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리는 자로 잰 듯 반듯한 실루엣과 장식을 최소화한 심플한 디자인의 옷에 몸과 마음을 바쳐왔다. 하지만 정갈하고 담백한 유기농 음식만 먹다 보면 자극적이고 강렬한 맛이 이내 그리워지는 법. “포화 상태에 이른 놈코어 트렌드의 반작용과 같은 것이죠.” 저명한 패션 평론가와 디자이너들이 입을 모아 찬양한 ‘글램코어(Glamcore)’가 새로운 트렌드로 대두하고 있는 요즘, 그 중심에서 극도로 화려하고 대범한 스테이트먼트 퍼가 위용을 뽐낸다.
가을·겨울 시즌이면 퍼는 어떤 형태로든 늘 유행의 중심을 지켜왔지만 이번에는 그 양상이 좀 더 뚜렷하다. 지칠 줄 모르는 클린 룩과 미니멀리즘의 행보에 반기를 들 듯 어느 때보다 도발적이고 대범하며, 쿠튀르 컬렉션을 방불케 하는 정교한 기술력으로 탄생한 것. ‘사모님’ 소리 듣기 일쑤이던 특유의 고루한 느낌을 덜어낸 동시대적 디자인 역시 올겨울 스테이트먼트 퍼의 관전 포인트다.
동물 보호 단체의 지속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매번 다채로운 모피 룩을 선보이는 펜디는 이번 시즌 더욱 젊고 참신한 모피 룩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모피에 하나하나 정교하게 색을 입히고 수작업으로 섬세하게 엮어 완성한 펜디의 퍼 아우터는 호화로움의 절정을 보여주지만, 낡은 데님 팬츠 위에 입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모던하고 근사한 모습이다. ‘미켈레 효과’를 톡톡히 본 구찌 역시 감각적인 디자인의 스테이트먼트 퍼를 선보였는데, 아티스트 트러블 앤드루의 그래피티와 조화를 이룬 모피 코트는 고색창연한 호텔 파티보다는 스트리트 신에 걸맞아 보인다.
한편 런던의 빅 쇼로 자리매김한 마리 카트란주와 아냐 힌드마치는 유쾌하고 팝적인 이미지와 컬러가 아롱진 퍼 코트로 쇼의 완성도를 높였고, 색색의 털을 두꺼운 털실처럼 규칙적으로 엮어 대담한 룩을 완성한 클로에와 블루마린, 참신한 패치워크 기법이 돋보인 살바토레 페라가모와 프라다, 프로엔자 스쿨러의 퍼 아우터도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그동안 안전제일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심플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즐겨온 이들이라면 스테이트먼트 퍼의 유행이 달갑지만은 않을 듯. 하지만 디자이너들이 제시한 이 호화로운 퍼는 공작새처럼 과시적인 ‘코스튬 스타일’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약간의 대범함과 기이함(eccentric)을 갖춰야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어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말에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익숙함과 안전함에서 탈피해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게 바로 스테이트먼트 퍼가 선사하는 자유로움일 테니까.