그 이후엔 아무리 비싸고 좋은 호텔에 머물러도 별 감흥이 없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부유한 젯셋 스타일 여행이 아니라, <꽃보다 청춘> 같은 소박한 여행을 더 동경하게 되었지만, 이제 와 이 나이에 더러움과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용기를 내 도전해보니, 항공과 숙박을 포함해 23만원짜리 초저가 여행이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싱싱한 에너지와 영감이 몸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이 숙박의 가장 좋은 점은 심신이 젊고 건강한 외국인 친구를 얼마든지 쉽게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건 파크 하얏트 로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